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대영제국의 기수 (2)
그레이스와 나의 회담에서 이루어진 또 하나의 합의는 무기 공급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넌지시 군수상인으로서의 운을 띄우자, 장차 거대한 전쟁을 치를 군세를 꿈꾸는 악마숭배자들의 군주는 곧바로 강한 흥미를 드러냈다.
“아, 무기는 많을수록 좋지. 나를 따르는 전사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무기인걸. 단순히 중구난방으로 무장만 시키는 선을 넘어서, 통합된 군수체계를 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대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무기…….”
장비의 균일성은 군대를 이루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 중 하나다.
이 부대는 미제 지정사수 소총을 쓰고, 저 부대는 구 소련제 돌격소총을 쓰며, 어느 곳은 철지난 소구경 소총탄(5.56mm)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와중에 다른 곳에선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리-엔필드 소총탄을 주로 갈겨대고 있으면, 설령 백만의 전사들이 있다 한들 그것이 하나의 군대가 될 수는 없다. 하나의 기치 아래 집결한 무수히 많은 게릴라들의 연합체일 뿐.
그토록 많은 소부대들이 각자의 사양으로 보급을 요청하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발생할 행정적인 소요는 그 자체로 백만 대군을 뇌사상태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또한 규격화된 장비는 규격화된 훈련의 기초이고, 규격화된 훈련은 규격화된 전투력의 근간이며, 규격화된 전투력은 규격화된 부대편성의 시발점이다. 규격화된 장비 없이는 규격화된 부대편성도 없는 것.
결국 병력의 집중운용엔 뚜렷한 상한선이 그어지게 된다.
물론 왕의 군세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을 것이다.
일전에 전장에서 보았던 증기전차가 바로 대표적인 예시. 나는 그 전차의 설계에서 규격화와 자체적인 생산능력 배양을 위한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시간을 맞출 재간이 없겠지.’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인적자원의 교육수준일 터였다. 기본적인 사칙연산만 할 줄 알아도 다행이고, 언어적인 통일도 안 되어있으며, 그 언어조차 글로 쓰는 법은 모르는 자들이 태반일 게 바로 왕의 전사들이지 않은가.
아니었다면, 내가 마주친 증기전차의 수는 고작 세 대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군세는 지금쯤 수십 개의 증기기갑사단을 굴리고 있었겠지. 아프리카에 부존된 막대한 자원과 각성능력자들의 생산성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레이스는 가벼운 어조로 아쉬움을 입에 담았다.
“안 그래도 좁던 밀수 루트가 점점 조여지고 있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였는데, 당신이 그런 쪽으로 손을 보태주겠다면 고맙지.”
“그렇게 솔직히 털어놔도 되는 건가?”
“뭐 어때? 당신도 다 짐작하고서 말을 꺼낸 것일 텐데. 너무 뻔한 걸 숨기려 들면 내 꼴만 우스워지지.”
“그러게 스커드 미사일은 좀 아껴두지 그랬나.”
이링가 참변 당시 왕의 군세가 단거리 탄도탄 공격을 가하지만 않았다면, 악마숭배자들의 무기밀수를 방해하는 세력은 영국 비밀정보부와 원탁의 끄나풀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일장일단이 있는 선택이었어.”
그레이스는 큭큭 웃으며 답했다.
“충격은 한 번에 몰아쳐야 극대화되는 법이잖아. 난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익을 거둔 것으로 만족해.”
밀수 규모가 한정되어있다면, 왕의 군세 전체를 위해서는 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무기체계들을 우선적으로 들여와야 한다. 이를테면 탄도탄이나 대공미사일 같은 것들을. 자연히 개인화기처럼 상대적 가치가 낮은 무기들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녀는 자세를 바꾸며 도발적으로 물어왔다.
“구체적으로 얼마의 무기를 대어줄 수 있어? 고작 대대 하나, 연대 하나를 채울 물량으로 이야기를 꺼낸 거라면 많이 실망스러울 거야.”
평범한 무기 상인들에겐 한 개 대대, 한 개 연대를 무장시킬 장비를 조달하는 것도 평생에 몇 번 없을 커다란 건수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무기들의 가격대와 운송비가 워낙에 비싼 탓에 그만큼을 한 번에 주문할 고객이 많지 않고, 그러한 수요에 공급이 맞춰져있는 까닭.
즉 그레이스는 일반적인 무기거래의 한계선을 입에 담은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네 계획을 실현하려거든 최소한 한 개 야전군을 꾸릴 만큼은 갖춰야 하지 않겠나?”
대대 위에 연대. 연대 위에 사단. 사단 위에 군단. 그리고 군단 위에 야전군. 평범한 무기거래의 상한선을 세 단계나 뛰어넘은 대답.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표준 편제를 따르자면, 2개 이상의 군단과 사령부 직할 지원부대들로 편성되는 야전군의 최소 사이즈는 대략 10만 명 안팎이다.
이는 즉 소총수로만 부대를 편성하려고 해도 10만 자루의 총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 하물며 야전군은 단일 병종으로 꾸리면 그만인 제대가 아니다.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던 그레이스는 이내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참 달콤한 속삭임이긴 한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이야?”
“불가능하면 내가 말을 꺼냈겠나? 네가 조금 도와줘야 할 부분이 있긴 하다만, 네 도움이 없어도 연대 서넛이 쓸 기본적인 장비들쯤은 당장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다.”
연대 서넛이 쓸 장비들은 일찍이 삼합회가 낀 거래에서 확보해놓은 물량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창고에 있는 재고를 그냥 꺼내오기만 하면 되는 것. 그 물량을 하역할 장소를 찾는 것은 별개의 문제겠지만.
“오…….”
그레이스는 습관처럼 입술을 두드리며 자신의 역할을 물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매력적이야, 웨인.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간단해. 위장용 간판을 몇 개 달아줘야겠다.”
“위장용 간판이라면?”
“네 영향권에 들어있는 나라들. 그 나라들 안에 주술사 왕과는 무관해 보이는 창구들을 만들어라. 정부각료들의 뇌를 파먹든, 특정 지역을 실효 지배하는 군벌들을 만들어내든 상관없어. 그들로 하여금 현물로 값을 치르게 한다면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무기를 조달해주겠다.”
“현물은 광물이나 희토류, 식량자원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래.”
“속여야 할 상대는?”
“주로 중국 놈들이 될 거다.”
“중국?”
내 말에 그레이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중국은 좀 어려울 텐데.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내 아랫것들이 그쪽과 연결된 브로커들을 다소 어설프게 건드려놔서 말이야.”
“새로운 밀수 루트를 뚫어보려고 했나?”
“뭐, 그렇지. 이미 몇 번 위장을 발각당한 전적이 있다 보니, 그쪽에선 아프리카로 가는 물량이라고 하면 무조건 차단부터 하고 볼 거야. 그쪽의 첩보역량이라는 게 예상 이상으로 만만치가 않더라고.”
중국의 일대일로가 많은 나라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비웃을 여력이 있는 제3자들의 정서일 뿐. 그간 중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이 대륙에 풀어온 막대한 자금은 많은 수의 친중파와 현지협력자들을 양산해왔다.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위안화의 맛을 본 브로커들이 박혀있는 검은 대륙의 암시장에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을 속여 무기를 조달하려 했다면 꼬리가 밟히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이 대륙에 군대를 보내고 식민 사업까지 병행하는 상태잖아? 이 땅에선 멀쩡한 나라에 지원해주는 무기들도 많은 수가 암시장으로 빠진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놈들이, 이 민감한 시기에 위험한 장사를 하려고 할까?”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건 내가 해결하겠다.”
그렇잖아도 3인의 경독을 마지막으로 검증해볼 때가 되었다. 그들은 국익을 위협하는 선택으로 자신들의 이기심과 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내 답을 듣고 입술을 핥았다.
“……당신 방금 정말로 맛있어 보였어.”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다음을 논하도록 하지.”
“그다음이라면?”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언제까지 외부조달에 무게를 둘 셈인가. 왕의 군세는 마땅히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는 중국의 밀수 라인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렴 야전군 규모의 전투단이 중국산 장비들로 무장했는데 잡음이 안 생길 수 있겠는가? 주술사 왕의 군대가 스스로 무기를 복제하고 있음을 과시해줘야 내가 만들어놓은 라인의 안전이 보장된다.
“뭐가 문제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대안이 있으니까 꺼낸 말이겠지?”
“다라-아담-켈의 장인들을 소개해주겠다.”
그쪽 장인들의 도제식 교육은 다른 기반 없이 숙련노동자들의 조합만으로 생산 라인을 구축하는 데 최적화되어있다. 언어의 장벽이 방해가 되기는 하겠으나, 이 대륙에도 표준 아랍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꽤 있고, 주술사 왕을 따르는 추종자들의 종교적 열망까지 더해지면 단기간에 괜찮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추가로 북한에서 CNC 가공선반까지 구해주면 보여주기용으로는 완벽하겠지.
“다라-아담-켈이라……. 공교롭네. 그쪽도 내 아랫것들이 벌써 접촉해본 곳인데 말이야.”
“잘 안 풀렸던 모양이지?”
“완고한 무슬림 부족들이잖아. 고향을 떠나 이 땅의 혼란과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부터가 간단한 일이 아닌데, 이교도 주술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장사 밑천까지 알려 달라고 한 거니까. 요구하는 돈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그레이스는 장난스럽게 넌더리를 내었다.
“액수도 액수지만…… 이쪽에 대한 불신 때문에 무조건 선불, 무조건 일시불만을 외치니 그걸 그냥 줄 수가 없잖아? 납치를 해오기도 여의치 않았고.”
파슈툰 부족 기술자들의 작업공정은 부족과 가문 내에서의 지위 및 역할에 따라 세세하게 분업화되어있다. 납치를 하려면 적어도 한 가계의 남자들 전부를 납치해야 비로소 생산 라인 구축이 가능하다는 뜻. 개중에 순교자라도 나온다 치면 그나마도 의미가 없어진다.
“어때. 당신에게는 이걸 해결할 방법이 있겠어?”
그레이스가 묻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내가 해결하겠다.”
“어머나, 세상에.”
활짝 미소 짓는 그레이스에게선 흥분이 고조되는 인간의 냄새가 났다.
이때의 나는 속으로 칠각기사단의 자금동원능력을 가늠했다. 비록 그레이스가 협상 테이블에 올렸던 금액을 구체적으로 입에 담지는 않았으되, 아부 알 까심과 협상을 해본 나로서는 대략적으로나마 범위를 추산해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은, 커다란 오차범위 내에서의 최댓값을 잡아도 내 조직보다는 아래이리라는 것.
‘그렇겠지.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아왔을 테니.’
악마숭배자들의 교단 「칠각기사단」은 그레이스가 합류하기 전부터 이미 요주의 단체로서 감시와 추적을 당하고 있었던 상황. 그런 집단이 부를 축적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을 수밖에 없다. 자산동결과 계좌압류는 일상적인 사건에 가깝지 않았을까.
게다가 영국은 중국이 비상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의 감시국가였던 나라다. 나와 그레이스는 기본적인 경영환경부터가 달랐던 셈.
“이 일이 잘 풀리면,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영국 놈들을 기만할 수 있을 거다.”
내 말에 그레이스는 즐겁게 큭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아, 그거 좋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밀수 라인들을 미끼로 삼아서, 내 무기 조달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도록 만들어주자 이거지?”
“이해가 빠르군.”
“마음에 들어. 그럼, 이쪽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알려줘야겠네. 우리 앞으로 자주 통화하도록 해.”
여기까지가 무기 공급에 대한 그레이스와 나의 협약이었다.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활과 화살(우타웨 나 브옘베)」이 진정한 군대로 거듭났을 때 섬나라 놈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다라-아담-켈의 5대 공장과 새로운 거래를 체결하는 일에서 성전연합의 관전무관인 마무르는 의외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본디 흑해자당에게로 갈 예정이었던 기술자 제3진부터 아프리카로 돌리고 싶었으므로, 그 전에 마무르와 한번 마찰을 빚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르는 어떠한 반발도 없이 내 뜻을 수용했다.
“우리 싸장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싱글벙글 웃는 광신도의 낯짝은, 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싸장님이 하고 싶다면 하셔야 한다. 싸장님 당신은 한없이 높으신 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밀수꾼이기 때문에.”
이 광신도가 이렇듯 찜찜할 정도로 살가워진 것은 내가 684와 교전을 치른 이후부터였다.
교전이 시작된 시점에서, 내 부하들은 핵심요인 보호를 명분 삼아 마무르의 전장관측을 제한했다. 실제로 사지 멀쩡하게 목숨을 붙여놓을 필요가 있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르는 684의 초현실적인 흉물스러움으로부터 뭔가 종교적인 영감을 받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인내심이 남다른 알라의 전사예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잠시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무엇입니까? 그 불온한 시선은? 내가 인내심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혹시 증거가 필요한 것?”
내가 저를 미심쩍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무르는 턱을 치켜세우고 당당한 태도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잘 들으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키보드를 부순 적이 없어요. 머저리 같은 탑신병자들과 쓰레기 같은 와드싸개들 사이에서 이 정도면 가히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거참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나의 이 대단한 인내심은 알라께서 내려주신 전사의 자질이다. 더욱 솔직하게 감탄하도록 하십시오.”
마무르의 헛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싸장님은 잠시 이 사진을 보시는 것입니다.”
광신도가 내미는 사진엔 머리를 천으로 가린 푸른 눈의 어린 소녀가 찍혀있었다.
“이게 누구요?”
“전에 말씀드렸던 나의 일곱 번째 여동생입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아니었소?”
같은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꼰대로 통하는 원리주의자들은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여성의 맨얼굴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는 것조차 잘못된 일이라 이야기한다.
마무르는 긍정했다.
“옳아요. 싸장님 당신은 교양이 넘치는 불신자. 그러나 싸장님이 진정한 믿음에 귀의하는 건 정해져있는 미래이며, 알라의 높으신 뜻을 받들 자가 장차 아내 될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큰 결례라고 보기 어려워요.”
“내가 분명 관심 없다고 했을 텐데.”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믿음에 귀의하면 싸장님은 내 동생 말고도 세 명의 아내를 더 둘 수 있어요. 이것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베타 테스트다. 지금 당장 이슬람 멤버십에 가입하여 이 은혜로운 베타 테스트를 신청하십시오.”
혹여 기분이 상하면 내 결정에 뒤늦게 어깃장을 놓을까 싶어 가만히 들어주기는 했지만, 이 미친놈의 정신세계는 접할 때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 속의 무표정한 소녀가 우울해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