#36. 시한부의 꿈 (9)
“나는 네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이 한마디에 아기들의 눈에서 눈물방울들이 영글었다. 계속해서 쌓고 또 쌓아두기만 하고 있었을 슬픔들이었다.
“그러니 제안하겠다. 이번 전역(戰役/Campaign)이 네 어머니의 최종적인 승리로 마무리되고 나면, 그때는 내게로 와서 두 번째 삶을 구해보지 않겠나?”
684는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두 번째 삶이라니…… 영문을 모르겠어.」
“말 그대로의 의미다. 내겐 네 자매들 중 하나의 시체가 있다. 번호는 331번이지.”
「331…….」
“그래. 331. 네게도 아마 익숙한 번호일 거라 생각한다. 너희 기사단과 내 세력이 처음으로 조우한 장소에서 목이 매달린 채로 죽어있었던 자매의 번호니까. 너희는 아마 임무 중 실종으로 처리했을 것이고.”
이어 나는 331의 시체를 확보하고 복원을 시도한 경위를 적당히 가감하여 설명한 후, 그 죽은 몸에 살아있는 뇌와 영혼을 접붙이는 이식수술의 가능성을 말했다.
684가 느낄지 모를 갈등에 대해서도.
“……자매의 육체를 취하는 데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네 어머니는 살아있는 딸의 몸을 빼앗은 것이지만, 네 자매는 이미 죽어있는 몸이니까. 내가 거두어 보관하지 않았다면 어느 짐승의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을 유기체 덩어리일 뿐. 그 안엔 정신도, 영혼도 남아있지 않아.”
이야기를 듣는 내내 684는 온몸으로 동요를 드러냈다.
충격, 고뇌, 흥분, 그리고 경악과 두려움.
이 순간 뱀의 육체를 이루는 아기들은 시청각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정의 급류 그 자체였다. 비늘이 파도치는 듯한 표정 변화의 물결.
684는 한참 만에야 떨리는 화음을 모아 흔들리는 물음을 빚어냈다.
「정말로 나를 살려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성공할 확률은 거짓말로도 높다고 할 수 없어.”
「…….」
“내가 대마법사라곤 해도, 벌써 사후경직이 한창이던 시체를 온전하게 복원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면서 「생명」을 돌릴 능력이 있는 마법사의 살아있는 뇌가 주어진다면…….”
공백을 넣고 시선을 맞추며 던지는 실낱같은 희망.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684는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기실, 내가 예상하는 이식수술의 성공률은 낮게 잡아도 8할 이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선 어려움을 크게 과장해놔야 했다. 희망은 작고 절박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상품이며, 실패와 죽음에 대한 우려는 684로부터 다른 생각에 몰두할 여유를 빼앗을 테니까.
‘마침내 성공했을 때의 환희도 그만큼 커질 테고.’
정수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힐 거대한 환희. 남은 평생 다시는 느끼지 못할 크나큰 감격과 기쁨. 그것들은 684가 내게 느낄 감사의 깊이를 결정적으로 더해줄 것이다.
“어떤가. 해볼 의사가 있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도록 하마.”
「하겠-」
호흡이 모자란 탓에 흘러나오다 끊어지는 화음. 흉물에 박힌 아기의 얼굴들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정신적인 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호흡곤란. 커다란 몸을 뒤틀어댄 끝에 간신히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 684는, 밀린 숨을 몰아쉬며 허덕허덕 말했다.
「하겠어. 도와줘.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너는 단지 나에게로 오기만 하면 된다. 다만 언제, 어떻게 오느냐가 중요하겠지. 그레이스가 알면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겠나? 네가 두 번째의 삶까지 네 어머니에게 바쳐야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내게서 두 번째 삶을 구하라는 말만으로는 684의 머리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함의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은 듯하여, 나는 직설적으로 못 박았다. 제2의 생을 바란다면 그레이스의 아래에서 벗어나라고.
「전향을…… 하라는 거야?」
“왜. 의탁하기엔 내가 못 미더운가?”
「아, 아니! 미덥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맹세한다. 네 어머니가 먼저 협정을 위반하지 않는 한, 나 또한 네 어머니와의 협정을 깨지 않겠다고. 그레이스와 내가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동안에는 나를 돕는 것이 간접적으로 그레이스를 돕는 일이기도 하겠지.”
「…….」
“어차피 내가 아니면 네 어머니에 대한 너의 헌신은 곧 끝날 수밖에 없어. 그레이스도 그러더군. 네가 다르에스살람 낙성까지는 살아있게 해달라고. 그 이후엔 네가 없어도 딱히 아쉽지 않다는 투였다.”
나는 684에게 자신이 처한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너는 이게 진실임을 알 것이다. 「콜레로의 뱀」의 전략적 효용은 이번 전역에서 정점을 찍고 하향곡선을 그릴 일만 남았음을. 군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외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 주술사 왕의 위엄은 네가 있어야만 하는 선을 넘어선 지 오래야.”
「으응…….」
“결정은 네가 내리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싶군.”
흉물의 안에선 수만 개의 작은 심장들이 빠르고 세차게 박동하고 있었다. 혈관에 흐르는 아드레날린의 색채는 로더필드와 결전을 치를 때만큼이나 진하고 강렬하다.
나는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을 떠올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지금의 684는 이제껏 자신의 전부였던 세상을 깨고 나오려는 새였다. 흥분과 두려움이 함께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브락사스가 되는 건가.’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의 일곱 철자(ΑΒΡΑΣΑΞ)는 수비학적으로 365의 합을 이루며, 새는 여기에 닿아 마침내 생의 시간을 얻는다.
내게 남겨진 기억에 따르면, 스승새끼는 헤르만 헤세를 제법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필치를 선호했던 것인지, 아니면 작품들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고대 희랍 주술의 주문이기도 한 아브락사스는 보통 아블라나타날바(ΑΒΛΑΝΑΘΑΝΑΛΒΑ)라는 팔린드롬(거꾸로 읽어도 동일한 단어)과 함께 적힌다.
아블라나타날바는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의미였다.
「만약에-」
번민하던 684가 어렵사리 묻는 말.
「만약에 내가 전향을 한다면, 당신 말처럼 언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혹시, 생각해둔 바가 있다면 조언을 해줄 수 있겠어?」
이미 반쯤 넘어왔군.
“바다로 나와라.”
「바다?」
“그래, 바다. 이번 전역의 마지막 전장이 될 다르에스살람이 항구도시이지 않나. 도시를 떨어뜨린 후 점령지 안정화 임무를 수행하다가, 수명의 한계가 다가왔을 때 바다로 나와 버려. 파도 아래에 숨고 나면 누구도 너를 찾지 못할 테니.”
「아…….」
684가 크고 무겁다지만 중대형 선박의 체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직 선단의 기함인 스텔라 포르투나쯤 되면 따로 화물칸을 비우거나 하지 않아도 684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제안은 여기까지다. 너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으마.”
알이 부화하기도 전에 병아리부터 세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거의 성공을 확신했다. 684는 내가 기다리는 바다로 올 것이다.
684를 보낸 후, 나는 596의 일기에 적혀있었다던 내용을 곱씹었다.
‘죽은 원수의 지혜로 살아있는 원수들을 친다, 라.’
그레이스는 나와의 첫 회담에서도 ‘지금의 내 육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영생의 지혜가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자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 지혜인즉, 내가 어찌 반응하는가는 곧 나를 헤아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596의 일기에 오류가 있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땐 그레이스가 불필요한 잔혹함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아기의 영혼을 어머니의 몸으로 밀어 넣느니, 차라리 그 영혼을 갈아 마력으로 환원하는 편이 보기에 깔끔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잔혹함은 의도한 바가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의 산물이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내 지식이 닿지 않는 마법적인 이유가 있었거나.
나는 684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 돌아섰다.
“우리도 이만 복귀하자.”
우리가 명목상의 임무인 야간 초계비행을 마치고 합류했을 때, 평화유지군과 각국 교민들의 행렬은 다시금 우울한 이동을 재개할 채비를 갖추는 중이었다.
지친 이방인들의 행렬은 휴식을 취할 때마다 적잖은 양의 쓰레기를 생산했다. 이러한 쓰레기들은 그때그때 모아서 매립하거나 소각하는 게 원칙이었다. 적에게 행렬의 인원과 상태 등 유의미한 정보를 주는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당연한 말이지만 매립보다는 소각이 더 확실하다. 하여 발화능력자를 보유한 헌터 조직들은 매번 이동을 개시하기 전 쓰레기 처리 할당량을 분배받았다. 어느 한 곳에서 전담토록 하자니 양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
그러니 잘게 나누어 처리하는 편이 빠르기도 하고 불만도 적다. 헌터들은 쓰레기 처리 같은 더러운 일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리의 숙영지로도 한국 국적의 쓰레기들이 실려 왔다. 나르는 인력은 역시나 각성능력자 공익근무요원들. 각성자이면서도 전투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헌터들에겐 경멸을 받고 관계자들에겐 냉대를 당하는 값싼 노동인력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꼬박꼬박 밥이나 간식을 먹여서 돌려보냈다. 이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 평판 관리 작업이었다. 평판이 좋으면 수상쩍은 일이 있어도 의심을 피하기 쉽다.
“어라?”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르려던 경태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지저분한 쓰레기들의 틈바구니에서 혼자 바스락거리는 검은색 비닐봉지 하나를 끄집어냈다. 봉지를 찢은 경태가 오,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여기에 웬 캥얼쥐가 다 있담?”
봉지에 들어있던 것은 다 죽어가는 각성체 개 한 마리였다. 할딱거리는 숨과 질질 흘러내리는 침은 단순히 산소가 부족해서가 아닌, 불사암의 고통에 의한 것.
병든 개의 뒷덜미를 붙잡아 들고 눈을 들여다보던 경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오케이.”
그러더니 그 개를 그대로 들고서 내게로 오는 게 아닌가.
“형님.”
“뭐냐?”
“저 이거 주십시오.”
“……달라니?”
“전에 선물 준다고 하셨잖습니까. 술은 안 된다고 하셨으니 대신 이걸로 하겠습니다.”
“살려서 키우게 해 달라 이거냐?”
“옙. 안 될까요?”
이 녀석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왕 키울 거라면 전문적으로 브리딩이 된 품종견을 하나 들이는 게 낫지 않나? 나는 뜸을 들이다가 반문했다.
“안 될 거야 없다만, 왜 하필 그 개를?”
“뭔가 삘이 딱 꽂혔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 저랑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관상이요.”
“…….”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한 나는 까딱이는 손짓으로 개를 넘겨받았다. 각성 수준이 낮은 개 사이즈의 생명체에 대하여 마력회로를 교정하고 불사암을 제거하는 건, 딱히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바로 완치를 시켜주기는 어려웠다. 뿌리가 깊어진 암을 제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시간이거니와, 개의 영양상태가 나빠 강도 높은 「생명」의 운용을 오랫동안 감당할 수도 없었던 까닭이다. 암세포를 분해하여 영양분으로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암을 약화시키는 선에서 일단락을 짓고, 나중에 이어 마무리를 하는 수밖에.
이런 내용을 설명한 후 잠깐 사이에 상태가 나아진 개를 돌려주자, 경태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서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니 예전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고, 이제부터 니 이름은 춘식이여. 성은 나를 따라서 김씨로 하자. 알았지, 김춘식이?”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원받은 개는 기운 없는, 그러나 고통스럽지는 않은 짖음으로 새로운 주인에게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