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웨인과 웨이네타 (15)
험악한 분위기가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레이스는 때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사납게 서성대며 강압적인 언사로 협박에 가까운 화법을 구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엔 맥이 풀린 표정으로 주저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고서 입술을 구부리며 못마땅한 어조로 하는 말이 이러했다.
“당신은 아직 덜 내려놓았구나. 아직까지도, 다 버리지를 못했어……. 다 버리지 못한 인간은 결국 선을 넘게 되어있는데.”
“선을 넘는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냥 넘어가. 대단한 건 아니니까.”
원탁과 나 사이에 항상 자기만족의 선을 그으며 살아온 내게 ‘선을 넘는다.’는 표현은 당연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잔을 들지 않은 쪽 손을 휘휘 흔들며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더 캐물으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말하려 했든, 단순한 우연의 일치겠지.’
제 잔을 비운 그레이스는 나에게도 손가락질로 똑같이 잔을 비울 것을 요구했다.
“마셔. 프랑스를 밀어버린 다음엔 더 이상 구하지 못하게 될 술이니. 이 밤을 기념하기엔 더할 나위 없잖아?”
내가 떨떠름하게 잔을 비우자, 그레이스는 염동력으로 병을 띄워 곧바로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마시는 건 분명 향이 좋은 와인인데 정작 당신 낯짝은 쉬어버린 맥주를 억지로 퍼마시는 사람 같네. 대마법사씩이나 되어서 그렇게나 취기를 경계한다는 게 우스워. 마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취하면 얼마나 취한다고.”
“얼마가 되었든,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정신이 무뎌지는 건 사실이지. 생사를 가르는 차이는 때로 모래알갱이 하나보다 작을 수 있음을 모르나?”
“알지, 아주 잘 알아. 너무나 잘 알아서 오히려 더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당신이야말로 이런 기분을 모르는 거야? 모래알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약한 척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약한 척이라니? 나는 지금 모래알 하나만큼의 방심을 당신에게 허락하고 있는 건데? 숙녀로부터 티끌만큼이라도 더 가까운 마음의 거리를 허락받은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그래. 그것참 고맙게 생각한다.”
“큭큭.”
그레이스는 낮게 키득거리며 한 손으로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아, 아까워라. 기껏 배란한 난자가 쓸모없게 되어버렸네.”
이건 또 신선하게 맛이 간 소리로군.
“미친 소리 좀 적당히 하면 안 되겠나?”
“너무하네. 내가 단순히 미쳐서 이러는 것 같아?”
그레이스가 손가락을 좌우로 느리게 흔들었다.
“크로우허스트쯤 되는 인간이 저가 차지할 몸을 아무렇게나 선별하진 않았겠지. 노란 원숭이의 육체로 갈아타는 수모를 감수하는 일인데, 보상심리에서라도 더욱 철저한 반대급부를 추구할 수밖에. 그렇게 선별된 인간의 씨앗이라면 인형제조 연구에 써먹어볼 가치가 넘쳐나지 않겠어?”
그레이스의 짐작은 사실에 닿아있었다. 스승새끼의 보육원은 어지간한 사관학교나 군사훈련소보다 더 엄격한 커리큘럼으로 운영되었고, 그 목적은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우수한 이식 대상을 가려내어 결함 없이 육성해내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껏 처녀수태 이외의 방식으로 자식을 생산한 적이 없어. 남자의 씨를 쓰는 것에 거부감이 있기도 하고.”
그레이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내가 당신의 유전자로 인형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그래…… 내가 제정신이 아니기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발상이기는 하지.”
“…….”
“그러나 내 광기는 내가 가진 하나의 무기야. 그렇잖아도 가진 게 많은 원탁 새끼들이 상대적 약자인 내 지혜까지 모방하여 저들의 자산에 보태려고 하는 지금, 내가 새로운 광기를 모색하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인가?”
이렇게 물으며 나를 바라보는 짓궂은 시선은 ‘너도 제정신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아?’라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개미를 세균전의 매개체로 써먹을 궁리를 하는 내가 광기를 말할 주제는 되겠느냐고.
“사과하지. 실언이었다.”
“사과할 것까진 없어. 미안하면 대작이나 제대로 해주든가.”
“……술을 좋아하나?”
“뭐, 평범하게 즐기는 정도? 다만 지금은 평소보다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 뿐이고.”
병 하나가 비는 건 금방이었다. 그레이스는 까딱이는 손짓으로 진열장으로부터 새로운 와인을 불러들였다. 술병에 염동력의 사슬을 걸어 당겨오는 정확성엔 취기로 인한 흐트러짐이 묻어나지 않았다.
“웨스트버튼은 어떻게 죽었어?”
그레이스가 이를 물어볼 것은 미리 예상했던 바. 나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고, 마녀는 매우 흥미로워하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급박한 전투의 와중에도 인형술사가 신사의 정장을 갖추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부분에서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으며, 국지적인 열대요란을 일으켜 내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부분에서는 즐거운 감탄사를 흘리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레이스는 기분 좋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탁의 대의원들은 다 그런 놈들이잖아. 가진 바 힘은 강력할지라도, 스스로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느라 목숨을 걸고 싸울 줄은 모르는 이기적인 겁쟁이들. 다만 그중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을 따름이지.”
“로더필드 말인가?”
“그래. 그 끔찍한 노출증 전쟁광 영감탱이. 그 인간 하나만 해치우면, 원탁의 나머지 마스터들은 겁먹은 거북이 꼴이 되어버릴 게 뻔해.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오는 거지.”
나는 원탁과 로더필드에 대한 그레이스의 평가에 공감했다.
로더필드는 자기 자신을 원탁의 수호자이자 「전쟁지도자(Dux Bellorum)」라고 즐겨 부른다. 그러나 이는 혼자서 제멋대로 자칭한 바이지, 대의원들의 합의를 통해 주어진 공식 직위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원탁내각의 나머지 대의원들은 로더필드의 참칭을 규탄하려 들지 않았다. 저가 알아서 험한 일들을 도맡겠다고 나서니, 굳이 거기에 초를 칠 게 무어냐고 생각했던 것. 스승새끼 또한 속으로는 경멸할지언정 그 쓸모를 고려하여 험한 말을 하지 않는 쪽이었다.
로더필드가 스스로 원탁의 대전사(代戰士/Champion) 겸 대영제국의 기수(Standard Bearer of British Empire)임을 주장하며 양차대전에 참전한 덕분에, 원탁에 대한 영국정부의 취급이 눈곱만큼이라도 더 좋아졌던 게 사실이기도 하다.
나는 무의미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걸.’
솜(Somme)에서도 안 죽고, 덩케르크에서도 살아 돌아오고.
특히나 솜에서 죽지 않은 건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센티미터를 나아갈 때마다 한 명의 전사자를 바닥에 깔아야 했던 전장에서, 마소 결핍에 시달리는 대마법사가 근 1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어찌 무사히 전진할 수 있었을까.
아군 병사들과 포로들의 영혼을 갈아 마력을 충당했어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제까지는 그 염동 괴물과의 정면충돌을 최대한 회피해왔지.”
마녀는 이야기했다. 그 인간도 영국 정부에게 꼬리를 밟히면 곤란한 입장인 터라, 생각보다 해볼 만한 술래잡기였노라고. 만전의 준비를 갖추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격돌을 미루고 또 미룰 작정이었노라고.
“그러나 당신이, 당신 하나만이라도 이 판에 끼어준다면…… 준비는 지금 있는 걸로도 이미 충분해. 놈들이 모방하는 내 지혜가 점점 더 신경에 거슬리던 참인데, 잘 됐지 뭐야.”
그레이스가 내 눈높이로 새로 채운 잔을 들어 보였다.
“우리 함께 대어를 낚아보자고.”
나와 마녀의 회담은 커튼의 틈새로 검푸른 쪽빛이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로더필드와 원탁의 원정대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데엔 서로 이견이 없었지만, 피차 가지고 있는 패를 다 까 보이기 싫어하는 마음도 같았으므로, 세부적인 사항들을 합의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건 기본적으로 내게 유리한 줄다리기였다. 마녀의 세력은 원탁에게 노출되어 있으나 내 세력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그레이스가 사냥감을 끌어들이면 결정적인 국면에 가세하여 결판을 짓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레이스 측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어있는 협약이었다.
“아, 너무 손해를 본 기분이 드는걸.”
마녀가 쭉 기지개를 켜며 내놓는 푸념. 나는 피로감을 감추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손해를 본 게 아니지. 이익을 보기는 하였으되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지는 못했을 뿐.”
“숙녀가 말할 땐 공감을 해줘야지. 그렇게 일일이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는 마녀가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입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보의 불투명함이 마녀의 나신을 가리고 올라간다. 내게는 너무도 목마른 불투명함. 가까이에서 보고 있어도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마법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내 아쉬움을 드러내어, 상대에게 새로이 파고들 꼬투리를 내어주어야 할까? 몇 번을 삼키고 다시 삼킨 끝에, 나는 결국 입 밖으로 아쉬움을 내었다.
“그 옷.”
“응?”
“혹시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알려줄 수 있나?”
“아아, 이거?”
질문을 받은 그레이스가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큭큭큭. 생각해보니 그러네. 당신에겐 눈을 가릴 무언가가 굉장히 절실하겠구나. 그런데 어쩌지? 이걸 만들기 위해서는 당신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싫어하는 일?”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랑 섹스를 하는 거지.”
“……대가를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치르겠다.”
“대가?”
내면에 어울리지 않는 청아한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그레이스.
“똑바로 들어. 나는 이걸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했어.”
“무슨 뜻이지?”
“모르겠어? 이 옷, 그 눈을 무력화하기 위한 마법의 소재가 바로 당신의 피를 이은 자식이란 말이야. 당신의 영혼과 파장이 유사한 영혼! 그 영혼을 지닌 자식을 태내에서부터 가공해 뽑아내야 비로소 당신의 마력장 내에서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은폐장막의 회로를 구축할 수 있거든.”
나를 놀리는 듯 즐거운 웃음을 이어가며, 그레이스는 모델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저가 입은 옷을 과시했다.
“봐. 이 원피스 한 벌을 짜는 데 들어간 아이의 영혼이 아홉이야.”
“…….”
“당신은 나와 달리 눈을 가릴 수 있는 사이즈면 족하겠지? 그래도 자식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할지도 몰라. 아니, 아마도 부족할 거야.”
그레이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도 그럴 게, 당신에게는 자궁이 없는걸. 나처럼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없지. 그러면 당연히…… 영혼의 파장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고.”
요컨대 제조법을 알려줘도 태내 회로성형의 기반인 자궁이 없이는 시도조차 불가능하며, 그레이스 자신에게 외주를 맡긴다 한들 생산품의 품질을 보장할 수 없고, 그나마도 자식을 낳아 갈아 넣을 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돌겠군.’
즉석에서 지어내는 거짓이라기엔 지나치게 그럴듯하다. 나는 무너져 내리려는 포커페이스를 가까스로 바로잡았고, 불식간에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던 바이니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수면안대 하나가 내게는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어때, 한번 해볼래?”
“됐다. 포기하지.”
“……흐음.”
“혹여 거짓으로 나를 희롱하는 거라면 그만둬라. 내가 지불할 대가는 네게도 분명 만족스러운 것일 테니.”
“그 대가라는 게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
“내가 고래 흉내를 내는 데 사용한 마법술식. 이는 곧 물을 지배하는 힘이며, 염동력에 비해 에너지 효율은 높고 회로점유율은 낮다.”
“확실히 유용할 것 같긴 한데, 내게 그런 걸 넘겨줘도 되는 거야?”
“물론.”
넘겨주는 건 당연히 열화판이다. 세상에 첨단무기를 수출하면서 다운그레이드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되나.
내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기 전, 갓 코드를 얻었을 때에도 없었던 결함을 끼워 넣어 알려준다면, 동일한 술식으로 힘을 겨룰 때 반드시 우위를 점할 만큼의 기술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아쉽게 됐네. 내가 말한 건 모두 진실이야.”
그레이스는 유혹하듯 역제안을 던져왔다.
“당신만 괜찮다면 내 「태내성형」의 노하우와 교환할 수도 있어.”
“내가 그걸 받아서 어디에 쓰나? 원탁 놈들처럼 아기공장을 돌리지 않는 이상에야. 나는 그딴 짓에 관심 없다.”
“왜? 필요하면 돌릴 수도 있지 않아?”
나는 내 자기만족의 선을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선 그레이스를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
내가 입을 다물자, 그레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꼭 그런 쓸모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생명」으로 몸을 바꿔볼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고, 또 자식에 대한 그 이상한 거부감을 떨쳐낼 각오를 세운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내게 부탁하는 것보다 스스로 만드는 편이 완성도도 높을 것이고.”
점입가경이다. 「생명」으로 몸을 바꾸라는 건 즉 내 몸을 마력으로 뒤틀어 자궁을 달아보라는 소리였다. 할 생각도 들지 않거니와, 내가 완전히 돌아버려서 한다고 쳐도 족히 서너 달은 앓거나 거동이 불편해질 만큼 까다로운 과업.
하물며 핏줄에 대한 거부감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마라. 포기하겠다고 했다.”
내 단호한 거부를 들은 그레이스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묘한 느낌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