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29화 (329/561)

#36. 시한부의 꿈 (5)

그레이스가 각성자 아기 대량생산 계획을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그레이스는 흉물이나 외부부착형 마력회로를 만들 게 아니라면 굳이 그런 계획에 대마법사의 인시를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검은 대륙의 인구는 중국보다도 많지 않던가. 이 대륙을 반의 반만 장악해도 병역자원이 너무 넘쳐나서 오히려 문제일 것이다. 동원 및 보급체계가 일정 선 이상으로 갖춰질 경우 각성능력자 천만 대군을 뽑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물론 질적으로는 원탁의 정예와 차이가 클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말처럼, 양에는 양만의 질이 있는 법.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레이스에게는 복제체 전투단과 칠각기사단도 있지 않은가.

전 세계는 벌써부터 「제5세계」의 출현에 전율하고 있었다.

주요 선진국들로 이루어진 제1세계.

옛 공산진영에 속했던 국가들로 구성된 제2세계.

자원을 가진 개발도상국들의 모임인 제3세계와, 지하자원이 없거나 있어도 채산성이 떨어지는 빈곤 국가들의 제4세계.

이제까지는 이렇게 네 개의 경계만이 존재하였으되, 앞으로는 주술사 왕의 영도를 따르는 제정일치의 블록이 세계의 다섯 번째 경계를 이루리라는 예측. 여러 싱크탱크들이 공통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던 이 예측은, 탄자니아 신성왕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현실에 성큼 가까워졌다.

나는 오늘자 워싱턴 포스트의 헤드라인을 떠올렸다.

「철의 장막, 죽(竹)의 장막, 그리고 주술의 장막.」

검은 대륙 바깥의 세계가 주술사 왕의 왕국에 대해 느끼는 위기의식은 이미 옛 냉전기를 떠올리게 하는 수준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요컨대 런던을 불태운 이후 그레이스와 나의 우호가 더는 지금 같지 않게 되어버리는 경우, 내가 보험으로 준비해두려 하는 예의 그 ‘참수작전’의 작계를 꼭 직접 가지고 있는 전력만으로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 여자도 내 암시를 알아들었겠지. 머리가 좋은 인간이니.’

내가 “나머지 세계에 적당한 질서를 남겨놓아라. 그러면 내가 네 앞을 가로막을 일은 없을 거다.”라는 당부에 담아놓았던 말 속의 말.

동맹을 맺으러 간 자리에서 대놓고 너를 견제하겠다 선언할 수는 없는 만큼, 겉으로는 그저 내가 얻은 평안을 지키고자 함이라 하긴 했다. 그러나 그 진의는 내가 너를 견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으라는 데 있었다.

그런 상태가 유지되기만 한다면, 주술사 왕의 제5세계는 내가 암중에서 나머지 세상에 대마법사의 힘을 실어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심대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련의 강도는 참수계획의 완성도와 비례할 것이다.

684에 대한 회유는 이런 맥락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흉물의 마음을 허무는 일은, 시간적으로 이링가의 평화유지군 및 주민 철수 보조임무와 맞물려 돌아갔다.

“떼어내! 떼어내!”

피로와 짜증이 가득한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한국군 장교, 타라자 부대 소속 대위가 병사들을 향해 거칠게 손짓한다.

떼어내라는 대상은 철수행렬에 따라붙는 현지인들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기성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신앙인들. 이 대륙이 아무리 주술의 땅이라 하지만, 기성종교에 대한 믿음이 깊은 자들은 주술사 왕을 숭배하는 데 거부감을 드러냈다. 특히 기독교도와 무슬림, 바하이교도들이 그러했다.

주술사 왕으로서의 그레이스는 딱히 이런 종교인들을 억압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그러나 생김새만 달라도 따돌리고 피부색이 다르면 차별하며 종교가 다르면 배척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도시에서, 믿음의 차이는 폭력과 약탈을 정당화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교육수준이 낮고 탐욕스러운 약탈자들은 이를 왕에 대한 충성으로 포장했다.

이렇게 탄생한 근 2천에 달하는 종교적 난민들은, 지금의 평화유지군으로선 도저히 데리고 갈 수 없는 군입이자 짐 덩어리들이었다. 보급품과 식량의 부족도 부족이거니와, 난민들 사이에 광신도 테러리스트가 끼어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기에.

장교가 재차 사납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두들겨 패서라도 쫓아내란 말이야! 차가 움직이질 못하잖아!”

그러나 장교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상급자와 난민들 사이에 낀 병사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난민들 앞에 엉엉 우는 아이들과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이 서있었던 까닭이다.

서있다기보다는, 같은 난민들에게 떠밀려 나온 것이라 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궁지에 몰린 약자들은 약자들 중의 약자들을 내세워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카카카캉!」

느닷없는 총성에 난민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허공에 대고 연발사격을 갈긴 대위가 병사들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쏴! 총을 쏘라고! 그리고 거기, 박천성이! 너는 발화특기 뒀다가 엿 바꿔먹을 거야? 방사기 화력 조절 가능하잖아! 적당히, 어? 사람 안 죽을 만큼만 뜨겁게 뿌려서 좀 밀어내봐! 빨래 말릴 땐 잘 쓰더니 이럴 땐 왜 못 써?!”

발화능력자용 화염방사기는 기본 원리가 제트 바이크의 추진계통과 다르지 않은 장비다. 불을 정교하게 제어·성형하는 능력이 없는 능력자라도, 이런 장비의 도움을 받으면 열기를 아주 쉽게 집중하여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직선으로 방출된 고열은 다른 각성능력자의 마력장을 간접적으로 침범할 수도 있다.

이런 방사기는 노즐을 풀어 방사각을 넓히고 화력을 조절하면 난방이나 군중통제(Crowd control)에 용이한 도구로 변모한다.

“꺄아아아악!”

가까운 위협사격과 뜨거운 열풍이 난민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개중엔 보란 듯이 십자가를 든 자들도 섞여있었다. 이 꼴을 본 한국인 선교사 하나가 제 무리를 이끌고 민간인들의 자리를 이탈하여 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당신들이 이러는 걸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줄 알아?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야! 같이 데려가야 해!”

이들은 내가 얼굴을 알아볼 만큼 악명이 높은 인간들이었다. 자신들이 전도한 현지인들을 꼭 함께 데리고 탈출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악을 써댔다는 선교단체와 그 우두머리. 외교부 긴급대응팀 관계자들이 이링가에 발이 묶인 데엔 이들이 차지하는 지분이 최소 절반은 된다고 들었다.

장교는 짜증스러운 낯으로 선교사를 가로막았다.

“여러 번 말씀드렸잖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구조하러 온 거라고! 자꾸 이렇게 멋대로 구시면 법에 따라 강제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사람의 법을 들이대지 마라, 이 사단 마귀 같은 군바리 놈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너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거다!”

“예, 예! 죽고 나서 지옥에 갈 테니 지금은 통제에 따라주십쇼!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장교는 각성능력자 병사들을 시켜 선교단체 일행을 원위치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힘을 당해내지 못해 질질 끌려가던 선교사는 병사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희들의 능력을 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거야! 그 힘으로 악한 권세에 복종하는 건 둘째 죽음으로 불못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받는 길임을 알아라!”

졸지에 ‘악한 권세’가 된 장교의 표정이 한층 더 피곤하게 찌그러진다. 개신교를 믿는 병사들 일부의 동요도 눈에 띄었다. 과거에 비해 종교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는 시대였다.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방해하는 요소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도시를 탈출할 때, 평화유지군 구성국들은 제법 많은 수량의 내연기관 차량들을 포기해야 했다. 그동안 한정된 보급역량 내에서 식량추진을 우선시해온 탓에, 비축된 연료가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말인즉 최소 1천 킬로미터가 넘을 대장정을 자신의 발로 걸어야 하는 인원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행렬의 이동속도는 자연히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춰졌다. 가장 엄중히 보호를 받아야 할 민간인들조차 로테이션으로만 차량에 탑승할 수 있었다.

“콜록, 콜록!”

느린 행렬 곳곳에선 힘겨운 기침 소리들이 들려왔다.

좋지 못한 위생과 영양상태, 황사보다 나쁜 대기질, 건조한 공기와 고지대 특유의 심한 일교차, 아직까지도 유행이 끝나지 않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낙후된 대륙의 풍토병 등. 이런저런 악조건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으니, 이동 개시 첫날부터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왕의 군세가 투입하는 공중기병들의 숙련도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만 갔다.

처음에야 노획한 장비들이 워낙 낯설어서, 또 그 장비들이 파일럿에게 맞게 조율되어있지 않아서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는 결국 비행시간이 쌓이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왕의 군세는 심지어 자체 제작한 로켓추진 단엽기와 장갑을 두른 건쉽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이것들은 물론 현대적인 공군이나 헌터 공중기병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나, 하나를 격추시킬 때 두세 대를 새로 띄우는 물량전은 지금의 평화유지군 세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중탈출은커녕 공중보급조차도 갈수록 힘겨워지는 상황.

그레이스는 이렇게 미친 무당이 활약할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이 무대의 조연인 나는 때때로 무대를 벗어나 684를 회유하고, 「키요우타마히코」의 출몰 정보가 조건에 맞아 떨어질 때마다 보급품 조달을 핑계로 동쪽 먼 곳의 항구를 오가며, 무대의 그늘에서 작은 사냥을 끝마치기만 하면 된다.

시간활용 자체는 빡빡할지언정 심적으로는 많이 여유롭다. 로더필드와의 전투를 앞두고 있던 때에 비하면.

느릿느릿 남하하던 행렬은, 이링가 외곽으로부터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탈출 이후의 첫 번째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윽…….」

684가 짤막한 신음을 흘린다.

“많이 아픈가?”

내 물음에, 684는 안도감이 묻어나는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조금 찌릿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어. 고마워.」

“그렇다니 다행이다.”

답을 들은 나는 흉물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처치를 이어갔다.

이 밤, 684와 나의 접선장소는 평화유지군의 숙영지로부터 2백 킬로미터 이상 이격된 지점이었다. 공중정찰 및 항공수송 임무를 쉽게 받아낼 수 있는 만큼, 사전에 약속을 잡기만 하면 684와 접촉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게 몸을 맡긴 684에게선 어떤 경계의 색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편안하게 이완된 중추는 684가 나를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잘 되어가고 있군.’

나를 만나고 내게 몸을 맡길 때마다 고통이 사라지는 경험은, 684의 무의식에 나에 대한 의존과 호의를 새겨 넣기 좋은 도구였다.

이제 684의 절박함이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로 절박해지면 항암제 대신 개에게나 쓰는 구충제를 먹어보기도 하는 게 인간이지 않은가. 그날이 오면, 정신적인 여유를 잃은 684는 내가 제시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처치를 마무리 지은 나는 언제나처럼 684에게 식사를 권했다.

「항상 고마워. 이번에도 잘 먹을게.」

나와 내 애들이 제공하는 식사에 익숙해진 684는, 자연스러운 감사를 표한 후, 준비된 음식들을 차례차례 삼켜갔다. 서로 다른 음식들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한데 뒤섞여 뭉개지지 않게끔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1톤이 넘는 식량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

음식을 다 저장한 684는 두리번거리는 시선으로 빈 상자들을 훑어보았다. 무언가 자신이 빠트린 게 없나 하고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몸에 붙은 아기들의 코가 연신 움찔거리며 냄새를 더듬는다.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뭘 찾는 거지?”

「그, 저기, 전에 말했던, 음…….」

뜸을 들이던 684는 곧 커다란 머리를 가로로 느리게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흉물은 조금 풀이 죽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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