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한부의 꿈 (8)
예상대로, 한국 외교부 사무관 1인의 실종은 습격이 남기고 간 43인의 사상자와 아비규환에 가볍게 묻혀버렸다. 사라진 동료를 찾으려는 외교부 긴급대응팀의 노력은 타라자 부대와 공능법인들에게 수색 요청을 넣는 선에서 그쳤다.
철수를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지금, 수색 요청은 최소한의 할 일을 했다는 면피성의 행정에 불과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내몰린 외교관들의 무기력함이라고 해야 할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으나, 안타깝게도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체 이동 일정을 고려하면 더 이상의 수색은 무리입니다.”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경태의 통보에, 긴급대응팀 관계자는 체념과 탄식이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니, 무엇을요?」
“원하신다면 저희가 남아서 조금 더 수색을 진행해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추가적인 비용을 청구하기는 하겠습니다만, 의뢰를 한다면 저희만큼 합리적인 곳이 또 없을 겁니다.”
「아, 그거야 물론 그렇겠지요. GHSS 컨소시엄의 협력엔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GHSS 컨소시엄이란 조직 산하의 공능법인들이 대외적인 행동을 함께하기 위해 결성한 기업연합이었다. 눈속임을 위해 조직과 무관한 국내 및 해외법인들도 회원이나 옵서버 자격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들과는 어디까지나 거시적인 협력과 이익을 주고받을 따름이다.
「추가 수색은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외교관은 괴로움을 담아, 그러나 빠르게 대답했다.
「여러분이 일부라도 빠져버리면 최우선 보호대상인 교민들의 신변이 그만큼 위험해지고 맙니다. 협조성이 낮은 공능법인들을 통제하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함께 움직이는 다른 나라들도 불만을 표하겠지요. 이토록 위험한 시기에 핵심전력을 빼내다니, 미친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우려하는 바엔 나머지 외교관들 자신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작금의 상황은 매우 위태로웠다.
바다에선 전함 미주리가 잔지바르 해협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육지에선 모로고로를 방어하던 평화유지군 역시 철수를 결정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후방의 항구가 닫히기 전에 내빼기로 한 것이다. 잔지바르 해협의 길이는 약 120킬로미터에 불과하며, 해협을 지나면 곧바로 다르에스살람 앞바다가 나오니까.
모로고로 방면의 부대들은 정말 한계까지 버티고 또 버티다가 물러난 셈이었다.
전함 미주리는 내 보이지 않는 가호를 받으며 필연적인 재해처럼 남하했다. 내려오다 멈추고, 다시 내려오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느긋한 이동은 극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각본가의 요구사항이었다.
자연히 이링가에서부터 내려온 탈출 행렬은 전보다 더한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모로고로와 다르에스살람의 낙성을 예상하고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이동 경로를 잡은 것이긴 하나, 속도를 더 내지 못하면 이쪽 경로 또한 생문이 닫힐 게 뻔했기 때문.
그러한 초조함은 모험적인 공중수송 시도로 이어졌다. 이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은좀베 시내, 폐쇄된 공항 활주로로 내려오던 수송기는 민가에서 솟구친 대공포 사격에 걸려 날개가 찢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수송기는 활주로 끝자락에 고각으로 곤두박질쳐 폭발했다.
평화유지군이 미리 배치해두었던 헌터 기동대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존재를 과시하는 식으로 제압 효과를 노린 모양이지만, 광신도들을 상대로 그런 전략이 효과를 볼 리가 있나.
경태가 말했던 기도메타인가 하는 신조어가 딱 들어맞는 추태였다.
7월 17일 새벽.
나는 684의 응급호출에 응하여 먼 거리를 비행했다. 이동경로에 대한 사전정찰 임무는 내가 표면적인 신분의 역할을 다하며 식사추진과 왕진(往診)을 다니기에 좋은 핑계였다.
식사를 마친 외로운 환자는 오늘도 대화를 갈구했다.
「어머니께서 마스터 엘름스테드를 어떻게 죽이셨는지 아느냐고?」
“그래.”
나는 대화의 갈피에 그레이스에 관한 질문을 끼워 넣었다. 답을 해도 딱히 그레이스에게 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예전의 684라면 답변을 회피했을 법한 질문을. 말하자면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조금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고.’
새로운 대마법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황금기의 세 유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와 그레이스는 이미 대마법사인 인간의 영혼을 소화하는 예외적인 방식으로 대마법사의 반열에 든 자들이었다.
원탁의 다른 마스터들이 차갑게 식은 마스터 엘름스테드를 발견했을 때, 살해 현장엔 곳곳이 훼손된 마법적 의식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지혜를 모아 이 흔적들을 더듬은 원탁의 마스터들은, 의식의 기능이 희생자의 영혼을 포식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정했다.
그러나 이는 마스터들도 자신 없이 내놓은 추정이었다.
의식의 기능 자체엔 의문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 의식만 가지고는 대마법사의 영혼을 강제로 적출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안 되었고, 죽은 다음이라면 의식이 끝날 때까지 영의 회로를 온전하게 보존해둘 방법이 없었다. 대마법사의 영혼은 평범한 자들의 영혼과는 격이 다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탁의 추적과 그레이스의 도주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에서, 원탁은 여러 정황증거들을 통해 그레이스가 대마법사의 힘을 손에 넣었음을 확인했다.
결국 원탁의 늙은이들이 그레이스에 대해 품은 증오는 사실 공포의 지분이 큰 것이었다. 불분명한 과정을 거쳐 대마법사의 영혼을 빨아먹은 괴물이, 세상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원탁 바깥을 배회하고 있는 꼴이었으므로.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사실관계였으나, 684는 이를 부정했다.
「아니야. 그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크로우허스트의 지식과 기억을 이어받은 당신이라면 그렇게 아는 게 정상이겠지만…….」
“잘못 알고 있다?”
「응. 어머니께선 사실 당신과 다르지 않아.」
“나와 같다니? 나는 크로우허스트가 저 스스로 기어들어온 경우인데?”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엘름스테드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의식에 호응해 어머니의 안으로 들어간 거였거든.」
이는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진실이었다.
“그자가 왜? 설마 자신의 영혼까지 내어줄 정도로 그레이스를 사랑했나?”
이렇게 물어보면서도 나는 의혹에 차있었다. 그럴 리가. 진심으로 그레이스를 사랑하기는 했을지언정, 그 사랑이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의 자기애와 생존본능을 무너뜨릴 만큼 대단한 것이었을 리가.
스승새끼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놈의 언행은, 분명 그레이스를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무언가로서 사랑하는 자의 것이었는데.
684는 내 의혹에 맞는 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렇지는 않았어. 다만 자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믿었고, 그런 어머니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도 믿었지. 자기를 새롭게 낳아주겠다는 약속을. 어머니께서 그 인간을 제대로 속여 넘기셨던 거야.」
“…….”
「엘름스테드는 자신의 씨로 어머니를 임신시킨 다음, 제 자식의 몸으로 이 세상에 다시 나오고 싶어 했다고 해. 그리고 그렇게 얻은 몸으로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돌봄과 봉사를 받으며 다시 어머니를 범하는 나날을 꿈꿨다고……. 정말 이상한 성벽이지?」
“그냥 이상한 수준이 아니다만.”
내가 의식적으로 조금 질린 기색을 지어 드러내자, 흉물에 붙은 아기들이 서로 겹쳐지는 웃음들로 흉물답지 않은 화음을 이루었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경태가 리시버를 통해 한마디 한다.
「오우, 역시 영국이군요. 과연 신사의 나라답습니다.」
신사의 나라와 이상성욕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으나, 좀 더 생각해보니 관계가 없지는 않았다. 대영제국 시절의 섬나라 신사들은 성생활이 문란한 경우가 제법 있었으니.
그레이스는 자신이 처녀수태 이외의 방식으로 자식을 생산한 적이 없다고 했었다. 엘름스테드가 깃들었던 태아의 육은 아마 의식의 마력에 의해 완전히 분해된 것이 아닐는지.
낙태는 낙태이되 수단이 매우 초현실적인 낙태라 하겠다.
그 의식의 현장 주변엔 영혼이 갈려나간 산 제물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엘름스테드가 대처리즘의 그늘에서 모아온 하류인생들의 죽음. 그 수가 세 자릿수를 가볍게 넘었으니, 그레이스에게 낙태에 쓸 마력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크로우허스트를 잡아먹은 경위도 조금은 더 설득력 있게 들었겠군. 자기가 직접 유사한 경험을 한 셈이니.’
딱히 기대가 없었건만, 작게나마 앞으로의 판단에 고려할 만한 정보를 얻었다.
684가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그레이스 입장에선 아마 정훈교육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들’의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엔 바로 그런 자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을 가르친 것이겠지.
잠시 침묵하던 684가 조금 가라앉은 화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 같은 일을 겪으신 어머니께서, 엘름스테드와 같은 방식으로 새 몸을 지어 입으신 건 조금은 슬프고 우울한 일이라고 생각해.」
“무슨 말이냐, 그건?”
「596번 자매의 거처에서 발견했던 일기. 그 일기에 적혀있더라. 어머니께선 스스로를 다시 낳으셨다고.」
그레이스가 최초의 대담에서 ‘지금의 내 육체’라는 말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그녀의 육신이 타고난 그것이 아님은 짐작했던 바다. 그렇다면 육체를 갈아타는 가장 유력한 방편은 자식의 몸을 강탈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596이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의식의 정체가 아무래도 이것이었던 모양.
나는 가볍게 턱짓을 했다.
“그 일기의 내용,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을까?”
684가 내 앞에서 그레이스에 대해 조금이나마 부정적인 감정을 내비친 것은, 나에 대한 신뢰의 깊이도 깊이이거니와, 내면의 둑이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렸다는 방증이다.
내가 기다리던 순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이르게 찾아왔다.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여겼건만.
684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번 느리게 머리를 끄덕인 후, 음색을 달리하여 596이 남긴 일기의 내용을 읊었다. 세세한 부분들은 조금 다를 수도 있음을 미리 주지시켜놓고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을 때, 어머니와 태아는 서로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 둘이자 하나다. 연속성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에 두 개의 영혼이 지극히 안정적으로 공존하는 상태.”」
「“하나의 영혼은 성숙하고 하나의 영혼은 미숙하다. 만약 성숙한 쪽의 영혼이 대마법사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면, 영혼의 치환을 시도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께선 내게 당신의 재탄생을 거들게 하셨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가까이에서 교대로 어머니를 지키며 어머니의 수발을 들어드리는 게 내게 주어진 역할의 전부였으니까.”」
「“처음엔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과 존경은 견고한 것이었다. 다른 모든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께서 행하실 마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도, 그 마법이 내 자매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께서 보다 나은 육체로 다시 태어나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을 뿐.”」
「“어머니께서는 새로운 몸을 완전히 다 성장한 상태에서 낳고 싶어 하셨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새로운 몸이 완성되었을 때, 어머니께선 마침내 자신과 아기의 영혼을 맞바꾸셨다. 나는 그 시점을 울음소리를 듣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어머니의 것이었던 몸으로 들어간 내 자매의 울음소리를.”」
「“어머니는 아기의 배를 찢고 나오셨다.”」
「“피와 양수가 쏟아져 나왔다.”」
「“갓 세상의 빛을 본 내 자매는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갔다. 가운데가 터져 쭈글쭈글하게 가라앉은 가죽부대 같은 몸에 갇힌 채, 자신이 무슨 이유로 어떤 고통을 겪는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서. 배가 찢어진 몸으로는 더 이상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다.”」
「“왜였을까. 꺽꺽대는 자매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지금껏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레 낯설어지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추웠다.”」
「“어머니께선 죽은 원수의 지혜로 살아있는 원수들을 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기는?”」
나는 다음을 기다렸으나, 흉물의 몸에 붙은 아기들은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끝인가?”
「응. 그날을 회상하는 기록은 이걸로 끝.」
684가 슬쩍 눈알들을 굴려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일기의 나머지 내용들도 듣고 싶어? 음, 이거 외에는 그렇게까지 인상적인 페이지가 없었는데……. 사소한 내용들이 많아서, 외워질 정도로 읽어보진 않았어…….」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말해줘서 고맙다.”
나는 마지막으로 숙고한 뒤에 입을 열었다.
“684.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