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27화 (327/561)

#36. 시한부의 꿈 (3)

원탁 원정군의 패주로 전투가 종지부를 찍었을 때, 내가 거둔 부수적인 성과는 숨이 붙어있는 포로 하나에 뇌가 온전한 시체가 둘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중에 마법사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뇌가 온전한 시체들의 상태를 「생명」으로 고정시키려다보니, 전투를 치르면서 확보 가능한 시체의 수량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숨이 붙어있는 포로는 본브릿지 가문의 방계 기사단에 속한 제4등위 장교기사였다.

원탁을 구성하는 가문들은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기사단」이나 「국왕의 빅토리아 기사단」의 직제를 모방한 가신 기사단을 최소 하나씩은 보유하고 있는데, 모방한 대상이 어느 쪽이든 제4등위는 명칭만 다를 뿐 고급장교의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말단인 5등위는 일반장교, 그 이하의 추종자들은 등위가 없는 평기사와 견습 기사 취급이다.

3등위인 사령관(Commander) 이상의 마법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확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 터.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미뤄두었던 684의 처치를 마저 진행했다. 고통을 인내하던 684는 처치가 진행될수록 안도의 신음을 흘렸다.

나는 다른 복제체들이 보는 앞에서 684에게 당부했다.

“이미 말했듯이, 그 몸의 수명을 늘리고 싶다면 최선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몸에 이상이 느껴진다면 바로바로 연락을 해라. 그때그때 시간을 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면 최대한 협조해주도록 하겠다.”

「……알겠어.」

“끼니는 절대로 거르지 마라. 너도 이미 알겠지만, 지금 네 육체는 예전이었다면 대수롭지 않았을 일시적 영양결핍조차 이상반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무리한 활동은 가급적 삼가고, 활동 전후엔 항상 충분한 휴식을 취해라.”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걸.」

“그레이스도 아마 허락할 거다. 「콜레로의 뱀」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력을 발휘하는 전략병기이지 않나. 사소한 전술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수명을 줄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

「전략병기……로구나.」

“그래. 전략병기. 로더필드의 원정군이 붕괴한 이상, 네 전투력이 필수불가결한 전장은 앞으로 얼마 없으리라 본다. 적어도 단기목표로 잡았던 지역을 다 평정할 때까지는.”

이렇게 684를 보낸 뒤엔 포로와 시체를 상대로 심문을 진행했다.

광신도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결박당한 장교기사는, 가면을 쓴 내가 방출하는 존재감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전율하면서도, 억지 미소를 물고 헉헉대며 지조를 지키려 애썼다.

“하늘에서 떨어진…… 아침의 아들아……. 시험하고 또…… 유혹하는 자야……. 너는 내게서…… 무엇 하나……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사람의 아들들께서…… 내려주신 진리의 은총을…… 나눠 받은 자다…….”

하늘에서 떨어진 아침의 아들, 그리고 시험하는 자와 유혹하는 자는 모두 사탄을 뜻하는 성서상의 은유들이다. 즉 눈앞의 기사는 사탄과 마주친 신실한 기독교도의 심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는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지만.

사람의 아들에서 이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진정한 인류, 황금기의 태양,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란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자들, 곧 원탁의 마스터들을 말했다.

나는 이 광신도의 눈앞에 전리품을 쥔 주먹을 내민 뒤, 손바닥이 위로 가게끔 돌리며 천천히 손을 펼쳐 보였다.

“큽…….”

기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남은 건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힘겹게 억누르는 비통한 낯짝. 꾹 다문 입술이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변조한 목소리로 던지는 물음에. 기사는 머리를 홱홱 흔들어댔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답하는 잇새로 어쩔 수 없는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내가 내민 전리품의 정체는 로더필드의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온 훈장이었다. 훈장의 중앙엔 대영제국 그 자체를 의인화한 여성 「브리타니아」의 모습이 순금 양각으로 들어가 있고, 붉은 테두리엔 「신과 제국을 위하여」라는 문장이 새겨져있었다.

본디 맨살에 바늘을 꿰어 고정시켜놓았던 것이기에, 훈장엔 여전히 로더필드의 피와 살점이 묻어있었다.

이 훈장은 로더필드가 1차 대전의 전공으로 수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같은 훈장이라도 전간기 말엽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은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나의 존재감, 그리고 그간의 정황과 더불어, 기사가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

“로더필드는 내 손에 죽었다.”

내가 도구적으로 차갑게 내뱉은 말에 기사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놈이 죽음을 앞두고 그러더군. 내가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거짓말이다!”

나는 기사의 외침을 듣고 시선을 기울였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죽는 자는 열등하고 죽이는 자는 우월하다」……. 이게 그 인간이 한평생 견지해온 신념임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

“아니면, 놈이 정작 본인이 살해당하게 되자 평생의 신념을 부정했다고 할 셈인가? 원탁내각의 대의원이 그토록 한심하고 나약한 존재였노라고?”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냐? 로더필드가 한심하고 나약한 존재였다는 것? 아니면 내가 로더필드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것? 너는 어느 쪽을 부정하고 싶은 거지?”

“그만. 제발 그만…….”

광신도의 사고방식을 일반인의 기준으로 헤아리려 들면 곤란하다. 원탁의 마스터들을 섬기는 자들은 특히 더 그러하고. 다행히 내 머릿속엔 스승새끼의 기억이 남아있었으므로, 위축된 광신도의 정신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제시한 양자택일은 어느 쪽을 고르든 신성모독이 된다. 그리고 극한상황에 처한 사람의 머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법.

나는 울며 흐느적거리는 기사의 머리털을 붙잡아 나와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똑바로 봐라! 시험하는 자이건 유혹하는 자이건, 나는 사람의 아들인 로더필드보다 우월한 자다. 그리고 너는 지금 내 손아귀 안에 있지. 이제부터 내가 네 영혼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해보도록. 앤드류 머레이.”

“……!”

내가 이름을 부르자 장교기사의 동공이 경악과 공포로 확대된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알 리가 없는 기사의 정보를 읊어댔다. 정보의 출처는 「소생」으로 되살린 두 구의 시체인형. 시체인형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살아있는 기사를 화상으로 보여주며 묻는 간단한 질문들에 대답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정보엔 주소와 가족관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핏줄에 대한 정은 인간의 원초적인 약점.

그러한 약점에 대한 물리적인 위협은 광신도를 크게 흔들기 어렵지만, 신성함의 근원을 위협하는 거대한 악이나 교리에 존재가 명시된 두려운 것으로부터 영적인 위협을 당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미 느끼고 있는 공포에 또 다른 공포와 절박함을 더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세를 잡은 나는 쉬지 않고 종교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틈을 주면 정보의 출처에 생각이 닿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의 영혼마저도 적그리스도의 손에 떨어지리라는 두려움. 나는 이 두려움으로 기사의 정신을 후벼 팠다.

“약속하지. 너는 내 안에서 너의 핏줄들과 재회하게 되리라고.”

“안 돼, 그러지 마!”

“로더필드가 나를 감당하지 못했듯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의 아들들 또한 내게서 네 소중한 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보호해줄 의지가 있는지부터가 의문이군. 그렇지 않으냐? 오래 전에 살해당한 자의 권속아.”

“윽, 우욱…….”

기사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시체인형들을 상대로 먼저 진행했던 1차 정보수집에서, 나는 단편적인 정보들만 가지고도 본브릿지 가(家)의 영락이 심대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왼쪽 눈의 사서였던 마스터 본브릿지가 오른쪽 눈의 사서였던 스승새끼에게 살해당한 이래, 가주를 잃은 가문은 다른 가문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가진 것들을 빼앗겨왔던 것이다.

빛과 진리의 원탁에 속한 가문들에게 있어서, 대마법사의 반열에 들어있는 가주는 승천의 약속 그 자체다. 그러므로 가주를 잃은 가문들의 처지는 언약을 잃어버린 백성들과도 같았다.

영락한 가문들의 생로는 오직 살아있는 사람의 아들들에게서 자비와 호의를 구하는 길 뿐.

이들이 껍데기에 불과한 자비와 호의라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원탁의 마스터들을 한데 묶는 비틀린 사명감과 완고한 선민의식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마스터들에게는 그래도 최소한의 동지의식이라는 게 존재한다.

나는 계속해서 기사를 조련해나갔다.

“나를 섬기고 내게서 구하라.”

“너를, 흑, 섬기라고?”

“그렇다. 어차피 달리 구할 구원이 없는 너로선 잃을 것도 없는 선택이지 않으냐?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친다면, 나는 네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리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당연히 머리로 알고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나는 간단한 사실들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모든 취조는 부하들과 시체인형들이 자리한 곳으로 중계되는 중이었다. 따라서 기사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말할 경우, 즉석에서 이루어진 교차검증 결과가 초소형 리시버를 통해 내 귓속으로 꽂히도록 되어있었다. 기사가 망설이거나 고뇌하며 우물거릴 땐 내 쪽에서 먼저 답을 입에 담으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대마법사에게 사로잡힌 자에겐 죽음조차도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압박을 가할 때마다 신체적인 고통도 함께 가하니, 마침내 마음이 무너진 기사는 내가 물음을 던지는 족족 엉엉 울면서 답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내가 자신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노라 믿게 된 기사는 복잡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끼지 않았다. 시체인형들로부터는 절대로 얻지 못할 수준의 정보들이었다.

“잘했다, 앤드류. 이제야 너의 마음에서 미혹이 사라졌구나.”

나는 기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나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자라 일컬었을지라도 나는 네게 한 약속을 지키리니. 그로써 너는 너의 선택이 올발랐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죽어서 찾는 안식도 안식은 안식이지 않은가. 뽑아낼 것을 다 뽑아낸 다음에는 깔끔하게 죽여 눈을 감게 해줘야지. 생존이 길어지고 정신적 여유가 돌아오면 ‘참회’를 해버리기 쉬운 게 광신도라는 족속들이니까.

심문은 앤드류 머레이를 가볍게 기절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멍한 표정의 시체인형들과 함께 있던 경태는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보였다.

“크. 감탄했습니다. 형님의 연기력은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해가네요. 형님께서 배우의 길을 걸으셨다면 전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

내게 사이비 교주 흉내는 유쾌한 짓이 못되었다. 그저 알맹이가 없는 흉내에 불과할지라도,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니까. 경태도 이를 알기에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해보려는 눈치였고.

기사 앤드류로부터 얻은 정보는 원탁에 대한 것들과 칠각기사단에 대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분명 내가 포로를 통해 제 세력의 정보를 얻을 가능성을 고려했을 터. 내가 대놓고 포로의 존재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의 딸들은 그에 대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상호간의 신뢰가 한층 더 진전되었다고 봐도 되겠지.’

로더필드의 죽음은 보다 본격적인 협력관계의 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칠각기사단이 포로의 공동 관리 및 심문 참관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내게 그만큼의 신뢰를 더 주겠다는 암묵적인 의사표현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684를 계획대로 잘 구슬릴 수만 있다면 조만간 더 질이 좋은 정보들이 손에 들어올 테지.

내 묵상이 길었는지 경태가 볼을 긁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684에 대해서.”

“아, 그 아가씨.”

어깨를 으쓱인 경태는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아가씨에게 밥을 가져다주다 보면 왠지 프린세스 메X커가 떠오르지 말입니다.”

“그게 뭐지?”

“홀아버지가 딸을 키워서 자기네 나라 왕자와 결혼시키는 게 목적인 고전 콤퓨-타 게임인데요, 거기 나오는 아버지가 딸이 아주 어릴 때부터 딸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울트라 개백수거든요.”

“…….”

“딸은 아버지가 자기를 술집 작부로 일하라고 보내거나 용이랑 싸우라고 시켜도 순순히 따르는데, 그러면서도 플레이어가 교묘한 통제를 유지하기만 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를 곱씹어보면 비로소 이 게임의 숨겨진 주제를 알 수 있죠. 「가스라이팅이 가장 쉽게 성립하는 인간관계가 바로 부모자식의 관계다.」라는 메시지를요.”

“……그러냐.”

“예. 684 아가씨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보면, 편모가정인데 어머니가 밥도 제대로 안 챙겨 주면서 험한 일만 시키는 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가씨는 어머니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는 거고요. 둘 사이엔 제법 비슷한 부분이 있죠.”

시작은 헛소리였으되 뒤로 가면서는 나름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그레이스에 대한 684의 의존을 조금씩 허물어보고자 하는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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