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대영제국의 기수 (1)
마녀와 내가 합의한 대전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로더필드를 죽여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온 후, 원탁이 더는 세력격차의 복리를 쌓지 못하도록 다방면에 걸쳐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하는 것.
로더필드와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점은 도도마, 이링가, 그리고 모로고로 일대를 연결하는 거대한 삼각지대 내의 어딘가였다.
이제까지 그레이스가 로더필드와의 충돌을 회피해온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자신을 쫓는 영국 비밀정보부를 원탁의 전투단이 있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 두 번째는 회로의 출력만으로는 대마법사에 준하는 전력인 「콜레로의 뱀」과 그 외의 부수적인 전력들을 움직여 로더필드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
그렇게 안전한 운신의 폭을 먼저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될 패인 자기 자신을 움직여 전략적인 목표들을 달성해왔던 것이다.
이제껏 로더필드를 따돌리기 위해 동원해왔던 수단들은 역으로 활용하면 로더필드를 원하는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로도 작동할 수 있었다.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표면적인 활동으로 복귀하기 전 오랜만에 스텔라 포르투나의 회의실에 들었다.
전자지도를 앞에 둔 경태는 지도에 슥슥 정보를 기입하며 말했다.
“한쪽에는 「콜레로의 뱀」인 684 아가씨. 다른 한쪽에는 마녀 아줌마와 전투코끼리 「드람메자」의 조합……. 어느 쪽이든 대마법사 없이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전력이긴 마찬가지이니, 노출증 할배 입장에선 당연히 684 아가씨부터 먼저 잘라먹고 싶겠지요.”
대마법사는 어떤 전장에서든 싸움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비대칭 전력이다. 684를 대마법사에 준하는 전력으로 계산한다면, 이 검은 대륙에서 원탁과 악마숭배교단이 보유한 비대칭 전력의 수는 1대 2로 악마숭배교단 쪽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셈이었다.
원탁이 아무리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양측이 격돌하는 순간 전투가 벌어지는 바로 그 지점에 투입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니 문약한 동료들을 원망하기에 앞서, 핵을 상실한 로더필드로선 일단 비대칭 전력의 숫자부터 동수로 만들어놔야 합리적이다. 그리고 전투코끼리에 올라탄 그레이스보다는 684 쪽이 당연히 더 쉬운 사냥감일 터.
그렇기에 그레이스는 684를 미끼로 쓸 작정이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배신을 하거나, 일이 크게 잘못되더라도 684 하나만 잃고 끝낼 수 있게끔.
이는 로더필드가 보기에 자신을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게 만듦으로써 충돌을 회피하고,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착실히 이득을 쌓아가는 전략으로 비쳐질 것이다.
경태와 더불어 지도와 지도에 표기된 정보들을 눈에 새기던 수연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이번 유인에 말려드는 원탁 전투단의 규모를 보면 그레이스가 보유한 정예의 전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겠군요. 전장정보 수집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옳은 판단이다.
그레이스가 로더필드의 원정군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면, 번거로운 회피 및 유인전략을 취할 필요 없이, 그리고 내게 제 한계를 드러내가며 아쉬운 소리를 할 것도 없이 단독으로 전력을 집중해 박살을 낼 생각을 했어야 정상이다. 이미 곱씹었듯이, 흉물로서의 684는 대마법사가 아닌 자들을 상대할 땐 대마법사나 다름없는 힘이니까.
즉 지금의 그레이스는 비대칭 전력에선 우위를 누릴지언정 원탁의 원정군 주력을 상대로는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혹은 승리를 거둘지라도 피로스의 승리가 되리라 예상했거나.’
이 땅에서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원탁을 공략하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하다. 여기서 지나친 피해를 입어 원탁과의 세력격차가 만회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검은 대륙에 기반을 마련해 힘을 기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기공장이 촉발한 원탁 공략의 시간제한은 나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전장의 안개와 많은 불확실성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기로는 그레이스도 나와 같았겠지. 그러니 내가 합류하고 나서야 비로소 승부수를 띄워볼 결심이 들었을 테고.
만약 나와의 협상이 원활히 타결되지 않았다면, 아마 그레이스는 로더필드를 핵으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했을 것이다. 아깝긴 해도, 원탁이 굴리는 스노우 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여기서 시간을 벌어두지 않을 수 없으니.
나는 또 다른 변수에 관하여 그레이스가 내놓았던 견해를 떠올렸다.
「놈들이 「콜레로의 뱀」과 유사한 생체병기나 외부부착형 마력회로의 완성형 같은 것들을 투입할 가능성이 있겠느냐고?」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정적인 부정이었다.
「아니. 아직은 때가 이르다고 봐.」
이렇게 단정 지으며, 그레이스는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아무리 그래도 「태내성형」의 원조는 나야. 내 과반세기의 노력을 놈들이 벌써 따라잡았을 리가 없잖아? 그것도 자기 몸이 아니라 타인의 몸으로 흉내를 내야 하는 놈들이.」
설령 그레이스의 예상이 빗나간다 한들 어느 정도까지는 대응할 능력이 있다.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가 그 정도도 못 할 거라면 나가 죽어야지.
나는 수연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수연이 네 입술은 왜 그 모양이냐.”
이는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이 녀석쯤 되는 각성능력자가 구순염이 생길 정도면 피로가 적잖게 쌓여있다는 탓이겠지. 하여 신경이 쓰이기는 아까부터 쓰이던 것인데, 나부터가 수면시간을 늘리는 데 인색한 편이다 보니 말을 꺼내기가 떳떳지 못한 감이 있었다.
수연은 까딱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기관리가 부족했습니다.”
“잠깐 이리로 와봐라.”
“……예.”
나는 가까워진 수연에게 손짓하여 상체를 숙이도록 시켰다. 그러곤 입술에 손을 대어 마력장을 중화한 뒤 「생명」으로 환부를 아물게 했다. 염증을 일으킨 진균을 싹 지워 없애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됐다.”
“감사드립니다.”
“쉴 때는 충분히 쉬어라. 내가 너를 이런 일로 걱정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수연이 다소곳이 답하자, 이를 지켜보던 경태가 별안간 짜자자자작 소리를 내며 호들갑스러운 박수를 쳤다. 나는 조금 어이없는 심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웬 박수를 치는 거냐?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경태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님께만 말씀드리는 건데, 실은 제가 전생에 물개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지금도 가끔은 물개였던 시절의 습관이 나오곤 하죠. 방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고요.”
“…….”
요즘 젊은 세대의 농담은 내게 너무 어렵다. 윗사람으로서 어떻게 받아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금 수연 녀석을 눈에 담았다.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시선을 내리까는 녀석을 보니, 전부터 때때로 고민하던 선물을 무엇으로 주어야 할지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장신구 종류는 지나치게 무성의한 것 같아 피하려고 했지만…….
‘재료가 특별하다면 선물 자체는 다소 무난해도 괜찮겠지.’
그렇잖아도 원탁과의 접적(接敵) 가능성이 있는 주요 간부들의 생존능력을 향상시키고자 아티팩트를 하나씩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위장이 용이한 액세서리는 이런 측면에서도 양호한 선택이 될 터였다.
‘재료’를 손에 넣는 대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도록 디자인을 미리 봐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짧은 상념을 끊고 의식의 초점을 현실의 문제로 되돌렸다.
“모로고로 남서부 회랑의 동태는 어떠냐?”
모로고로 남서부 회랑은 내가 「파란 고양이」를 훔쳐내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즉 나는 전술핵폭탄을 분실한 잡것들이 어찌 대처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것.
수연은 지체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수색작업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입니다.”
“벌써?”
“예. 사망자들의 유해를 모두 발견한 시점에서 더 이상 수색을 지속시킬 명분이 없으니까요. 매몰된 고가의 장비들을 회수해야 한다며 수색시간을 조금 연장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역시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대로 일이 풀린 셈이지요.”
그곳에 배치된 원탁의 분견대는 표면적으로는 그저 영국군에 협력하는 일개 헌터 그룹에 불과하다. 게다가 방사성 고양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영국 정부에게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사항이니, 그들이 무슨 이유를 대어 지휘통제를 무시하고 수색을 이어갈 수 있겠는가.
영국 정부를 속이려 뒤집어썼던 껍데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그 껍데기를 벗어던지면 군사구역에 머무를 명분이 없어지지.’
모로고로 남서회랑은 평화유지군이 전개한 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다. 그런 요충지에서 일개 헌터 클럽(HC)이 제멋대로 움직이기란 불가능한 일.
나는 수연의 말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어냈다.
“사실상 중단이라면, 그래도 뭔가 하고 있기는 하다는 건가?”
“예. 싱크홀에 빠진 유실물 중에 금고가 포함되어있다는 소문을 퍼트렸더군요. 해당 금고엔 백오십만 파운드 상당의 활동자금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파리 떼가 꼬였겠군. 그래서, 결과는?”
“지하수맥이 터졌습니다.”
“과연.”
힘은 좋아도 기술과 지식은 전무한 비전문가들이, 욕심에 눈이 멀어서는 평화유지군의 시선을 피해 경쟁적으로 굴착을 해댔을 테니, 그야 사고가 나지 않고 배길 리가 있나. 설령 수맥이 터지지 않았다 한들 자기네들끼리 패싸움이라도 붙어서 평화유지군의 제재를 받거나 했을 것이다.
경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마침 옆에 딱 저수지가 있으니 수맥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네요. 소문을 낼 땐 나름대로 좋은 임기응변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딱하기도 하지.”
미국의 골즈보로 사고 당시에도 마지막까지 핵폭탄 하나를 회수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지하수맥의 존재였다. 결국 미국 군 당국은 폭탄 회수를 포기하고 해당 지역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다.
핵 분실 사고가 발생한 모든 지역은 이처럼 영구적인 감시 대상으로 등록된다. 이 세상에 나처럼 핵을 욕심내는 인간이 한둘이 아닌 까닭이다.
「파란 고양이」를 손에 넣은 건 정말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그럼 원탁 측은 핵폭탄 분실을 단순한 사고로 판단하고 있겠군.”
내 말에 수연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도 일말의 의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콜레로의 뱀」이 인공적인 싱크홀을 일으킨 게 아닐까 하는……. 하필 핵을 둔 위치에서 그런 사고가 발생했다는 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일입니다.”
이에 경태가 어깨를 으쓱인다.
“당연히 그런 의심이 있겠죠. 근데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건 의심하는 거랑은 별개이고, 보고 받은 정보를 있는 그대로 공유하는 것도 또 별개라고 봐야죠. 아무렴 유사시 죽으라고 던져놓은 애들이 로더필드 본인의 가솔이나 가병(家兵)들이겠습니까? 백이면 백 버림 패로 써먹어도 무방한 다른 가문의 전력일 겁니다.”
“……힐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자연적인 사고임을 피력할 것이다?”
“바로 그겁니다, 누님.”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는 경태 녀석.
“684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 물론 형님께서 진위를 판단하며 들으셨으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죠. 여하간 684가 알려준 대로라면 가독 계승에 실패한 가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핵심전력을 차출당한 입장들일 것인데, 여기서 사고의 사이즈가 커져버리면 약속받았던 원탁내각의 대의원직 승계는 완전히 나가리 되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유일한 답은 바로 기도메타일 수밖에요.”
“기도메타?”
“아, 기도메타 모르시는구나. 이걸 설명하려면 우선 ‘메타’가 무슨 의미인지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원래는 이게 메타게임 분석의 앞대가리를 잘라서 만든 표현으로-”
“짧게.”
“음, 뭐, 핵을 잃어버린 애들은 이게 진짜 자연적인 사고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외면하는 게 최선의 생존 전략이다 이 말이죠. 진짜 최선이라기보다는, 광신도들에게도 없을 수가 없는 방어기제에 더 가깝겠지만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책임 추궁이 이루어질 범위는 경태가 말한 것 이상이었다.
‘일단 핵에 관한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것부터가 문제지.’
원탁의 원정군은 「파란 고양이」의 정보를 당연히 극비로 취급했을 터. 광신도들이 믿음으로 지키는 극비가 정확한 위치정보까지 포함하여 새어나갔다는 건, 그들이 보기엔 대단히 현실성이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런즉 경태가 말한 기도메타인지 뭔지는 저들의 입장에선 의외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안이 있어봐야 설마 그럴까 싶은 막연한 불안 정도겠지.
무엇보다 적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경계한다면, 그에 따른 움직임의 특이성은 전장에서 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레이스 또한 이런 부분까지 고려하여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