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25화 (325/561)

#36. 시한부의 꿈 (1)

로더필드가 자칭했던 대부분의 다른 칭호(Title)들과 마찬가지로, 「대영제국의 기수」는 사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명예였다. 전장에서 실제로 왕의 깃발(Royal Standard)을 들었던 옛 「잉글랜드 왕국의 기수」의 명예는 현재 「국왕의 대전사」가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승은 유서 깊은 귀족가문인 다이모크 가(家)의 오래된 세습적 권리다. 이 가문은 원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원탁의 창설자들에겐 혈통과 역사에서 기인하는 콤플렉스가 존재한다. 로더필드도 예외는 아니다. 로더필드가 역사를 더듬은 끝에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성립하기 이전의 명예를 발굴하여 스스로를 치장한 것은 그런 콤플렉스의 발현이라 보아야 할 터였다.

그러나 로더필드를 대놓고 비웃는 자는 없었다. 속으로는 야만인이니 뭐니 경멸해도, 로더필드가 원탁 제일의 투사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이는 마법적 경지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로더필드의 유해를 내려다보았다. 원탁 제일의 투사는 길쭉하고 앙상한 인간구이가 되어 누워있었다. 재료가 인간임을 제외하고 본다면 실력 나쁜 요리사가 안팎을 고르게 굽지 못한 두꺼운 고기와도 같은 꼴이었다.

‘역겹군.’

고소한 냄새에 식욕이 동한다는 사실이 매우 거북스러운 순간. 전투 중에 살을 씹고 피를 빨긴 했어도, 인육은 불사암 경단 이상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먹거리였다.

나는 욕지기를 내뱉고서 물을 지배하는 힘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렸다. 정제수로 목을 축이고 몸을 씻어내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신화상은 느린 속도로 아물었다. 재생이 진행되면 될수록 더욱 강한 허기가 밀려든다. 체내의 양분이 부족하다보니 마른 수건을 비틀어 물을 짜내는 느낌에 가까웠다.

구운 대마법사는 그냥 버리기 아까운 먹거리였다. 체중 55킬로그램의 성인 남성 한 사람은 동일한 체중의 성인 남성 25인이 반나절을 버틸 열량을 제공할 수 있다. 지금은 개인적인 기호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급한 대로 본디 내 일부였던 유기물 한 줌을 씹어 삼키고서, 나는 로더필드의 시체와 흩어진 부산물들을 염동력으로 회수해가며 684가 쓰러져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로더필드가 입고 있던 그리니치 갑주의 일부들은 괜찮은 전리품이 되어주었다. 특히 한 쌍의 건틀릿은 어떻게 고정만 시킨다면 아쉬운 대로 지금 당장 쓸 수 있을 법한 상태였다. 원탁이 투자한 대마법사의 인시를 강탈한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들었다.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기사단」의 2등위 훈장을 비롯한 금속 쪼가리들 역시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살아있나?”

알면서 던지는 질문에, 죽은 듯 쓰러져있던 684가 간신히 눈을 뜬다. 많은 코들을 움찔거리며 냄새로 나를 가늠하는 모습. 흉물을 이루는 아기들은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아기들처럼 피골이 상접해있었다. 모체의 영양 손실이 아기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먹어라.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로더필드의 배를 갈라 오물을 긁어낸 뒤, 나와 로더필드가 전장에 흘린 고기들을 모아서 속을 채운 대마법사 모둠구이는 지금의 684에겐 큰 도움이 될 고열량식이었다. 개인의 기호를 묻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지금은 기호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684가 거의 죽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로더필드를 죽였네.」

“그래. 네 역할이 컸다.”

「당신도 엉망진창이구나……. 그런데, 그걸 먹으라고? 보존처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뇌가 상해버렸다. 아무 가치도 없어.”

「그런가……. 그럼 먹는 걸 좀 도와줄 수 있겠어?」

“그러지.”

684의 마력회로는 최대출력으로 가동되고 있었으나, 그 결과로 발현되는 마법의 총합은 흉물스러운 육체의 붕괴를 지연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마력회로 자체에도 전에 없던 누수가 많이 생겼으며, 다형성 군체를 이루는 영육의 결합구조는 684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시간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내 호출을 받은 부하들이 추가로 식사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전투상황에서의 긴급추진은 내가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어도 684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식량을 가져온 부하들은 내 처참한 몰골을 보고 기겁을 했다.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나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경계태세를 취했을 정도였다.

“회장님. 그 모습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대충 손을 휘저은 나는, 에너지 팩을 뜯어 입안에 털어 넣는 한편으로 계속해서 684의 식사를 도우며 「콜레로의 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기공장의 산물을 강탈하여 거대 생체병기를 만들어낸 그레이스의 기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설계가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었고, 또 대영제국의 기수를 상대로 싸우며 입은 손실도 대단하여, 수많은 영육을 묶는 결합구조의 안정성이 큰 폭으로 저하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생체질량을 잃어버렸고, 그걸 재생해야 할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탓이 크다. 육의 그릇이 과도하게 줄어든 상태로 수천수만의 영혼을 담아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영적 군체의 어디선가는 빠지고 흐르는 조각들이 생기고 마는 것.

684의 뱃속으로 들어간 로더필드는 머리만 남긴 채 완전히 분해되었다. 머리는 아마 그레이스에게 가져다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마스터의 수급은 뇌가 상했어도 좋은 증거품이자 전리품이 되겠지.

단맛이 강한 열량과 양분을 대량으로 섭취하니 무겁고 나른한 졸음이 쏟아진다. 스스로에게 가벼운 전기고문을 가하여 정신을 차린 나는, 이어 684의 회복을 보조하며 말했다.

“684. 너 자신이 가장 잘 느끼고 있겠지만, 네가 들어가 있는 육체는 조만간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거다.”

「……당신의 능력으로도 고치기가 불가능해? 당신은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대가를 잡아먹었잖아.」

“한동안 활동이 가능한 수준까지는 어떻게든 손을 써볼 수 있겠지. 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들여 관리해도 앞으로 서너 달 정도가 한계일 것으로 보인다. 그 이상은 어려워.”

「시한부, 라는 말이네.」

“그래. 전에 네가 말했던 대로, 네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거다.”

아직 깊은 공허와도 같은 허기의 색채가 여전했음에도 불구하고, 684의 내장에선 분해와 소화 작용이 잠시 중단되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조금 전 입에 담은 ‘한동안’은 사실 연단위로 늘어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주기적으로 성심껏 연명치료를 해줄 경우, 684는 어쩌면 10년 뒤에도 흉물스러운 몸으로 살아있을지 모르는 일.

허나 나로선 그렇게 해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확신했다.

‘그레이스는 지금의 684를 절대로 고쳐주지 못한다.’

영혼을 다루는 그레이스의 마법은 「콜레로의 뱀」이라는 걸작을 완성할 만큼 수준이 높으나, 고치는 것은 때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684 스스로 응급수리를 거듭한 흉물스러운 뱀은 기술적 부채가 잔뜩 누적된 컴퓨터 프로그램과도 같았다. 프로그램을 이루는 코드들이 꼬일 대로 꼬여, 처음 만든 사람조차도 어디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막막할 상태가 된 것이다.

더욱이 그레이스에게는 황금기의 눈이 없다. 그런즉 내 기만 섞인 진단을 듣고도 황금기의 눈이 있으면 거기까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품을 테지.

684의 회복을 거들어주는 와중에, 나는 흉물의 결합구조에 문제가 생긴 부분들을 나만이 풀 수 있는 방식으로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어놓았다. 장래의 불안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684나 그레이스가 이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만 정교하게.

포성과 폭음의 메아리가 조금씩 가깝게 다가온다. 나는 684를 고통스러운 운신이 가능할 만큼만 손봐준 뒤 회복보조를 중지했다.

“싸움이 급하니 나머지 처치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너는 이대로 전장을 이탈하여 전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려라.”

둔하게 몸을 일으킨 684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렇게는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냐?”

「다른 자매들이 아직 싸우고 있는데 나 혼자서만 물러날 수는 없어.」

“설마 가족들이 걱정되는 건가?”

「…….」

684는 입을 다물었으되, 질문에 대한 답은 듣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다. 자식을 소모품으로 써먹는 어머니 아래, 유전적으로는 완벽하게 동일하지만 쓸모의 우열이 존재하는 자매들 사이에 평범한 가족애 따위가 존재할 리 있을까.

나는 그것을 모르는 흉내를 냈다.

“멍청한 소리 마라. 네가 자매들을 걱정하는 만큼 자매들도 너를 걱정하지 않겠나? 그레이스 역시 네가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있기를 바랄 거다.”

듣는 684 입장에선 실제와의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말들. 물론 그레이스는 684가 오래 살아있기를 바랄 것이나, 그것은 결코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하는 바람이 아닐 터였다.

머뭇거리던 684는 머리를 살짝 떨어뜨리며 보다 작아진 화음을 냈다.

「내가 몸을 아꼈다는 말이 나오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결국 전장에 투입된 자매들 중 적어도 일부는 나머지 자매들을 감시하는 독전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눈을 찌푸린 나는, 의식적인 짜증을 담아 힘주어 말했다.

“됐으니 내 말 들어. 네가 최선을 다했음은 내가 증언해 주겠다.”

684의 머리가 조금 더 낮게 기울어진다. 이 우울한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경태 이하의 부하들이 벌이는 교전에 가세할 채비를 갖추었다. 부서진 가면을 회수하여 탄소구조성형으로 이음새를 메우고, 그리니치 갑주에 딸린 건틀릿도 같은 방식으로 수선해서 착용하고, 제례검을 갈무리한 뒤 로더필드가 떨어뜨린 핼버드를 수중으로 불러들였다.

로더필드의 창엔 마법이 깃들어있었다. 창을 쥔 자의 염동력을 받아 창에 채워 넣을 뿐인 아주 단순한 마법이. 그러나 이 마법이 걸려있기에, 로더필드는 창을 684의 마력장 내부로 찔러 넣으면서도 창끝까지 불어넣은 염동강화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앞서 창을 하나 부러뜨렸으니, 684는 대체 얼마나 강한 힘으로 공격을 당했던 것인지.

높은 곳에서 허공을 밟고 전장을 내려다보니, 경태가 양측 진영의 소모를 효과적으로 유도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치고 들어가도 아쉬울 것은 없다. 684에게 해놓은 말도 있거니와, 그레이스는 내가 저의 아랫것들을 성실히 도와주었다는 보고를 받게 될 것이다. 로더필드를 처치하고 684의 응급처치를 실시한 시점에서 더 시간을 끌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부하들에게 내 진입경로를 통보했다.

쐐애애애애액-

모래바람 너머의 하늘 저편으로부터 여러 줄기의 비행운들이 고속으로 접근해온다. 내 부하들이 또다시 불러들인 유럽짱깨들의 전투기 편대였다.

이미 한 번 당한 경험이 있는 원탁의 전투단들, 그리고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칠각기사단의 악마숭배자들은 전투기 편대의 비행소음이 울려 퍼지자마자 대경하여 분산 엄폐를 실시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끝까지 총질을 해대는 모습들은 실로 살의와 악의가 충만한 것이었다.

재보급을 받고 다시 돌아온 다목적 전투기들은, 내 부하들이 세심하게 지정했을 좌표들을 향하여 먼젓번과 동일한 수량의 항공폭탄들을 투하했다.

단독행동을 일삼고 있다고는 하나, 이링가 및 모로고로 방어에 혈안이 되어있기로는 프랑스군 또한 다른 평화유지군 구성군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달리 쓸 곳이 넘쳐나는 항공 전력을 이쪽 지역에 할당하고, 높은 출격비용을 감수하면서 헌터들의 일당보다 많이 비싼 항공폭탄들을 아낌없이 뿌려대는 이유였다.

콰쾅! 콰르르르릉!

한 발 한 발이 깊고 넓은 크레이터를 남기는 강력한 폭발들. 나는 높이 치솟은 토사들이 가라앉기도 전에 기습적인 돌입을 감행했다.

전장은 내가 돌입하는 순간 무형의 충격파를 얻어맞은 것처럼 반응했다.

원탁의 원정군과 칠각기사단 중 동요가 큰 쪽은 아무래도 후자였다. 로더필드의 전투력이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박힌 탓이겠지.

유인전술의 상세를 알고 있을 그레이스 복제체들도 일제히 표정이 굳는 게 보인다. 전장에 진입하는 거대한 마력장이 둘이 아닌 하나라면, 그 마력장의 주인은 아무래도 로더필드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각성능력자와 마법사들로 구성된 집단들의 싸움에서, 대마법사는 전장의 일부 내지 전체를 광범위하게 제압하는 전략병기로 기능한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은 대마법사 하나가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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