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21화 (321/561)

#35. 대영제국의 기수 (4)

불씨를 기다리는 건조한 들판과도 같았던 전장에서, 원탁의 원정군과 악마숭배자들의 첨단이 처음으로 맞부딪힌 것은 7월 2일 오전 열한 시 경의 일이었다.

거친 모래바람 사이로 마른번개의 메아리가 울려오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벌어지던 탐색과 소규모 교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거대한 정면대결로 비화했다. 그 격렬한 확산은 마치 바람을 타고 번지는 사나운 불길을 보는 듯했다.

원탁의 원정군은 다분히 귀족적인 모습으로 출현했다. 나는 원정군의 진형과 움직임을 보고 다소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미친놈들이 전쟁이 아니라 사냥을 하고 있군.’

혐오스러운 섬나라에서의 사냥은 귀족사회의 문화이며, 사냥을 총괄하는 헌트 마스터(Hunt master)의 지휘 아래 각각의 참여자들이 역할을 배분받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의 배분은 군대의 전술이라기보다는 귀족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예법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고전적인 예법의 틀에 현대화된 장비와 소부대 전술들을 욱여넣으면 지금 내가 보는 광경으로 정확하게 수렴할 것이다. 그러니 미친놈들 소리가 나올 수밖에.

다수의 사냥단(Hound Pack)들을 총괄 지휘하는 자는 당연히 마스터 로더필드였다. 아쉽다고 해야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원탁 제일의 육체파 교조주의자는 전신을 보호하는 판금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흐릿한 태양 아래에서도 빛을 발하는 갑주는 근래 헌터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왕립 조병창(Royal Armoury)」의 작품이었다. 영국이 마법의 시대를 맞이하여 장삿속으로 부활시킨 옛 조병창의 화려한 역사는, 허영에 찬 헌터들로 하여금 실용적 가치 이상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도록 만드는 명품의 구성요소였다.

내가 제조원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공능법인 개마 앞으로도 구매자격 증명서 및 카탈로그를 동봉한 서신이 날아온 적이 있었던 덕분이다.

서신의 첫 문장은 나쁜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신의 은총 아래,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 아일랜드 연합왕국 및 왕국에 속한 다른 영토들의 여왕이자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의 승인을 받아, 귀사의 가장 명예로운 헌터들 31인에게 본 조병창의 가장 우수한 제품들을 보유할 자격이 있음을 알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멕스 센추리온 같은 하이엔드 신용카드들이 고객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심사 기준으로 고려하듯이, 왕립 조병창은 자신들의 플래그십 브랜드인 「그리니치」에 같은 방식의 프리미엄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의 확실한 우방국 국민이면서 도덕적 흠결이 없고 사회적으로 공헌한 바가 큰 헌터들만이 구매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

이런 판촉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파는 것은 불황 극복에 힘을 보태려는 왕실의 노력일까, 아니면 비밀계좌에 쌓이는 검은 돈을 위함일까.

서신의 내용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나는 카탈로그에 수록된 갑주의 사양을 꼼꼼하게 분석해두었다. 장차 원탁의 하수인들이 착용할지도 모르는 방어구라고 생각했으므로. 각성능력자 전용으로 만들어지는 방어구들은 착용자의 강화계수에 따라 기갑차량을 능가하는 방어력을 지닐 수도 있다.

설마하니 대마법사가 입고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대마법사를 위해 제작된 두꺼운 갑주엔 「그리니치」를 주문할 때 선택 가능한 옵션들 다수가 골고루 들어가 있었다. 개중에 가장 악취미적인 것은 성기를 수납하여 보호하는 코드피스(Codpiece). 사타구니로부터 크게 치솟아 배꼽 높이까지 구부러지는 굵은 코드피스는 섬나라 전통양식으로 금박을 입혀 쓸데없는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을 과시했다.

「캐애애애애액-!」

684가 지르는 전투의 함성은 혼자서도 이미 지옥에서 올라온 군대의 그것이었다. 수천 개의 입이 동시에 침을 튀기니, 그 성량만으로 파문이 일어 모래바람이 출렁 물결친다.

너무 노골적인 유인은 실패하게 되어있다. 자연스러운 정황을 만들기 위해, 684는 일단 대마법사와 정면으로 맞붙는 쪽을 택했다. 원탁 제일의 호전광이 전투흥분에 취해 사리분별이 흐려질 때까지 피를 흘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금은의 광채를 흘리는 대영제국의 기수가 달려든다.

“영-원할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로더필드가 선호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폭력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찢고 부수고 토막을 쳐서 죽이는 싸움. 그렇기에 대영제국의 기수는 냉병기로 무장했다. 기다란 창대에 도끼와 창날과 해머와 갈고리가 모두 달려있는 기형적인 할버드로.

기실, 마법이 돌아온 지금 이런 냉병기라도 쓴다는 것 자체가 육체파 교조주의자에겐 굉장한 현실타협이다. 「정수」가 보여준 바, 황금기의 인류는 그 자신의 힘 이외에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저 인간이 옛날부터 설파하고 다닌 믿음 속에서, 대마법사가 자신의 마법과 육체 이외의 도구에 의지함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일이다. 무기도, 방어구도, 아직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지 못했기에 감수해야 하는 수치인 것이다.

스승새끼가 로더필드를 두고 공연히 멍청한 야만인이라 경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야만인이 전장에서 발휘하는 힘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콰앙-!

684의 몸통에서 다섯 번의 핏빛 폭발이 터져 나왔다. 격돌이 이루어지는 찰나, 마력회로가 자아내는 모든 염동력을 거두어 일신에 압축시킨 로더필드는 684의 방어를 간단히 뚫고 초월적인 연쇄공격을 때려 박았다.

「으애애애앵-!」

망치로 후려치고 갈고리로 뜯어내는 자리마다 앙앙 울며 떨어져 나오는 덩어리진 아기들. 그렇게 뭉텅뭉텅 팽개쳐진 아기들은 오래지 않아 생명활동이 정지된다. 684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뒤따라 울려 퍼졌다.

직후 들어오는 경태의 보고.

「형님. 전투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대기해.”

우리의 차례는 아직이다. 로더필드를 그의 군세와 분리시키는 건 전적으로 칠각기사단이 맡기로 한 역할이니. 그로써 원탁의 군세마저 흐트러지면 그때 비로소 들어가 충격을 가하는 것이 그레이스와 나 사이의 합의였다.

비효율적이면서 낭비가 많은 방식이긴 하다. 그러나 서로를 경계하는 고슴도치들의 합의 치고 이 정도면 제법 양호한 수준이라 해야 할 터였다.

나는 전장진입을 앞둔 예비대 지휘관으로서 684가 벌이는 악전고투에 집중했다. 뱀을 닮은 흉물과 대영제국의 기수가 벌이는 대결은, 겉보기만으로는 날개 없는 마룡과 성 게오르기우스의 싸움처럼 보이는 구도였다.

배에서 아릿한 감각이 올라온다. 마치 내장이 동일한 형태의 열과 통증으로 치환된 듯한 느낌이었다. 인형술사를 상대할 때보다, 흉물과 처음 조우했을 때보다 한층 더 강도가 높은 긴장감. 나는 대영제국의 기수가 선보이는 경이로운 움직임들을 낱낱이 눈에 새겼다.

‘……「염동」을 다루는 기량 하나만큼은 정말 차원이 다르군.’

염동력을 신체에 부여하는 염동체술은 대마법사가 구사하기에도 난도가 있는 응용기다. 육체의 움직임과 염동력의 작용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면 그 즉시 내상으로 이어지는 까닭. 육체에 덧씌우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내상의 치명성도 함께 증가한다. 자칫하면 근육파열이고, 아차하면 다발성 장기부전이다.

그래서 자연각성능력자들의 염동체술은 정해진 동작과 고정된 투로(套路)를 숙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특정한 움직임에 한해서는 염동력을 정확하게 일치시킬 수 있도록 연습을 거듭하는 것이다. 느리게 시작하여 점점 더 속도를 붙여가는 식으로. 염동력을 얻은 중국의 엽사들이 내기의 운용 운운하며 초식(招式)이니 절초(絕招)니 꼴값들을 떨어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수연 녀석이 연습을 할 때에도 내가 얼마나 자주 치료를 해줘야만 했는지.

이 같은 염동체술을, 로더필드는 숨 쉬는 듯한 자연스러움으로 제 육체의 모든 움직임에 적용하고 있었다.

더 대단한 것은 로더필드가 자신의 마법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

마소장악력이 대마법사 이상인 흉물을 상대로 육탄전을 치르면서, 피아의 마력장이 격렬하게 부대끼는 와중에, 매순간마다 불안정하게 출력이 요동치는 염동력을 몸에 채우고도 내상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염동력과 하나가 된 경지라 하겠다. 나라면 염동의 회로점유율을 제한하여 출력을 균일하게 유지해야 했을 텐데.

솔직히 초조한 심정이 들 정도다.

전투양상을 관망하던 경태가 근심을 담아 물어온다.

「어우, 684 아가씨가 너무 처참하게 얻어맞는데요? 유인이 성공할 때까지 버틸 수나 있겠습니까? 어찌 끌어낸다 해도 전력에서 이탈해버리면-」

나는 경태의 말을 잘랐다.

“걱정 마라. 재생력이 충분히 받쳐주고 있으니.”

로더필드와 684의 싸움이 그리는 구불구불한 동선은 크고 작은 핏빛 덩어리들이 융단처럼 깔린 혐오스러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렇듯 싸움이 계속되는 내내 생체질량을 잃어버리고만 있는 684였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견디고 있는 것은 「생명」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고, 또 나와 싸울 때와는 달리 조립식 영혼들의 결합구조를 직접적으로 파괴당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조로 결속된 아기들의 영혼은, 본래의 육체가 부서져 떨어져나가더라도, 새로운 육체가 재생될 때까지 다른 아기들의 몸에 함께 깃들어있기가 가능했다. 떨어진 생체기계 조각들은 영혼 없이 작동하다가 생명활동이 정지되는 것이고.

재생이 너무 늦어지면 문제가 생기겠지. 육체의 너무 많은 부분을 잃어버려도 수용한계에 도달한 영혼의 결합구조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684는 전장에 진입하기 전 많은 예비열량을 뱃속에 채워둔 상태였다.

마력회로의 출력 하나만큼은 대마법사를 능가하는 생체병기가 「콜레로의 뱀」이지 않은가. 열역학 법칙을 능욕하는 수준의 재생효율을 뽑아내고 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모가 다소 빠르긴 하군.’

뱃속의 예비열량은 전투 시작 시에 비해 벌써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아기들의 소화기관이 재생을 뒷받침하는 속도로 열량과 영양을 흡수한다.

흉물의 「생명」은 출력은 높으나 정교함은 떨어졌다. 그 탓에, 반복적으로 재생된 몸 곳곳에선 온갖 괴기스러운 형태의 기형종(畸形腫)들이 돋아났다.

경태가 다시 근심을 말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 쪽이지 말입니다. 겉보기가 저래서 그렇지, 실상 알맹이는 원래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몸을 꾸준히 박살내면서 버티는 싸움은 고문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요.」

“흠…….”

경태의 말은 내가 조금 간과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정교함에 한계가 있는 「생명」으로는 신경을 차단하기도 까다로울 것이며, 그 까다로운 일은 증가하는 기형종들로 말미암아 더욱 까다로운 일로 변모할 터. 기형종 자체도 새로운 고통의 근원이 된다.

고로 684가 느끼는 고통의 최댓값은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하하하하! 돌격! 돌격! 돌격!」

전장의 하늘 아래 뇌성처럼 우릉우릉 울려 퍼지는 로더필드의 독전(督戰). 이는 목청이 아니라 염동력으로 공기를 흔들어 발하는 외침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로더필드의 지휘는 멍청한 야만인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 그러나 이는 지휘의 목적이 상식적일 때의 이야기. 로더필드의 지휘-내키는 대로 움직이며 돌격만 외쳐대는 걸 지휘라고 불러줄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에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어느 가문의 마법기사의 외침이 집음기에 잡힌다.

“로더필드 경! 제발 저희도 생각해가며 움직여주십시오! 이런 식이면 불필요한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닥쳐라!」

쩌엉- 울리는 날카로운 굉음. 도끼창의 머리가 부러져 대각선으로 튀어 오른다. 종자가 던져주는 새로운 창을 염동력으로 낚아채고, 부러진 창대를 걷어차 흉물에게 꽂아 넣으며, 로더필드는 돌아보지도 않고 허공을 울리며 사나운 질타를 이어갔다.

「유아적인 칭얼거림은 들어줄 만큼 들어줬다! 내가 너희들의 나약함을 참아주는 것도 이젠 끝이다!」

「약속받은 것들을 얻고 싶다면! 이 전장에서 너희들의 자격을 증명해라!」

「이그니스 아우룸 프로바트(Ignis aurum probat)! 생명 가진 것들의 우열은!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에 판가름 나는 것! 죽는 자는 열등하고 죽이는 자는 우월하다!」

「오직 한없이 우월한 자들의 가문만이! 원탁내각의 일좌에 가주를 올릴 자격이 있음이니! 진정으로 우월한 자들이 열등한 자들에게 패배할 리 있겠는가!」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 말고 나를 따르라! 살아남는 자에겐 영광이 내릴진저! 낙오되거나 주저하거나 도주하는 자들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들어줄 만큼 들어줬다는 ‘칭얼거림’은 짐작건대 핵으로 팠던 함정을 포함하지 않을까 싶다. 필시 「파란 고양이」를 잃어버린 일로 원정군을 구성하는 다른 가문들의 발언권이 많이 약해진 게 아닐는지.

로더필드에게 간언했던 기사는 분을 삼키는 낯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로더필드 본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은 오히려 로더필드를 격분하게 만들 텐데. 지금 네가 나의 우월함을 부정하는 것이냐면서.

「우우우우우우-!」

부서지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며 싸움을 이어가던 684가 마침내 본격적인 유인의 막을 올린다. 어쩌면 유인이 아니라, 더는 견뎌낼 정신력이 없어 정말로 도망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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