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대영제국의 기수 (6)
폭격의 정밀도는 높은 편이 못되었다. 로더필드와 싸우느라 온 정신을 다 쏟는 중인 내겐 다른 적을 관측하여 좌표를 불러줄 여유가 없었으니까.
부하들의 폭격유도는 전장 곳곳에 박아놓은 음향탐지장치들에 힘입은 것이었다. 내가 교전을 개시하기 전까지 중계해준 제국주의자들의 위치정보를 기초로 삼아,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음향정보를 더하여 주요 타겟들의 이동 현황을 파악한 것.
두 세력의 전투가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예비전장에서, 방차통을 멘 부하들이 모래바람을 뚫고 발로 뛰어 신속하게 전개해놓은 탐지장치들. 이 장치들은 음향의 방향과 특성을 분석하여 서로 다른 음원들을 식별하고, 삼각측량을 통해 거리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좌표를 산출한다. 동시 추적 가능한 음원의 수는 탐지장치 하나당 최대 20개까지였다.
따라서 정밀도의 저하는 필연적인 결과였으되,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너무 정확하게 때려버리면 악마숭배자들의 손실이 과도하게 줄어버릴 테니까.
최초의 폭탄이 작렬하는 순간, 전장은 이제까지 없었던 규모의 폭발과 진동을 맞이했다.
「-!」
눈을 홉뜬 로더필드가 언어가 되기 이전의 파동을 방출한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가까스로 참아내는 모습. 지금 가해지는 공습은 양차대전 참전용사인 로더필드에게 날카로운 플래시백을 유발하는 것일 터였다.
「폭격이라니! 이 무슨 수작을!」
대기를 흔들어 빚는 발성엔 분노가 다 가리지 못한 당혹감이 묻어난다. 설마하니 악마숭배자들과 싸우면서 본격적인 공습을 맞을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나는 로더필드의 사나운 공세를 비껴내며 내가 연출한 파괴와 무질서의 향연을 만끽했다.
프랑스 공군은 내 애들이 꾸며낸 왕의 군대의 허상을 때리는 중이다. 껍데기만 평화유지군일 뿐 단독행동을 일삼는 유럽 짱깨들의 배타성은 보안을 유지하며 이용해먹기 좋은 팻감이었다.
공군은 언제나 옳다. 내가 오폭을 맞을 염려만 없다면.
동시다발적인 열여섯 번의 폭발은 싸움터를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았다. 폭심직경만 10미터, 위험반경(살상률 10%)은 250미터에 달하는 폭탄들은 전장에 깃들어있던 질서를 송두리째 뽑아 불태워버렸다.
그리하여 원탁의 전투단과 칠각기사단의 싸움은 완연한 혼전으로 빠져들었다. 내 부하들이 외곽에서 치고 빠지며 아웃복싱을 벌이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뜻. 칠각기사단과는 어차피 이 이상의 협력이 불가능하다.
나는 새롭게 디딘 자리 인근의 지표 아래로부터 새로운 무기들을 사출시켰다.
파르르르륵-! 오염을 막기 위해 씌워두었던 방수포들을 불태워버리자 2중 총열 20밀리 기관포 한 쌍과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 한 쌍, 다수의 산탄 지뢰와 다양한 폭발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날개처럼 펼쳐지는 열병기들을 본 로더필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열등한 것이 쥐새끼처럼 묻어둔 게 많기도 하구나!」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로더필드의 진동발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였다. 소리의 방향과 거리를 자신의 실제 위치와 불일치시킴으로써 상대의 감각을 교란하는 방편인 것이다.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나조차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움찔할 때가 잦았다.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지러운 것이었다.
‘멀미가 날 것 같군.’
비단 전투함성만이 아니다. 로더필드는 저가 장악한 범위 내의 환경소음을 적극적으로 왜곡했으며,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소리들을 자아내기도 했다. 거리와 방향과 강도를 현란하게 달리하는 청각적 교란은, 대마법사의 입체기동과 상승효과를 이루어 중거리 이내의 교전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위력을 발휘했다.
때론 종이 한 장 차이로도 생사가 갈리곤 하는 게 전장이다. 나는 로더필드가 솜(Somme)의 참호들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와 684의 마력장에 가려진 사각지대로 대담하게 밀고 들어오는 자신감은 그 뿌리가 실력에 있는 것이었다. 나와 684를 방패막이 삼는 현란한 기동으로 내 부하들의 지원사격을 억제하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나는 때때로 지향성 음파공격을 퍼부었으나, 퍼붓는 족족 염동방어에 중화되어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키이이이잇-!」
내가 로더필드를 상대하는 사이, 타격을 입고 싸움에서 잠시 벗어나있던 684가 돌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공격을 받은 게 아니다. 684는 자신의 내장 일부를 갈아 지방과 영양을 추출해내고 있었다. 흉물의 내장에서 1차 소화를 맡는 아기들은 다른 부위의 아기들보다 체지방률이 높은 편이었고, 그런 아기들의 육체를 「생명」으로 분해하여 기름은 뽑아내고 나머지는 다른 아기들에게 먹여 영양으로 흡수하는 과정.
미리 저장한 열량을 다 소모해버린 684가 다급하게 자기 자신을 소화시키는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었으나, 당장 섭취할 외부열량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당장의 전투에 불필요한 부분부터 덜어내는 수밖에.
기름을 추출하는 데엔 「생명」을 넘어서 「염동」을 활용한 압착과 마법적 원심분리까지 동원되었다. 뱃속에서 이루어지기에 밖에서는 관측이 불가능한 은밀한 작업. 아기들의 기름을 대체 왜 따로 뽑아내는가 싶었는데-
「이놈-!」
자신에게 몸으로 짓쳐들어오는 684를 보고 창대를 휘돌리며 맞부딪히려던 로더필드는, 684와의 간합이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순간, 쩍 벌어진 흉물의 입으로부터 고압으로 분사되는 유성(油性)의 불길을 뒤집어썼다.
흉물의 내장에서부터 식도를 거쳐 구강에 이르는 기다란 경로엔 염동력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가압(加壓) 터널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터널을 타고 맹렬한 흐름을 이룬 기름은 「발화」로 불이 붙어 화룡의 숨결처럼 분출되었다. 엇나갈 땐 직선으로 백 미터 이상을 뻗어나갈 만큼 압력이 높은 화염이었다.
마력을 태우는 불은 대마법사의 역장을 범접치 못하나, 기름을 태우는 불은 그렇지가 않다. 684가 떠올린 변칙적인 임기응변. 전투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떠올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크아아아악!”
불붙은 아기기름을 뒤집어쓴 로더필드가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지른다. 이번 싸움에서 두 번째로 듣는 육성이었다. 회로에 이미 「염동」을 돌리고 있던 로더필드는 기습적인 화염방사에 미처 「발화억제」를 발현할 틈이 없었다.
내가 대함미사일을 연속으로 방어할 때도 술식을 완성할 단 몇 초가 아쉬웠었지.
그리니치 갑주의 복합장갑재는 일부 기갑차량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세라믹 플레이트가 삽입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단열처리가 되어있다는 말. 그러나 내가 지금껏 누적시킨 손상들은 전류만이 아니라 열기에 취약한 구멍들이기도 했다.
파앙-! 파파팡-!
호흡을 멈춘 로더필드의 전신으로부터 타오르는 불의 아우라가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시간을 들여 새롭게 발화억제를 장전하는 대신, 이미 돌리고 있던 염동을 충격파로 발산하여 불과 기름을 떨쳐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여기에 불균형하게 발산하는 충격파를 동력으로 삼아 회피기동을 실시하는 건 덤이었다.
지난날의 쁘리즈라크처럼 신체에 누적되는 피해를 감수하면서 감행하는 고속기동.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기엔 소름이 돋을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갑주가 자동으로 자아내는 와류가 더해진 결과, 로더필드는 타오르는 아지랑이와 소용돌이를 두른 채 발도 딛지 않고 날아다니는 불의 화신 같은 모습이 되었다. 쏟아지는 불이 잠깐의 공격으로 그쳤다면 로더필드의 대응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것이었겠지.
그러나 수백의 아기들로부터 뽑아낸 인간기름이 한순간의 방사로 끝장나진 않았다.
「으앙아앙앙아앙-」
흉물을 이루는 아기들의 고통스러운 합창이 고원의 끝자락까지 메아리친다.
로더필드가 변화막측한 회피기동을 실시하자, 684는 제 몸통에 불이 붙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악착같이 따라붙어 뜨거운 숨결을 퍼부어댔다. 흉물이 기어 지나는 자리마다 타오르는 불의 융단이 깔리고, 아기들이 우는 소리는 갈수록 더 커다랗게 변해갔다.
여기에 내가 가하는 압력이 더해진다. 로더필드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난 나는, 여분의 힘을 즉각 기동력 강화에 쏟아 넣어 상대속도의 우위를 점했다. 충격파를 발산하는 동안의 로더필드는 장기로 삼는 염동감지가 대폭 축소된 상태였으므로, 화염 속으로 처박아버리려는 내 견제를 늦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쉬르르르르-!
내 마크로 말미암아 축소된 로더필드의 기동범위는 원뿔형으로 넓게 펼쳐지는 화염에 통째로 삼켜졌다. 로더필드의 방향감각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보인다.
거의 20여 초에 달하는 끈질긴 화염방사는 결국 로더필드의 실수를 이끌어냈다. 무호흡 연속운동의 어느 시점에서 반 호흡의 숨을 들이쉬고 만 것이다. 비강부터 폐부까지 확 익어버리는 작열감은 강철과도 같던 로더필드를 흔들어놓았다.
바로 그 빈틈에, 684는 자신의 흉물스러운 육체로 대영제국의 기수를 휘감았다.
「끼이이이이-!」
한껏 달아올라있던 그리니치 갑주의 바깥 면은 조여드는 흉물의 몸통을 인두처럼 지져댔다. 684의 비명과 아기들의 울음이 끔찍한 화음을 이룬다. 그러나 684는 화상을 참아내며 더욱 강한 힘으로 몸통을 조여 갔다. 흉물스러운 뱀의 실타래 같은 감싸기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어 보였다.
흉물의 마력장과 마소장악력은 대마법사를 능가한다. 그런 몸으로 빈틈없이 대마법사를 감아버리면, 그 안에 낀 대마법사는 외부의 마소를 빨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회로운용능력의 차이가 현저한 만큼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지라도, 상호간 힘의 우열이 확고하게 갈리는 것이다.
빠득, 빠뜨드득, 끼긱-!
비인간적으로 두꺼운 갑주가 금속성의 마찰음을 내며 비틀리기 시작한다. 주요 방호부위들의 견고함과는 별개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연결 부위들이 변형되거나 파손되고 있는 것이었다. 투구에 달린 방독필터도 순식간에 으스러진다. 마소 유입은 물론이고 호흡까지 막아버리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로더필드는 몸이 비틀리고 뚜둑뚜둑 관절이 꺾이는 와중에도 두 눈을 형형하게 뜬 채 무호흡으로 고통을 인내하고 있었다.
일체의 마법 사용을 중단하여 남은 마력을 보존하고, 적게나마 들어오는 마소를 마력으로 전환하여 차곡차곡 축적하는 냉정한 광기. 축적한 힘을 한 번에 터트려 뱀을 찢어발기려는 맹수와, 그 전에 끝을 보고자 하는 흉물의 대결.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내겐 어느 쪽이 먼저일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독하게 악취미스러운 갑주만 아니었던들 684의 승산이 높았겠으나, 쓸데없이 질이 좋은 갑주가 시간을 벌어주는 이상 로더필드의 승산이 더 우세하다. 로더필드는 혈중산소포화도의 색채에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지향성 음파로 외쳤다.
「684! 틈을 열어라!」
「안 돼! 이대로 끝장을 내야 해!」
「멍청한! 내가 찌르고 들어갈 틈을 열란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684는 고통과 공포와 적의와 전투흥분에 이성이 완전히 잠식당한 상태로 보였다. 내 말을 듣고도 더욱 더 몸에 힘을 가할 따름이다.
입가에서 질질 흐르는 침을 보건대 극도로 심해진 허기 또한 판단력 저하의 한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수천 개의 위장이 허기에 경련을 일으키는 게 보인다. 뱃속의 아기들이 울고 소리 지르며 손을 뻗는 아우성들을 쳐대고 있다. 먹을 것을 달라고. 먹을 것을 달라고.
그 모든 굶주림들이 집중되는 684의 뇌는 과연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을는지.
나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차라리 여기서 죽어 없어지는 편이 낫나?’
본래는 684를 살살 달래어 그레이스 진영 내의 우호적인 인사로 포섭할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죽어 없어져도 딱히 손해를 보진 않을 것 같았다. 칠각기사단과 내 조직의 세력 균형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이익일 가능성이 있겠고.
싸움이 여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684의 전력이 크게 아쉬운 것도 아니다. 사실 효율만 생각한다면 칠각기사단이 싸우는 곳으로 보내주는 편이 더 이익이겠지. 다만 그들을 소모시키기 위해 그리하지 않을 뿐. 684만한 덩치가 이탈하면 로더필드가 이용할 사각지대도 축소된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내게 더욱 무거운 짜증을 선사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걸 궁구하기엔 목전에 닥친 상황이 여유롭지 못했다.
로더필드가 길게 축적한 힘을 폭사시켰다.
「-!」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을 이루었다. 흉물의 가죽이 폭탄 터지듯 파열하는 소리. 그레이스의 비명. 아기들의 울음. 전력을 쏟아내는 로더필드의 염동파장과 그 파장이 간접적으로 낳은 메아리에 이르기까지.
로더필드는 흉물의 몸을 터트리고 커다란 내장 속으로 돌입했다. 본래대로라면 마력을 잔뜩 소모한 채 강대하고 적대적인 마력장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 터. 684는 자신의 내장 속으로도 마법 술식을 투사할 수 있다.
그러나 684가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흉물의 약점을 간파한 로더필드는 남은 힘을 모아 벼락을 실은 창을 내질렀다. 전류가 창대를 타고 흘러들어가니 684가 다시금 고통으로 몸을 비틀어댔다.
「끼아아아아악-!」
로더필드가 찾아낸 약점이란 684가 일찍이 소화시킨 자신의 일부였다. 흉물의 육체와 감각과 마력장이 가장 치명적으로 약화되어있는 지점. 배타적인 마력장의 내부로 들어가 곧바로 약점을 포착하다니. 실로 원탁의 수호자를 자처할 만한 직관과 역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684를 겨냥한 ‘진내사격’을 감행했다.
로더필드는 684의 배를 찢고 나오는 순간 내가 쏟아낸 집중포화를 두들겨 맞았다. 684가 곁가지로 얻어맞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가둬놓을 수만 있다면 로더필드는 결국 무력화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극단적인 수를 썼음에도, 로더필드는 기어이 흉물의 뱃속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684가 몸부림치는 힘을 짐승 같은 감각으로 이용하여,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투포환처럼 밖으로 사출시킨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684의 내장을 찢어발겼음은 물론이다.
‘미친.’
전투감각 하나는 정말 짐승 같은 야만인이었다.
나는 로더필드에게 화력을 적중시키려 애썼으나, 염동력을 되찾아 입체기동으로 날아다니는 이동표적을 명중시키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솜씨가 형편없구나!」
잔뜩 상기된 로더필드는 엉망진창인 몰골을 하고서도 허공을 박차고 방향을 꺾어대며 나를 조롱했다.
염동력을 이용한 총화기 사격은 정조준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너무 컸다. 레이저 조준장치나 적외선 예광탄의 보조를 받아도, 총화기의 숫자를 늘리면 늘릴수록 정교한 제어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내 염동은 분명 대마법사들의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일 터. 그럼에도 염동의 거장이 보기엔 형편없는 솜씨겠지.
철컥. 격철이 빈 약실을 때리는 소리가 여러 차례 겹쳐진다. 자동화기가 탄창을 비우는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나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보유하고 있던 화력 전부를 소진했다. 여분의 탄창과 여분의 폭발물들을.
새로운 화력을 얻기 위해선 새로운 예비지점으로 물러나야 한다.
「크흐- 다 쐈나? 다 쐈어?」
뚜둑, 뚝. 조롱을 이어가듯 멈춰선 로더필드가 부상당한 육체를 고속으로 치유한다. 비축한 열량과 영양이 바닥나 「생명」이 근골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처음의 육체가 원체 우락부락했으므로 생체질량의 손실은 아직 위험한 수준이 아니었다.
연결부위 파손으로 인해, 그리고 내 진내사격으로 인해, 그리니치 갑주는 상반신이 거의 다 떨어져나가다시피 했다. 한쪽 견갑과 양쪽 완갑이 수갑(手甲)과 더불어 남아있을 따름.
바깥바람을 맞게 된 로더필드의 가슴팍에선 온갖 종류의 훈장들이 탁한 빛을 발했다. 맨살에 바늘을 꿰어 고정시킨 양차대전의 명예들이었다.
그 가슴을 헐떡이는 호흡으로 부풀리며, 공중으로 떠오른 로더필드는 교향악에 도취된 지휘자처럼 두 팔을 펼쳤다. ‘내가 네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제 어찌하겠느냐?’라는 여유가 느껴진다.
「나는 우월하다.」
조금 전 684가 그러했던 것처럼, 치열한 전투 중 의식이 매몰되는 건 때론 전쟁영웅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도의 전투흥분은 가장 영민하고 노련한 사람도 순간적으로 넋을 놓거나 멍청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 더욱이 골 안에 아직 산소부족의 여파가 남아있는 상태임에야.
전쟁은 잘 싸우는 자가 아니라 삽질을 덜 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로더필드의 가슴팍에,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기사단(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의 제2등위 훈장 위에 비가시영역의 레이저 광점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