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16화 (316/561)

#34. 웨인과 웨이네타 (14)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몸수색이었다. 그레이스의 요구를 받은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숨겨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송수신기와 인이어 정도는 봐줬으면 좋겠군. 그래야 형평성이 맞을 테니.”

내가 형평성을 입에 담은 건, 다른 방과 다른 객실에 대기 중인 그레이스의 딸들 또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은 상관없지만, 일단 꺼내놓기나 해봐.”

인이어와 송수신기, 단추로 위장된 마이크를 떼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자, 그레이스는 희미한 염동력을 풀어 각각의 내부구조를 확인했다. 저항의 유무를 제7의 감각으로 삼는 염동의 응용기술. 자연적인 각성능력자들 중에도 드물게 비슷한 기교를 구사하는 천재들이 있기는 하나, 대마법사의 기교에 비하면 문자 그대로 원시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그레이스는 이내 흥미를 잃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옆으로 달라붙는다. 서로의 몸이 반쯤 포개어지고, 내 다리 위로는 가느다란 손이 미끄러졌다.

고도로 숙련된 전문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접촉의 양상은 나를 지극히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맨살을 많이 드러낸 육체로부터 폭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방향(芳香) 역시도.

“몸수색이 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

지금도 여전히 회로를 다 보여주고 있으니 기습적인 마법 사용을 우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거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내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문제야? 아내가 남편 몸 좀 만져보겠다는데.”

“미친 소리 좀 작작 해라. 나는 진지한 대화와 협상을 원한다.”

“큭큭. 이래봬도 나는 지금 제법 진지해. 내 매력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갈고 닦은 무기거든……. 특히나, 지금의 내 육체는 엘름스테드를 죽일 때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경지로 완성시킨 결과물이란 말이야.”

“……지금의 내 육체?”

“어머나, 실수.”

실수일 리가 없는 실수를 말하며, 그레이스는 몸수색을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당신, 생각보다 많이 망가져있구나.”

“…….”

“성욕이라는 게 시각적인 자극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지만, 시각이 성욕의 전부는 아니고, 또 그런 눈을 달고서 오래도록 살아왔으면 나름대로 그 눈이 보여주는 세상에 적응을 했을 법도 하다고 여겼는데…….”

짧은 여백을 두고 다시 이어지는 말.

“그런데, 당신은 수컷이라면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반응도 드러내질 않는구나. 동성애자들조차 향기만으로 흔들리게 만드는 게 이 육체의 마력이건만. 약간은 서운해질 지경이야.”

다시 되새기건대, 이 마녀의 아름다움은 이미 대마법사 하나를 끝장낸 바 있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복제체의 그것과는 많은 면에서 다른, 혹은 압도적으로 더 풍부한, 육체에서 배어나는 향기 역시도 필시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모종의 배합식을 담고 있는 것이겠지. 그 자체로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효과가 있는. 인간의 육체가 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

다만 그 ‘마력’이 내게는 효과가 없었을 뿐.

그레이스의 말마따나, 나는 단단히 망가져있는 인간이었다.

“나를 믿어라, 그레이스. 이 눈을 달고 사는 삶은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괴롭고 불편할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조금 전 마녀가 나를 시험한 것은, 제 무기가 내게 먹히는가에 대한 시험인 동시에, 자신이 나처럼 황금기의 눈을 박아 넣게 되면 적응이 얼마나 어려울지를 한 번 더 헤아리는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비중을 따지면 아마 뒤쪽이 더 무겁겠지.

“웨인. 술 한잔할래?”

“사양하지.”

“그러지 말고.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있으면 풀릴 대화도 풀리지 않을 거야.”

그레이스는 테이블 위에 있던 라 따슈(La Tache) 와인의 코르크마개를 제거했다. 로마네 꽁띠만은 못할지언정 돈이 있어도 쉬이 살 수 없는 고급스러운 술. 두 개의 잔을 쨍 소리가 나도록 한 손에 쥐고 와인을 채워 넣은 마녀는, 잔을 눈높이로 들어 샹들리에 불빛에 유심히 비춰본 후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건배. 우리의 첫 만남을 기념하며.”

내키지 않는 건배에 응하고서, 나는 그레이스에게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다.

“옷은 계속 그렇게 벗고 있을 작정인가?”

“뭐 어때. 이러고 있는 편이 당신에겐 더 안심이 되지 않아? 회로를 드러낸다고 해서 내게 딱히 해가 되는 것도 없고. 내 나름의 작은 호의로 받아들이도록 해.”

그레이스의 자신감은 대마법사이기에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연적인 각성자들과 달리, 대마법사의 회로는 술식 구현의 범위가 바다만큼이나 넓으니까. 단지 보기만 해서는 그레이스가 비장(秘藏)하고 있을 지혜들을 뽑아낼 재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등한 경지인 내가 구조적 완성도를 참고할 입장도 아니며, 설령 참고한다 한들 집적도와 완성도만큼은 전율하는 거인을 능가하는 회로를 분석하는 데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레이스가 가만히 잔을 흔들며 묻는다.

“먼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분명하게 확인하고서 시작할까? 당신이 바라는 건 뭐지?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와 손을 잡으려는 거야?”

“원탁의 파멸. 그리고 그 이후의 삶.”

“그 이후의 삶? 원탁이 사라진 뒤,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의 유이한 대마법사로서 인세의 모든 영화와 권세를 양분하고 싶은 건가?”

“네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다만……. 영화도, 권세도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그러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그저 더는 살해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무방한 여생이 전부다. 나는 스승새끼, 아니, 마스터 크로우허스트 덕분에 눈을 뽑히면 죽는 병신 같은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아-하.”

“……물론, 네가 존재하는 이상 원탁이 무너진 이후에도 완전히 안심하기는 어렵겠지. 원탁이 사라진 뒤의 너는 나 하나만 죽이면 더는 전력공백을 걱정할 이유가 없을 테니.”

“하지만 그 전까지의 협력은 가능할 것이다?”

“네가 바라는 게 나와 같다면.”

“흐음…….”

반 모금의 와인을 머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곧 술을 삼키고서 주향이 달큰하게 밴 숨을 토해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바라는 건 원탁의 파멸이 아니야.”

“이번에도 농담인가?”

“큭. 내가 당신을 너무 놀려댔나?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더 커다란 목표를 꿈꾸고 있거든. 원탁을 파괴하는 건 그 목표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우며 뜻깊은 과정이기는 해도.”

“그 커다란 목표라는 게 무엇이기에?”

“일단은……. 그렇지, 영국이라는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생각이야.”

연분홍빛 입술을 핥으며, 마녀는 내면의 광기가 새어나오는 낯짝으로 말을 이어갔다.

“들어봐. 내가 품은 한은 원탁 하나 치워버린다고 해소될 만큼 녹록하지 않아. 만약 영국을 멸하고서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프랑스의 차례야. 프랑스로도 성이 차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글쎄, 나머지 유럽 전체의 순서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시간이 흐르고서도 여전히 역겨운 내 고향 인도가 될 수도 있겠고.”

“그 나라들을 다 무너뜨리겠다고?”

“모르지. 영국에서 끝이 날지, 아니면 유럽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고도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일지. 다만 내 한이 풀리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죽이고 짓밟고 불태워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꿈꾸는 바야, 웨인.”

“……요컨대 응징을 하고 싶다 이건가? 부당한 영화를 상속받은 자들을?”

“응징?”

마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진심의 색채가 묻어나오는 웃음을.

“아니. 그렇게 고상한 명분은 어울리지 않아. 나는 그냥 내가 혐오하는 것들을 질리도록 죽여보고 싶을 따름인걸. 이토록 명료한 제노사이드가 어떻게 응징일 수 있겠어?”

“말하자면-”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내가 이해한 바를 요약했다.

“말하자면, 네 꿈은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사적보복이자 쾌락살인 즈음이 되겠군.”

“맞아. 그거야. 사적보복이자 쾌락살인. 아주 정확한 표현이네.”

눈웃음을 치며 다시금 혀를 핥는 그레이스.

“미쳤다고 해도 좋아. 처음엔 분명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살다보니 어느새 이런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지.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싫지 않아.”

웃음으로 가려놓은 서늘한 시선은 아까부터 내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뜯어보는 중이다.

“그래서, 감상은? 나와 손을 잡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솔직히 적당히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적당히라면, 어떻게?”

“기본적으로는 세상이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다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어렵게 도달한 평안의 앞 뜨락까지 지저분한 난리들이 밀려오면 달가울 리가 없잖은가. 나는 너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다.”

“그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데?”

“얼마나 부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부수는가의 문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 나머지 세상에 적당한 선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완급을 조절하며 부숴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불편할 일도, 내가 네 앞을 가로막을 일도 없을 거다.”

“아.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란 말이지?”

“그렇다. 그리고 너는 쾌락살인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했지. 헌데 영국의 인구만 따져도 7천만은 되지 않나. 그것들을 다 죽이는 집단살해의 과정을-”

나는 말에 짧은 휴지(休止)를 넣으며 턱짓으로 그레이스가 든 와인잔을 가리켰다.

“지금 그 와인을 마시듯이 섬세하게 음미하다보면, 아마 반의 반도 죽이기 전에 슬슬 물리기 시작하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그럴까?”

“사람이라는 게 보통은 그러하니, 너의 갈증 역시 마찬가지이기를 바랄 뿐이다. 극도로 허기가 진 상태에서는 누구든 절대로 다 먹지 못할 양의 음식에 욕심을 내기 마련이지 않나. 배를 채우고 나면 음식은 자연히 남게 되어있어.”

“만약 당신의 기대가 빗나간다면?”

“그렇더라도, 내 요청을 염두에 두고 서로 다른 맛의 학살들을 꼭꼭 씹어 삼키다보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조절되겠지. 이 정도는 동맹인 나에 대한 성의로 고려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즉,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런 나와 손을 잡아도 상관없다?”

“그래.”

내 단답을 끝으로 실내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그레이스가 낮고 진지한 음성으로 정적을 깼다.

“원탁을 파괴한 후, 나는 연합왕국 전체를 불태울 거야.”

“마음대로 해라.”

“늙은 여왕의 사지를 찢어 트라팔가르 광장에 내걸어도 되겠지?”

“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버킹엄 궁전은 창관으로 만들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불태워버리며, 사원에 묻혀있는 모든 고귀한 자들의 유해들을 파내어 이 대륙의 주술사들에게 주술의 소재로 뿌려주려고 하는데.”

“그것참 신선한 발상이로군. 주술사들이 좋아하겠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왕족과 귀족들을 죽인 다음, 그 시체들을 런던 아이(London Eye/대관람차)에 줄줄이 걸어 돌리는 건 어떻게 생각해?”

“네가 여러모로 학살을 음미할 계획인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마녀가 차근차근 내놓는 말들은, 내 자리에 앉아있는 게 원탁의 늙은이들이었다면 하나하나 격분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반발의 정도를 비교하면, 차라리 근본주의 이슬람 신학자들 앞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를 욕보이는 편이 나을 터.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 손을 짚은 그레이스가, 내 가까이로 코를 가져다대고 주의 깊게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찾는 것은 아마도 분노로 말미암은 심리적 동요의 냄새. 혹은 거짓과 기만으로 인해 짙어지는 긴장감의 냄새.

그러나 나는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는 와중에도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저 그레이스의 계획에 뭉근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따름. 원탁이 붕괴한 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잠시 후, 그레이스는 상체를 뒤로 물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가 승리를 거둘 경우, 황금기의 심장과 정수는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심장은 네가 가지든 말든 알아서 하도록 하고, 정수는 너와 나의 참관하에 로켓에 실어 날려버리든 핵으로 파괴해버리든 하지. 해연(海淵)이나 화산 분화구에 던져버리는 정도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진심이 아니면? 심장은 어차피 너와 나에겐 그리 중요한 물건이 아니잖나. 그리고 정수는 찾지 못할 곳에 던져버리거나 파괴해버려야 내가 안심이 된다. 그걸 내버려두면 네게 쓸데없는 욕심이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황금기의 정수는 황금기의 눈이 아니고선 열람의 어려움이 큰 진리의 보고다. 고로 정수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레이스의 물욕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았다.

원탁을 파괴하고 난 다음이라면, 이 인간 세상에서 그레이스와 내가 힘을 합쳐 추진하는 일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상업로켓 하나를 구한 후 정수를 실어 날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태양에 충돌시키거나 무한한 심우주의 저편으로 날려버리거나 하면 확실한 처리가 될 것이다.

‘핵은, 잘 모르겠군.’

제아무리 황금기의 정수라도 핵에는 당연히 파괴되겠지 싶긴 하나, 우주로 날려 보내는 것만큼 확실하지는 않을 터였다.

“으-음. 솔직히 정수는 다소 아깝지만…….”

마녀의 목적이 승천이 아니라면 정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손끝으로 톡톡 입술을 두드리던 그레이스가 뜸을 들인 끝에 대답했다.

“좋아. 단, 「장엄한 황금의 책」은 내가 가지겠어. 그 책엔 원탁의 늙은이들이 정수를 열심히 더듬은 결과들이 대략적으로라도 기록되어 있을 테니. 그 외의 전리품들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으로 하고.”

“이의 없다.”

“내 동맹이 된 것을 정식으로 환영하는 바야, 웨인.”

“나야말로.”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 피로감이 몰려온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은 긴장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이후 나와 마녀는 상호간의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서로가 서로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으므로, 주제가 바뀔 때마다 매번 첨예한 탐색전을 벌이며 어렵게 어렵게 합의를 도출해야만 했다. 무엇을 제공할 수 있고, 어떤 대가로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으며, 상대가 지닌 역량의 한계는 얼마이고 그 역량은 어디서 나오는지를 헤아려나가는 과정.

그러던 중에 마녀가 격렬한 반응을 드러낸 소재가 하나 있었으니, 조금씩 시큰둥해지는 청자를 보고 내가 다소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꺼낸 「라즈베리 프로젝트」였다.

청자는 폭소를 터트렸다.

“개애미? 개애애애애미? 하하, 아하하하!”

“비웃는 건가?”

“비웃어? 내가? 절대로 아니야!”

그레이스가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

“최고야! 신선해!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발상이고, 당장이라도 인수해버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프로젝트야! 그 좋은 걸 왜 런던에서만 쓰려는 거지?”

“오해하지 마라. 런던에서 쓰는 것도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를 위해 준비한 예비 공격계획에 불과해.”

“됐고. 그 계획에 관한 자료, 혹시 지금 바로 볼 수 있어? 얼마나 진행된 상태지? 제발 아직 구상 단계일 뿐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

“…….”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가져다달라고 요구했다. 그레이스가 들뜬 지시를 내리자, 이 응접실의 대화를 엿듣던 그레이스의 딸들 가운데 하나가 러기드 노트북을 가지고 나타났다. 노트북을 두고 물러가며, 마녀의 복제체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반씩 뒤섞인 시선으로 나를 훔쳐보았다.

나는 노트북으로 이번 회담을 위해 미리 준비한 토르(Tor) 네트워크 히든 서비스의 주소에 접속했다. 각각의 자료마다 다른 주소와 암호를 부여해 두었으므로, 지금 접속한 주소에 있는 것은 「라즈베리 프로젝트」의 브리핑 자료가 전부였다.

수연 녀석의 지도하에 비서실이 제작한 자료는, 민감한 데이터를 담지 않았음에도 그 진위를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걸 보여준다는 건, 단순히 개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는 이쪽이 쉽게 따라 하지 못할 것을 자신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레이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미들에게 먹이거나 묻히기 좋은 균주의 개발, 개미들의 개체 수와 확산 시기를 조절하는 노하우, 그리고 거기에 최적화된 운반 캐니스터를 완성하는 건 예상보다 많은 인력과 비용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도 완벽하다고 하기는 어렵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개미들의 활동성과 공격성을 자극하기 위해 제작한 페로몬 대응 술식이 있다. 나는 쉽게 만들었지만, 황금기의 눈이 없는 너로서는 모방이 불가능한 영역이지.”

이 말을 듣고 그레이스는 또 한 차례 폭소를 터트렸다. 아까보다 더욱 크고 본격적인 웃음을. 그렇게 한참을 웃어젖힌 뒤에, 그레이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개미를 자극하는 마법이라니. 이제야 겨우 확신이 서네. 너는 크로우허스트가 아니야. 그 꽉 막힌 대가리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알아주니 고맙군.”

이게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나를 방심시켜 틈을 엿보려는 또 한 번의 시험일까. 설령 내 알맹이가 크로우허스트라 한들 원탁을 무너뜨리기까지는 협력이 가능하니, 그 이후를 대비하여 벌써부터 방심의 기초를 쌓아두려는 수작질일 수도 있겠지.

“있잖아, 한 가지 그쪽이 도와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뭐지?”

“나, 당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생체인형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어.”

“…….”

“당신처럼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유능한 인간의 씨로 자아가 있는 인형을 만들면, 그건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거든. 비록 기억 전사(傳寫)에 쓸 기성품이 없기는 하지만, 조금만 공을 들이면 무언가 특출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억을 전사한다는 표현으로부터, 나는 내가 예전에 그레이스의 복제체 생산에 관해 짐작했던 바가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딸들에게 부여한 식별번호가 한없이 부풀리기만 한 허상은 아님을, 즉 자신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과시하려 끼워 넣은 정보일 테지.

그러나.

‘이 여자, 지금 복사의 토대가 되는 제 딸을 두고 ‘기성품’이라고 부른 건가?’

나는 스멀스멀 거부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식을 도구로 취급하는 광기도 광기지만, 내 유전자를 재료로 삼겠다는 부분이 특히 더 거북했다.

내게 가족은 없어야 한다. 당연히, 내 피를 받은 자식도 없어야만 한다.

“거절한다.”

“혹시 그거 알아? 원탁이 멕시코 성전기사단 카르텔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려 했었다는 거. 그건 내가 알기로 전투목적 복제체 생산의 재료를 수집하는 광범위한 작전의 일환이었어. 그때는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지만.”

“내 말 듣고 있나? 거절한다고 말했다.”

“거절? 어째서?”

“나는 피가 이어진 자식을 만들기가 싫다.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싫고.”

“겨우 그런 이유만으로 동맹이 요청하는 첫 번째 협력에 응하지 않겠다고?”

“그걸 ‘겨우’라고 말하는 건 너의 가치판단이겠지.”

“흐음.”

팔짱을 끼고 갸우뚱 나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입가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이윽고, 미친 마녀가 교태와 온기가 빠진 건조한 음성으로 하는 말.

“웨인. 닥치고 정액이나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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