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13화 (313/561)

#34. 웨인과 웨이네타 (11)

나는 그레이스와 만나기 전까지의 여백을 빡빡하게 활용했다.

먼저 이링가에서는 그간 위장임무를 수행하며 식별한 원탁의 수색견들을 척살했다. 나와 내 애들의 전격적인 개입은, 봉쇄된 도시의 음지에서 첨예하게 탐색과 대치를 이어가던 양대 진영의 균형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변수였다.

한편 그레이스의 아랫것들에겐 다양한 형태로 호의를 전했다. 그들의 거점에 그들도 모르게 보급물자를 가져다 놓거나, 원탁의 끄나풀들에 대한 정찰정보를 제공하거나, 평화유지군의 기밀을 유출해주는 등.

특히 평화유지군에 속한 각국 부대들의 통신비문(Signal Operating Instructions)은 김연화 같은 트로이의 목마로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기밀이었다. 무선호출부호, 주파수, 암호화에 사용하는 코드, 그날그날 바뀌는 암구호 등등.

나로서는 그저 각국 주둔지 근처에서 눈으로 보고 옮기기만 하면 그만인 정보일 뿐이지만, 그레이스가 대국을 짜는 데엔 아주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당소 스토커 5-1. 탱고 위스키의 냄새가 납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선물’ 전달 작업 도중, 넓게 퍼져 주변경계를 맡고 있던 부하들 중 하나로부터 무전으로 들어오는 보고.

스토커라는 콜 사인은 경태가 특유의 장난기를 발휘하여 붙인 것이었다. 마녀의 세력을 몰래 쫓으며 호의를 전하는 모양새가 스토커와 비슷하지 않느냐면서.

그리고 탱고 위스키는 표적(Target)의 두문자 T와 마녀(Witch)의 두문자 W를 군용 음성부호로 이어 부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도시에 배치된 그레이스 복제체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중이라는 뜻.

체취를 제거하는 건 사냥꾼과 사냥감의 기본적인 덕목이지만, 전장에서의 관리가 언제나 완벽하기는 어렵다. 탈취제의 효과는 격렬한 활동을 할수록 빠르게 사라지는 데다, 무기·탄약·식량 등에 비해 우선순위가 낮은 물자를 제때제때 보급해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방금 보고를 한 부하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 나는,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다가오는 악마숭배자들의 전투단을 포착할 수 있었다.

불투명한 수녀복을 입고 있었던 596과는 달리, 전투단을 이끄는 그레이스 복제체는 영의 회로가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그 수녀복 같은 물건이 흔하진 않은 모양이지?’

한 가지 더 깨달은 게 있다면, 복제체들의 회로가 모두 같은 수준의 완성도를 지닌 건 아니라는 점. 지금 보이는 복제체는 마법사로서의 잠재력이 596에 미치지 못했다.

특별히 더 공을 들여 낳은 딸들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인지.

331의 냄새를 각인시킨 부하들의 후각은 내 피로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구밀도가 낮은 야지에서라면 모를까, 사람이 많은 시가지 내부에서 킬로미터 단위로 감시를 유지하는 건 솔직히 조금 피곤한 일이었으니.

나는 무전으로 지시했다.

“작업 중지. 이만 물러난다.”

악마숭배자들의 거점에 선물상자들을 채우던 부하들이 신속하게 물러났다. 작업을 지휘하던 경태는 거점 앞마당에서 얼떨떨하게 지켜보던 ‘집주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배달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좋은 물건들로 엄선해서 꽉꽉 눌러 담았으니 즐겁게 받아주시고,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도 즐거운 인연으로 다시 만납시다. 오케이?”

“오, 오케이…….”

“오케이! 땡큐! 그럼 바이바이!”

경태는 집주인의 자녀들에게 초코바를 하나씩 던져주고서 작업현장을 이탈했다. 나머지 부하들 또한 압수했던 무기들을 집주인의 이웃들에게 돌려준 후, 원활한 무선통달을 위해 배치했던 중계기들을 회수하여 경태를 뒤따랐다.

내가 확인한 바, 악마숭배자들의 거점은 이처럼 주술사 왕 신앙에 경도된 현지 주민들의 협력을 받아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도 총책을 중심으로 지역 커뮤니티 기반 연락망을 형성한 후,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둥지를 바꿔대는 것이다.

배신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는 역시 마약이다.

경구로 복용하는 마약정제들은 주술사 왕의 비약으로 둔갑하여 주민들에게 주어졌다. 가뜩이나 주술을 경외하는 자들이 비약의 ‘영험한 효과’까지 경험해버리면, 위대한 주술사를 배신하는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거점으로 들어선 그레이스의 딸은 선물상자들을 보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상자의 겉면엔 「From W, To W」 일곱 글자가 스프레이로 휘갈겨져 있다. 이 또한 경태 녀석의 소행이기는 마찬가지. 나는 이것까지 보고서 비로소 거점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경태는 이러한 활동에 앞서 한 가지 가벼운 우려를 제기했었다.

“형님의 의도는 알겠습니다만, 저쪽에서 이걸 티배깅으로 느끼면 어떡하죠?”

“티배깅이 뭐냐?”

“아, 티배깅 모르시는구나! 이게 또 이 김경태가 선정한 「형님께서 젊게 살기 위해 아셔야 하는 신세대의 언어 1000선」에 들어있는 슬랭(Slang)인데 말입니다. 본래는 티백을 찻잔에 넣었다 뺐다 하는 모양새에서 착안해서 구강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쓰이던 것인데, 게임 같은 데서 쓸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요컨대 상대가 자칫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사업적인 자기 PR은 다소 자극적이어야 할 때도 있는 거지.’

이 건에 대해서 그레이스는 어디까지나 보고를 받는 입장일 뿐이고, 이 도시에 배치된 칠각기사단의 전력은 최정예라고 하기는 어려운 자들일 터.

따라서 나는 이 도발적인 능력 어필로 그레이스에게 모욕감을 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고, 경태도 내 답을 듣고는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사전에 검토한 가능성이 하나 더 있기는 했다. 이쪽이 과시하는 정보수집 및 전장감제능력의 탁월함이, 황금기의 눈에 대한 그레이스의 물욕을 비등케 할 가능성.

그러나 그레이스와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면, 이쪽이 지닌 역량은 언제고 다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 그럴 거라면 차라리 지금부터 간을 봐두는 편이 나으리라는 게 내가 내린 판단이었다. 정 틀렸다 싶으면 너무 늦기 전에 손절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만에 하나 그레이스가 나를 잡아먹을 마음을 품는다면, 그때는 그만큼 만만한 모습을 보인 나 자신부터 원망해야 할 것이다.

이링가 다음은 다르에스살람과 바다에서의 활동이었다.

「탱고 위스키」의 냄새는 항구도시에서도 감지되었다. 331의 체취를 각인시킨 부하들을 수연에게 따로 떼어준 보람이 있어, 수연은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악마숭배교단의 움직임을 포착한 상태였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다 보니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내가 시간을 절약하는 데엔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위장신분의 소재에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잡은 일정은, 미국이 해적들에게 나포당한 전함 「미주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십시오! 이번 참사의 책임은 의회에 있고, 유럽에 있고, 세금 낭비와 장병들의 희생으로 자기네들의 커리어를 쌓고 싶어 하는 몰지각한 실무자들에게 있습니다!」

전함 탈취의 책임을 두고 백악관의 미치광이가 분노에 차서 늘어놓은 자기변호. 나는 이를 헌터 단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나를 증오하는 자들로 가득한 언론은 미주리의 단독 파견이 내 결정이었다고 떠들어대는데,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바랐던 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이나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대체 우리가 왜 아프리카에 군사적으로 개입을 해야 합니까? 왜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병력과 군함을 보내어 유럽 국가들의 밥그릇 지키기를 도와줘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쓸데없는 혈세 낭비를 막고, 또 장병들의 무가치한 희생을 막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개입주의자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죠. 이들이 하는 소리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결코 다시 전쟁! 결코 다시 전쟁!」

「묻겠습니다. 우리 미국이 냉전 이후 그 잘난 ‘군사적 개입’을 해서 궁극적으로 국가와 시민들의 이익이 된 경우가 있기는 합니까?」

「걸프 전쟁? 물론 위대한 승리이기는 했죠. 하지만 정치인들의 영광은 시민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 전쟁으로 미국이 얼마나 막대한 재정적자를 얻었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경제는 그때부터 심각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이겁니다!」

「이라크 전쟁은 어땠습니까? 그건 영광의 한 조각조차도 없는 끔찍한 실패였습니다.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영향력은 영향력대로 깎아먹은 데다, 중국과 이란은 아주 살판이 나버렸어요.」

「최악 중의 최악은 아프가니스탄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퍼부은 예산이 얼마이며, 그 황량한 땅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또 얼마란 말입니까? 헌데 그 결과로 우리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이만큼 겪어봤으면 아무리 바보라도 슬슬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적 개입이라는 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는 군대도 군함도 보내기 싫었어요! 그런데도 특수부대를 보내고 전함도 보내고 한 건, 나와 내 사람들이 전쟁광들을 말리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군사적 개입의 규모와 예산을 줄이고 또 줄이라고 요구해서 미주리가 홀로 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애초에 보내자고 한 인간들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미국이 삽질을 하게 된 경위를 짐작하기 충분했다. 아마도 진실은 뉴스 보도와 백악관 미치광이의 자기변호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겠지.

해적제독 말라크 하산은 나포한 전함을 이곳 다르에스살람으로 끌고 오는 중이었다. 전함을 실제로 운용하고 있는 건 물론 포로로 붙잡힌 기존의 승조원들일 테지만, 해적들이 최소한의 운용기술을 습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해적제독이 주술사 왕의 동맹자라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인질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격침시키기도 곤란한 전함이 다르에스살람 앞바다를 봉쇄해버리면, 탄자니아 방면의 평화유지군은 더 이상 보급만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부포만 갈겨대도 감당이 안 될 테니.’

복잡한 탄도계산 따위 집어치우고 대충 육안관측으로만 쏴도 항구를 마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그래서 다르에스살람 인근 해역엔 다양한 국적의 전투함과 무장여객선들이 집결해있는 상태였다. 개중엔 당연히 영국 왕립해군에 속한 것들도 있었으므로, 내게는 마녀와의 회담에 참석하기 전 추가로 PR을 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마침 고래의 공격을 연출하기에 좋은 핑곗거리도 주어진 참이다.

그 핑곗거리란, 각국의 군함들이 해적들의 수중침투를 경계하느라 불가피하게 사용하고 있는 능동형 음파탐지기(액티브 소나)의 소음.

현 시점에서 각성체 고래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켜야 한다고 알려진 안전수칙들을 중요한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

「선상에서 일본어, 노르웨이어, 아이슬란드어, 그리고 노르웨이어 및 아이슬란드어와 유사성이 높은 북게르만어군의 고위험 언어 사용을 자제할 것.」

「고래를 공격하거나 고래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 선박의 동형함들은 개수를 통해 음문(音紋/선박 고유의 음향적 특성)을 바꾸기 전까진 항해를 자제할 것.」

「어군탐지기와 군용 소나를 불문하고 모든 형태의 능동형 음파탐지장치 사용을 자제할 것.」

「일본 근해, 노르웨이 근해, 아이슬란드 근해 및 과거 포경선단의 주 활동영역이었던 고위험 수역의 출입을 자제할 것.」

「항시 일정 규격 이상의 크립 밸러스트(마력장 형성을 위해 불사암을 채워놓은 컨테이너)를 적재할 것.」

「중대형 선박들은 엔진의 저주파 소음을 안전 수준 이하로 유지하거나 적극적인 소음 저감 조치를 취할 것.」

민간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게 출력이 높은 군용 음파탐지기는 예전부터 고래들의 집단적인 표류와 죽음(스트랜딩 데스)을 유발하는 원인이었다. 생체적인 음파탐지로 방향을 잡는 고래들이, 강렬한 인공음파에 노출되어 감각장애를 겪는 탓이다. 그것은 때로는 영구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숫자가 늘어만 가는 각성체 고래들은 능동 소나의 음파에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강화된 감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게 무엇인지 깨닫기라도 한 듯이.

학자들은 이를 무리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스트랜딩 데스에 면역이 없는 비각성체 고래들을 지켜주기 위하여, 무리와 가족의 잠재적인 생활권 전체에서 ‘해로운 소리’를 제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공격성을 드러내는 각성체 고래들 중엔 일본열도의 재앙, 「와다츠미 키요우타마히코」가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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