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시한부의 꿈 (4)
나와 684가 로더필드의 원정군을 끌어내는 동안, 원탁의 촉각을 밖으로 돌린 그레이스는 광대한 지역을 신출귀몰하게 누비고 다니며 점령지 안정화 작업에 힘썼다. 주술사 왕의 권능과 위엄으로 부족 및 지역 유지들과 기존 정부의 실무관료들을 무릎 꿇린 결과, 탄자니아 연방의 함락당한 수도에선 제정일치의 신정부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탄자니아 신성왕국」의 성립이었다.
「훌륭해. 정말로 잘해줬어, 웨인. 그 야만인을 죽이다니. 우리는 원탁 공략의 가장 큰 장벽을 넘은 거야. 나머지 마스터들은 당분간 꿈자리가 제법 사나울 테지.」
나와 그레이스의 통화는 로더필드가 죽고 나서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 이루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엔 짙은 승리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설령 연기라고 해도 진심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당연하게도 통화에선 684의 상태가 언급되었다.
「당신이 684의 수명연장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다고 들었어. 상태를 살펴보니 내가 손을 쓰긴 어렵겠던걸? 당신이 동맹으로서 보여주는 성의에 일단 감사를 표해둘게. 나를 위해 당신의 시간을 들여 줘서 고마워. 정말로.」
이건 내 예상에 비해 너무나 온건한 태도였다. 일말의 의심이 담긴 탐색과 신경전에 대비하고 있었건만. 미심쩍음을 거두지 못한 내가 684가 그렇게 된 데 유감이 없느냐 묻자, 그레이스는 가볍게 긍정했다.
「당연히 유감이 있지. 그 아이를 지금처럼 완성하는 데 들인 시간이 얼마인지 알아?」
「하지만…… 손실이 없는 전쟁이라는 게 어디에 있겠어. 원탁의 수호자를 치우는 데 들어간 지출이라고 생각하면 감내할 만하지. 딸은 또 생산하면 그만이고, 제2의 뱀을 제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으음? 아기공장을 세우려는 거냐고?」
「오, 웨인. 내가 일전에 필요하다면 아기공장을 돌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하긴 했지만, 나는 주술사 왕이야. 내가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지?」
「가르침 한 번만 내려도 자진해서 애를 낳아 바칠 추종자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레이스는 제 수화기에 작은 웃음을 흘려 넣었다.
「다만, 규격화된 질료(質料)와 생산기반을 갖추는 게 좀 번거롭긴 해. 알지? 좋은 정액과 잘 가공한 어머니들. 결전병기라는 건 최초의 충격효과를 제외하면 영 경제성이 떨어진단 말이야……. 대개의 전쟁에선 특별한 하나보다는 무난한 여럿이 더 위력을 발휘하잖아?」
요컨대 그레이스의 태도는 나에 대한 의심이 없다기보다, 「콜레로의 뱀」으로 볼 재미를 다 봤으니 그렇게까지 아쉽진 않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굳이 그 작은 아쉬움을 위해 나를 추궁하느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감으로써 동맹의 신뢰를 보여준 이력을 쌓아두겠다는 것이겠지. 상호간의 협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작용할 관계상의 부채를.
결전병기 운운하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전쟁은 점점 더 본격적인 전면전과 국가간 총력전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할 터이므로.
콜레로의 뱀을 제작하는 데엔 만 단위의 아기들이 재료로 들어간다. 그 아기들은, 최초 공정단계에서 설계를 변경할 경우 최소 한 개 사단 이상의 각성능력자 전투부대로 키워낼 수 있을 생물자원들이었다.
한낱 평화유지군 전투부대들조차 초기의 쇼크에서 벗어난 뒤엔 어떻게든 684를 잡을 궁리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나와 내 애들이 전훈을 제공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결국 답을 찾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핵이라도 쓸 생각을 했겠지.’
단 한 발. 단 한 발의 전술핵이면 684는 그냥 증발해버리고 만다.
지금이야 과거의 관성이 남아있어 핵을 쉽게 쓰지 않고 있지만, 684가 선사하는 공포와 피해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핵보유국들의 입장에서, 주술사 왕은 연쇄적인 핵 보복과 전면핵전쟁의 도미노를 걱정하지 않아도 무방한 상대인 것을.
반면에 한 개 사단의 각성능력자들은 소부대 분산 운용 시 수십 발의 핵으로도 전멸시킨다는 보장이 없는 표적이다. 핵 투발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 또한 급증하며,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발생하는 경우엔 더더욱 그러하다.
「당신이 보기엔 어때? 로더필드가 탈락한 지금, 제2의 뱀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이어진 그레이스의 질문은 나를 시험하고 가늠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뱀의 가치를 부정했다.
「흐음. 딱 예상한 대로의 대답이네.」
그레이스가 조금은 즐거운 듯한 비음을 흘리며 말한 ‘예상한 대로’는, 지난날 마녀와 직접 만났던 자리에서 내가 피로 이어진 자식을 만드는 데 강한 거부감을 내비쳤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게 뭉근한 불편함을 선사했다.
「뭐, 좋아.」
그레이스는 내 불편함을 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기왕 있는 684를 최대한 가치 있게 써야겠네. 적어도 다르에스살람을 함락할 때까지는 그 아이의 생명을 연장해주기를 바라. 바다에서는 전함, 땅에서는 괴물이 최후의 탈출구를 닫으려 드는 구도가 끝까지 유지되었으면 하거든. 그거야말로 내가 이 대륙을 무대로 연출한 거대한 극을 완전케 할 마지막 터치(Finishing touch/화룡점정)가 되어주겠지.」
여기에 부수적으로 딸려온 요청이 하나 있었으니, 해적제독의 전함이 다르에스살람 앞바다로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게끔 고래의 연쇄습격을 꾸며달라는 것이었다. 주술사 왕이 바다의 공포마저 소환할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면 더욱 좋다면서.
이에 나는 조건이 맞는다면 그리하겠노라 약속했다. 여기서 말하는 조건이란 「와다츠미 키요우타마히코」의 출몰 이력과 그에 따른 시공간적 적합성의 조성 가능 여부였다.
내가 이제껏 시도한 모든 고래 흉내는 항상 그 같은 적합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니.
물론 이번엔 그 고래와 다시 조우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지. 전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고래가 나를 적대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제로라고 확신할 순 없는 이상 미리 조심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대륙경영 구상을 언급하기도 했다.
「완전한 통일 국가 건설 따윈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해. 주술사 왕 아래에 동군연합(Personal union/둘 이상의 국가가 하나의 군주를 섬기는 연합체제)으로 묶여있는 다수의 국가. 딱 그 정도면 족하겠지. 군제와 장비, 그리고 보급과 동원체제만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아.」
기실 주술사 왕으로서의 그레이스는 이미 한참 전에 나라를 세우고도 남을 기반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술사 왕을 국가수반으로 삼는 정부가 이제야 처음으로 출범한 것은, 국가 운영을 위한 행정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일 터.
「탄자니아 신성왕국」은 기존 탄자니아 연방정부의 공무원 및 공직자들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주술사 왕을 대리해 국정을 운영할 총리 또한 기존 집권여당에 속한 추종자를 골라 임명해놓았다.
이 정도면 껍데기만 왕국이 되었을 뿐, 내부적으로는 그냥 좀 독특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봐도 좋을 지경.
그레이스는 다만 왕으로서 군사력을 독점했을 따름이었다. 탄자니아의 군사행정 시스템은 이제 온전히 왕의 군대를 위해 돌아가며, 항복한 연방군 부대들 역시 왕의 깃발 아래에서 새롭게 종군하게 되었다.
이는 주술사 왕의 세력권에 들어있는 여러 나라들-정확히는 그 나라들의 권력자들-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었다.
“순순히 숙이고 들어온다면 너희는 그리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라는 메시지를.
이미 그레이스의 추종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나라가 많으니, 조만간 여러 나라들-혹은 지방정부와 군벌들-이 동군연합으로의 합류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그들의 목에 칼이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주술사 왕으로서의 그레이스는 또한 「레헤마 페드하」라는 새로운 통화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레헤마는 은총을, 페드하는 화폐를 의미한다.
수화기 너머의 마녀는 무구한 소녀가 자랑을 늘어놓는 투로 이야기했다.
「기발하지 않아? 금본위제나 은본위제가 아닌, 대마법사의 마법이 가치를 보증하는 전대미문의 은총본위제란 말이야.」
줄여서 레페라 부르기로 한 이 화폐는 기존의 화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 왕이 내려주는 은총의 증거일 따름.
처음 이 레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경태는 이렇게 평가했다.
“어……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 교회들이 애들 노동력 착취하는 데 쓰는 달란트 같은 거네요? 근데 그걸로 바꿀 수 있는 상품이 뭐 닌텐도 같은 게임기가 아니라 불치병 치료나 탈모 치료, 노화 재생 같은 종교적인 기적인 거고요. 마녀 아줌마가 머리를 잘 굴리는데요?”
대마법사가 구사하는 「생명」은 기본적으로 영생까지는 불가능해도 장생까지는 가능케 하는 힘이다.
곧 죽을 나이의 부호들에게 이삼십 년 이상의 수명 연장은 얼마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
그레이스는 이 화폐를 왕의 전사들과 정부 고위공무원들에게 급료로 지급했으며, 탄자니아의 대부호들은 처음엔 총칼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전사와 각료들이 받은 레페를 달러나 탄자니아 실링, 기타 현물성 자산 등으로 매집했다. 아직은 실물도 없어서 회계상으로만 존재하는 새로운 화폐를.
그리고 그 대부호들은 주술사 왕이 베푸는 기적의 첫 번째 수혜자로 등극했다.
「아아, 이것은 기적이다! 이것은 기적이야! 주술사 왕이시여! 뱀의 영혼을 지닌 위대한 군주시여! 부디 영원토록 군림하여 주소서!」
육체적으로 한 세대의 세월을 거스른 부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행하는 간증(干證)은 국영방송의 주파수에 실려 탄자니아 전역, 그리고 이웃국가들의 접경지대까지 송출되었다.
검은 대륙 바깥의 소위 전문가라 하는 자들은 이 방송의 진위를 의심했다. 보나마나 닮은꼴의 젊은 대역을 구하여 연출한 시시한 거짓에 불과하리라고.
그러나 원래부터 주술에 대한 믿음이 강한 검은 대륙의 사정은 달랐다. 그렇잖아도 진심으로 왕을 숭배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던 차에, 광범위하게 송출된 주술사 왕의 기적은 화약더미에 던져진 불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법을 담보로 발행하는 화폐, 기적태환권 레페의 가치가 폭등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는 경태의 평가에 공감했다.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미친년이야.’
기적태환권, 은총본위제라는 발상 자체보다는 레페를 전사와 고위공무원들을 통해서만 풀기로 한 부분이 좋다. 국가경영의 효율성이야 어쨌든, 두 집단의 충성도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확보 가능하기 때문. 장차 이 대륙의 모든 주민들은 왕의 전사가 되기를 꿈꾸게 되겠지.
그레이스는 자신이 꿈꾸는 총력절멸전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착실한 걸음을 쌓아가는 중이었다. 원탁에 황금기의 눈이 없음을 알게 된 마녀의 대담한 행보.
원탁은 은총이라는 단어 선정이 자신들에 대한 노골적인 티배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현지에서 쓸 활동자금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레페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테니. 뭣하면 당신이 내 사도 흉내로 액면 가치를 집행해도 좋아. 내가 준 가면은 아직 가지고 있지?」
나는 눈을 찌푸렸다.
“돈은 됐고. 전에 말했던 위장용 간판들이나 빨리 만들도록 해라.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내가 일을 시작할 수가 없어.”
「아아, 그거. 걱정 마. 다르에스살람을 떨어뜨리기 전에는 모두 완료될 거야. 여덟 곳의 항구를 준비하는 중이니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에도 날 기쁘게 해주리라 믿어.」
용무를 마친 그레이스는 질 나쁜 희롱을 곁들여 작별을 고했다.
「당신과의 대화는 매번 즐겁네. 유익하기도 하고. 아쉽네. 시간만 충분하다면 남편과의 대화를 조금 더 즐길 수 있을 텐데.」
“또 그 농담인가?”
「후후. 지금은 장난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정말로 부부가 될지도 모르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 치워라.”
「글쎄, 과연 어떨까? 남녀관계에 절대라는 건 없어. 당신의 그 눈을 가려줄 수 있는 여자가 나 말고 또 있는 건 아니잖아?」
“…….”
「당신이 화내기 전에 끊어야겠네. 그럼, 오늘은 이만. 잘 지내.」
미친 마녀는 수화기에 입 맞추는 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