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웨인과 웨이네타 (10)
그레이스와 그레이스 복제체가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다면, 그리고 복제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육체적인 변이나 결함을 얻지만 않았다면, 원본과 사본의 목소리는 유전자가 그러하듯 완벽하게 동일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내가 위성전화를 통해 듣는 그레이스의 육성은 북미의 안개 낀 포플러 숲에서 들었던 596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감이 있었다. 우선은 추적 방지 릴레이를 끼워 넣느라 불가피하게 저하된 통화품질을 탓해야 할 터이나, 주의해서 들어보면 기본적인 음색 자체는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체감하는 차이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여유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고양이는 잘 받았어.」
마녀는 나른하면서도 고혹적인 어조로 말했다.
「물건의 상태도 좋고, 빠른 일처리도 인상적이네. 이제껏 남자에게 구애를 받은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선물은 처음으로 받아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해두고 싶어.」
이 간질간질한 나긋함은 마녀가 긴 세월에 걸쳐 갈고 닦아온 무기일 터였다. 반세기도 더 전에 자신의 매력을 무기로 대마법사를 잡아먹은 여자이지 않은가.
「그거 알아? 내가 당신을 시험한 건 이번이 두 번째라는 거.」
“두 번째라고? 첫 번째는 뭐였지?”
「당신의 부하들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남겼던 이 전화. 먼젓번에 전원을 켰을 때, 당연히 위치를 추적해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권민호 이하 4인의 죽음을 상기한 나는,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와중에도 심저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자산손실에서 기인하는 공허한 상실감과, 숯불처럼 뭉근하게 타오르는 화기가.
그 탓에 나는 반박자쯤 늦은 대답과 반문을 돌려주었다.
“……그랬지. 콩고 민주공화국 중서부, 일레보 외곽의 기름야자 농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그게 시험이었나?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 아니라?”
이에 수화기 너머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정이라. 그래, 그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네. 결과적으로는 둘 다였던 셈이지.」
“혹시 그 근처에 원탁의 세력이 있었던 건가?”
「당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남자로구나.」
요컨대 당시 콩고 민주공화국 중서부에서 원탁의 일익과 대치하고 있던 그레이스는, 내게 위치정보를 흘렸을 때 원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본 것이었다.
내가 제3자를 가장하여 접근한 원탁의 끄나풀이라면, 당연히 제국주의자들의 기동타격대가 기름야자 농장을 습격해올 테니까.
물론 농장에 나타난 게 나와 내 부하들이었던들 그레이스는 어쨌든 공격부터 하고 보았겠지.
‘아니면 기존에 확인해두었던 원탁의 세력을 추가로 유인하여 반응을 살피거나.’
만약 양측이 같은 진영이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신을 낚으려는 계략을 간파했으니 좋은 것이고, 양측이 다른 진영일 경우에도 차도살인을 펼치는 셈이니 그 역시 나쁘지 않은 결과다.
나와의 협력은 그렇게 내 진의와 실력을 검증한 이후에 고려해도 늦지 않다…… 라는 게 그레이스의 계산이었을 터.
「자, 웨인. 이쯤에서 우리가 한번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 당신도 분명 같은 마음이겠지? 눈으로 확인을 해봐야 안심이 되는 건 나보다는 당신이 더할 테니.」
“그쪽이 거북하지만 않다면.”
「좋아.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정해도 괜찮겠어?」
“말해봐. 듣고 판단하겠다.”
「현지시각으로 6월 27일 오후 9시, 다르에스살람 국립의료연구원 앞 해변 공원으로 나와. 그곳의 안테나 타워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안내인이 당신을 찾아갈 거야.」
“잠깐. 그런 식의 초대는 내게 위험하지 않나?”
「이런……. 너무 까다롭게 구는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어.」
짐짓 투정을 부리듯 말을 잇는 그레이스.
「그리고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를 상대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있을 장소를 미리 알려주었다가 당신의 마음이 변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건 투시력이 있는 당신이 양보해줘야 하는 문제라고 봐.」
“……알겠다. 그쪽의 뜻에 따르지.”
「잘 생각했어.」
“그런데 다르에스살람으로 괜찮은 건가?”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고, 그곳에서라면 나나 당신이나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울 테니까. 바다가 가까우니 여차할 때 추적을 따돌리기도 좋지. 내게는 좀 멀다는 게 단점이긴 해도.」
다르에스살람은 아프리카 동부 평화유지군 세력의 핵심 거점인 만큼, 그곳에 파견되어있는 원탁의 세력이 없거나 약하더라도 대마법사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실력을 행사하기가 곤란하리라는 말이었다. 아예 못할 건 없을지라도 뒷감당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 어쩐지 어색한걸.」
“무엇이?”
「나와 대등한 누군가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말이야.」
“…….”
「짐작하겠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거든. 어색하면서도 생경한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싫은 기분만은 아니야.」
이는 아주 작은 조각으로나마 그레이스의 진심이 들어있을 법한 말이었다.
마녀가 평소 누구와 이 같은 대화를 하겠는가. 소모품에 불과한 자식들? 똑같은 소모품이면서 가치는 더욱 낮고 광신에 사로잡혀있기까지 한 악마숭배교단의 추종자들?
그러나 진실을 뒤집어쓴 거짓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형태의 거짓이며, 도구적으로 끌어내는 공감대는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꾼들의 지혜다. 아마도 그레이스에겐 684를 통해 내 과거사를 듣고 기대한 바가 있는 게 아닐는지.
나는 조금 날카롭게 나오려는 말을 한 번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불쾌한 떠보기는 그만해주었으면 좋겠군.”
「너무하네. 알고도 속아주는 게 숙녀에 대한 신사의 매너인데.」
“기분 나쁜 농담도 그만두고. 혐오스러운 섬나라 놈들과 원수를 진 처지에 신사 운운하는 소리를 할 생각이 드나?”
「큭큭큭…….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지금 그 혐오스러운 놈들의 언어를 써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지. 안 그래?」
“원한다면 이후로는 다른 언어로 대화하지.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는 어떤가? 러시아어도 나쁘지 않겠고. 그쪽이 구사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됐어. 그것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인걸.」
살짝 힘을 주어 말하는 역겨움엔 아까보다 훨씬 알기 쉬운 진심이 녹아있었다. 나는 일본어나 중국어 따위를 추가로 주워섬기지 않았다. 이것들이라고 역겹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혹시 나에 대해 궁금한 건 없어?」
“궁금한 것?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해주기는 하나?”
「으음, 너무 민감한 질문만 아니라면?」
“무슨 생각이지?”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 받은 게 있으니 약간은 돌려줄까 싶을 뿐이야. 위험을 감수하고서 먼저 다가와준 것은 당신이고, 신뢰를 사기 위해 먼저 성의를 표한 쪽도 당신이며, 우리의 만남에 있어서 작은 양보를 해준 것도 역시 당신인걸. 사소하게는 조금…… 보상을 해줘야 할 일도 있고.」
“보상을 해줘야 할 사소한 일?”
「응.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내 애들이 당신의 부하들 넷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넣었잖아?」
“……그랬지.”
「결과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리고 당신 역시 필요해서 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제부터 서로의 개나 고양이를 죽여도 사과를 해야 할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까. 당신을 잠재적 동맹자로서 존중하려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라.」
“사람 넷의 ‘사소한’ 목숨값으로 질문 몇 개를 받아주다니. 관대하기도 하시군.”
「이런. 죽은 개들이 제법 비싼 품종들이었나 보네. 미안, 미안.」
수화기 너머로부터 작은 웃음소리가 넘어온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비꼬지는 마. 혹시 또 알아? 내가 정말 목숨값으로 칠 만한 질문들에 대답을 해줄는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입장에선 딱히 물어볼 게 마땅치 않았다.
그레이스가 알고 있을 원탁의 현황에 대한 정보엔 물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건 동맹이 성립한다면 공조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공유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때 가서도 공유를 거부할 정보라면 지금 물어본다고 답해줄 리가 없다.
그레이스 자신이나 자신이 거느린 세력에 대한 상세 또한 마찬가지. 동맹이 최종적으로 성립하지도 않은 지금 알려줄 정보들이 동맹 성립 이후에 받을 정보들 이상으로 질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고로 지금 그레이스는 화사한 언변과 실속 없는 성의로 명목상의 부채를 청산해두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속내를 헤아리면서도, 나는 그레이스에게 어울려줘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제까지의 빚은 그냥 없는 셈 칠 테니 동맹이나 맺자는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가볍게 하나만 묻지.”
「겨우 하나? 뭔데?」
“네가 주술사 왕으로서 진행 중인 이링가 공략에 대해서다. 이제 열매가 무르익어 거두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데, 언제 수확을 할지 구체적인 시점을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그 시점이 너와 나의 회담 이전이라면 나도 처리를 앞당겨야 할 일들이 있어서 말이지.”
「아아, 이링가. 그러고 보면 내 딸이 당신을 만난 장소도 그 도시와 가까운 곳이었구나.」
다시금 웃음을 흘리는 그레이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도시를 그렇게 하루 이틀 사이에 공략할 마음은 없으니까. 왜냐면, 음…….」
“……?”
「으음, 그래, 이 정도의 작전정보 유출은 감수해야 내 나름의 성의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도시의 낙성은 내 추종자를 위해 꾸며진 하나의 무대이기도 해. 단순히 떨어뜨리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지금껏 시간을 끌지도 않았을 거야.」
“추종자를 위한 무대라고?”
「맞아.」
“그 추종자라는 게 혹시 주술사 김연화인가?”
「어머나. 어떻게 알았어?」
“……네가 그 미친년을 거두었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기껏 그런 폭탄을 심어놓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게 이상했지. 추종자의 추종자들을 패잔병 사냥에 동원하고, 보급품을 미리 숨겨놓은 게 전부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무엇을 꾸미고 있을 것 같아?」
“그걸 지금 나에게 묻는 건가?”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웨인 당신이 스스로 생각해서 내 구상에 닿을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대국을 보는 안목이 비슷하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그만큼 마음이 맞는 동맹이 되어줄 수 있겠지.」
“목숨값에 대한 보상을 참 자기 좋을 대로 치르는군.”
「그러지 말고, 당신이 나라면 내가 쥔 카드를 어떻게 쓸지 상상해봐. 어서.」
“상상할 것도 없다.”
나는 한숨을 담아 말했다.
“이제 와서 봉쇄를 물리고 도시의 구원자로 만들어주기엔 전략적 차원의 기회비용 낭비가 너무 크니, 당장 트로이의 목마로 써먹을 요량이 아니라면 남는 건 목마로서의 가치를 더 키우는 일밖에 더 있나? 평화유지군이 도시를 포기할 때, 대대적인 철수와 피난 과정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하도록 만들어줄 작정이겠지.”
「오, 이런.」
“틀렸나?”
「아니. 정답이야. 아까도 느꼈지만, 당신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 남자로구나. 점점 더 마음에 들어.」
요컨대 그레이스는 김연화를 이링가의 모세로 띄워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아프리카 판 덩케르크 철수를 성공시킨다 해도, 병력과 민간인들이 몸만 간신히 빼내는 수준이 될 테고, 그렇게 탈출한 인원들은 전력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보급체계에 부담만 주는 짐덩이로 전락할 게 뻔했다.
「참고로 말해두겠는데, 약속 날짜 전까지는 이링가만이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의 공세도 자제할 거야. 그쪽의 자산이 어디에 얼마만큼 있는지를 모르고, 또 동맹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전쟁계획을 많이 열어 보이기도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런가. 배려 고맙군.”
「자, 이 건은 이 정도로 해두고. 또 궁금한 건 없어?」
“없다.”
「정말로?」
“기왕 만날 약속을 잡았으니 지금 길게 떠들어서 뭐하겠나. 더 진정성 있는 대화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나누도록 하지.”
「큭큭. 그래. 역시 그 눈으로 보면서 진위를 판단하고 싶다 이거지? 그 눈으로 사람을 어디까지 헤아릴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걸? 그런 식으로 쓴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는 물건이라.」
그레이스가 자그맣게 웃으며 인사말을 남긴다.
「그럼 전화는 여기서 끊겠어. 우리가 만날 날이 기다려지네.」
“그때까지 별일 없기를 바란다.”
「당신도.」
전화 연결이 끊어진 뒤, 나는 줄곧 한계까지 당겨져 있던 신경을 긴 날숨과 함께 한 올 한 올 이완시키며 생각했다.
과연 이 마녀는 내가 크로우허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었을까?
핵폭탄은 내가 원탁과 같은 편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선물이었지만, 내 의식과 영혼의 정체성까지 증명해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