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한부의 꿈 (6)
만나는 횟수가 늘고 심리적 장벽이 허물어짐에 따라, 684는 더 이상 나와의 사적인 대화를 삼가지 않게 되었다.
전략병기인 「콜레로의 뱀」은 단독으로 전장에 출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레이스는 운용한계가 임박한 전략병기를 마지막까지 알차게 활용하고 싶어 했으므로, 684는 수명연장과 전력유지에 필수적인 휴식시간을 제외하곤 상시 작전에 투입되어있는 상태였다.
즉 현시점에서 684가 외로움을 해소할 상대는 사실상 나 한 사람이 유일했다. 생의 마지막을 앞둔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을.
식사를 마친 684가 바로 떠나지 않고 뭉그적대는 것은 지각없이 드러내는 고독의 신호라고 봐도 좋았다. 내가 뭔가 말을 걸어주지는 않을까, 혹은 뭔가 자신 쪽에서 대화를 시작할 구실이 없을까 생각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684는 자매들을 제외하곤 수평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매번 나의 역할이었다. 최근의 임무와 활동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쪽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식이면 길어봐야 한 번에 일이십 분 남짓인 시간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나와 내 자매들에게, 기사단 바깥의 세상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정글과도 같았어. 그 괴물들이 누구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거야.」
내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줌을 마중물 삼아 끌어낸 684의 내면.
「우리는 오직 어머니의 그늘과 영도 아래에서만 안전할 수 있었어. 그렇다고 배웠고, 그렇다고 믿었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했지. 당신이 나타나는 바람에 조금은 퇴색되어버린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자매들에게는 칠흑 같은 바깥세상에 희미한 불빛 하나 켜진 정도에 불과해.」
이는 일찍이 내가 짐작했던 바와 일치하는 진술이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선명하게 갈라지는 세계관, 그리고 복제체들이 달리 몸을 의지할 곳이 없는 현실은 그레이스의 지도력을 극대화해주는 요소들이었다.
684는 나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았고, 특히 내가 어리고 힘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듣기 좋아했다.
「그런 눈을 가지고서 쓰레기통을 뒤졌다는 게 대단하네. 누구보다도 더 선명하게 더러움을 볼 수 있으면서 버려진 음식을 찾아다닌 거잖아. 내가 사람의 몸이었을 땐 그렇게까지 굶주린 적이 없었고, 최소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먹으며 지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르다. 이 눈이 있었기에 오히려 거부감이 적었던 거라고 봐야지.”
「어째서?」
“그 당시의 나는 황금기의 눈이 제공하는 정보량에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런 내겐 세상만물 전부가 괴기스럽게 느껴졌으니까. 쓰레기통 속의 더러움도 바깥의 괴기스러움과 큰 차이가 없는 하나의 정보였을 뿐.”
「음, 그런가?」
“그래. 악취가 다소 거북하긴 했다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들 중에도 의외로 깨끗하고 멀쩡한 것들이 많았지.”
이렇게 말하며, 나는 잠시 내가 거둔 부하들을 떠올렸다. 사회로부터 갈리고 버려지는 자들 사이에 귀하고 쓸모 있는 원석들이 얼마나 많이 끼어있는지를.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던 시절엔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길목마다 경쟁자들이 바글거릴 지경이었으니.”
「당신이 살았던 곳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나봐?」
“뭐, 그런 셈이었지.”
내가 말한 좋은 길목이란 미군부대 근처였고, 내가 말한 경쟁자들은 주로 꿀꿀이죽을 파는 요식업자들이었지만, 거기까지 말하면 내 근거지를 특정하기 쉬워지니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미군부대라는 요소 하나만 제외하면, 과거의 아시아에선 어느 나라에서든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던 일이지 않았던가.
내가 알기로, 미군 부대 근처의 꿀꿀이죽 업소들 중엔 80년대 초반까지도 옛날 방식 그대로 재료를 조달하던 곳이 있었다. 그것이 그 업소들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꼭 그런 몰상식한 요식업자들이 아니더라도 경쟁자들은 얼마든지 많았다. 어느 여인과 반쯤 빈 군납 스팸 통조림을 붙잡고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뺨을 한 대 얻어맞았던 기억이 난다.
통조림은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었고, 그 여인은 낡은 포대기로 아기를 싸 업은 한 사람의 가난한 어머니였다.
약자는 선하지 않다. 선하지 않았던 나는 도망치는 여인을 쫓아가 몸통박치기로 넘어뜨렸다. 어머니가 쓰러질 때 아기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기는 머리에서 피를 흘렸고, 시끄럽게 울어댔으며, 어머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기의 상태를 살폈다.
그때의 나는 통조림을 들고 서서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노의 잔열이 남아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통조림으로 후려쳐주고 싶었는데, 함께 우는 아기와 어머니를 보다보니 격한 흥분이 잔불 같은 짜증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향해 악을 썼다.
“이 애미애비도 없는 새끼야! 혼자 그거 다 처먹고 배나 터져 죽어라!”
유감스럽게도 통조림의 양은 내가 배가 터질 만큼 많지 않았다. 그날의 식사는 먹고 나서도 허전함이 남을 만큼 모자랐다.
나는 이 같은 과거를 뺄 것 다 빼고 담백하게 입에 담았다.
“보육원을 벗어난 다음에는 이런 생활을 그리 길게 하지 않았다. 마스터 크로우허스트의 지식과 기억을 다 흡수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웠던 과도기에, 당장의 허기가 급했던 내가 일시적으로 과거의 생활을 답습했던 것뿐이야.”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정보를 캐거나 회유를 시도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다시 처음처럼 눈치를 보던 684는 조심스럽게 화음을 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크로우허스트의 지식과 기억이 당신의 성장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거지?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된 거고.」
“지금의 당신?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지 모르겠군.”
「내 말은…… 인격이 아직 미성숙하던 시기에 크로우허스트 같은 늙은 괴물의 기억을 받아들였음에도, 당신은 결국 그와 정말로 많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거야.」
“…….”
글쎄. 내가 끊임없이 선을 긋고자 노력하기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의 선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자들이 체감하기로는 나와 제국주의자들이 비슷하게 두렵고 사악하게 느껴지겠지.
내 침묵을 어찌 해석했는지, 684는 사과를 건네 왔다.
「불쾌했다면 미안해. 다만, 나하고도 약간은 겹치는 면이 있구나 싶어서.」
“겹친다고?”
「응. 어머니와 대등한 대마법사인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 내게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 일찌감치 짐작하고 있었고, 네 어머니의 입으로 듣기도 했다.”
684가 이런 부분에서 나와 동질감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나야.」
684는 단순한 동질감 이상을 입에 담았다.
「예전에는 자매들과 나 사이의 구분이 흐린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 모두가 다 어머니를 닮았고, 모두가 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모두가 다 일정한 기억을 공유하고, 모두가 다 같은 두려움에 맞서 어머니와 서로를 지키며 살았으니까. 말하자면,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었던 거야…….」
한번 굳어진 ‘당연함’은 여간해선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흉물스러운 몸을 입고 죽음을 앞둔 자의 세계는 그 당연함에 금이 가고 있었다.
둑은 늦어도 무너지기 시작할 때 틀어막지 못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전략병기에 기회비용을 낭비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술사 왕으로서의 그레이스에겐 당장 손에 넣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여의도 김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생에 다시 오기 어려울 우량자산 바겐세일’ 즈음이 되겠지. 김씨 녀석이 그 소리를 하며 본사의 여유자금을 긁어갔던 게 2008년의 일이었다.
둑은 조금씩, 꾸준히, 계속해서 무너졌다.
「가끔씩 도망치거나 자살하는 자매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 자매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 단순히 미쳤거나 배신자라고만 여겼어. 때로는 둘 다였고.」
“지금은 아닌가?”
「아니야.」
684는 쉬이 긍정했다.
「이건 뭐랄까, 세상을 바라보는 세 번째 눈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야. 기존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눈이……. 지금의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유이려나?」
이렇게 말하며 수많은 눈들을 깜박여 보이는 흉물.
「내가 새로운 눈을 얻은 데엔 당신의 지분도 큰 것 같아. 흔히 사람은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들 하잖아. 당신은 우리 바깥에 서있는 타인이고, 지금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하는 나는 다른 자매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사람이야.」
죽을 때가 되어 사색이 깊어지는 건 모든 사람들의 공통분모다.
“그 눈을 얻어서 괴롭나?”
「설마.」
흉물의 몸에 붙은 아기의 얼굴들이 미소 짓는다.
「죽을 때가 다 되어 느끼는 게 아쉽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느꼈으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모르는 채로 죽었으면 마음은 편했겠지. 그러나 그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을 거야. 어떤 의미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도 더.」
“알 것 같군.”
만남이 누적될수록, 내가 흉물의 중추를 읽는 요령에도 경험의 가중치가 붙었다. 진실. 진실. 진실. 대화 내내 오로지 진실만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684의 토로가 진실을 무기로 삼는 계략일 가능성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작년이었던가?」
684가 회상했다.
「한 자매가 어머니의 품에서 달아났던 적이 있어. 마법구 몇 개와 어머니의 귀한 예장(禮裝)까지 한 벌 훔쳐가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었지. 그 자매의 번호가 아마…… 596번이었을 거야.」
나는 늦지 않게 표정관리를 했다. 내가 전율하는 거인의 뱃속에서 596번과 조우했던 것은 그레이스가 알지 못하는 정보다.
「당연히 척살대가 꾸려졌고, 그때의 나는 그 자매가 배치되어있던 지부에 남은 흔적들을 탐색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어.」
당연하게도, 684는 지부의 위치에 대해선 자세한 언급을 피했다.
「그 자매가 생활하던 방은 참 이상한 느낌이었지. 그림이나 장식 같은 것들이 정말 많이 숨겨져 있었거든. 수색 도중엔 일기장도 하나 나왔는데, 그 일기장엔 어머니가 과거에 치렀던 어떤 의식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더라. 내 생각엔 596번 자매의 변화가 그 충격을 계기로 시작되었던 것 같아.」
나는 그 의식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그 자매는 어떻게 됐지? 결국 잡혔나?”
「확실치는 않지만, 잡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684가 꿈꾸듯이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번 만나보고 싶어. 이제 나는 그 자매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
「들어보려고. 우리를 떠나 혼자서 보낸 시간들이 어떠했는지. 새로운 눈을 뜬 내게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그 삶엔 분명 596번의 시간과 비슷한 부분들이 있을 거야. 그러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들어보면?”
「내게 주어지지 않을 나날을 상상해보는 데 보탬이 되겠지.」
이렇게 한숨을 닮은 말을 내뱉고서, 684는 머리를 돌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만 가봐야 해.」
684의 시간감각은 조립식 아기들의 틈바구니에 박혀있던 시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684를 송별했다.
“무리하지 말고, 또 보도록 하지.”
「……그래, 또 봐. 연락할게.」
684는 흉물스러운 몸으로 기어 자신이 있어야 할 전장으로 향했다. 흉물의 꼬리 끝에 붙은 아기가 나를 향해 작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