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웨인과 웨이네타 (2)
온 세상의 이목이 봉쇄당한 도시 이링가에 집중되어 있을 때, 주술사 왕의 코끼리는 북쪽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탄자니아 연방의 수도 도도마를 강습했다.
왕의 군세가 이링가에 가한 공세의 이면에 「그레이스 자신이 직접 출전하기 전 원탁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으리라는 경태의 통찰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주술사 왕의 친정엔 천기(天氣)도 뒤따랐다.
탄자니아의 6월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 지난달 중순부터 중부 고원에 떨어진 비가 단 한 방울도 없었던 상황에서, 따가운 태양 아래 바싹 말라붙은 토양은 거대한 모래폭풍을 잉태하기 충분한 환경이었다.
이 일대는 예전부터 모래폭풍이 잦은 지역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기대했는지, 그레이스는 추종자들의 입을 빌려 일찌감치 참언(讖言) 하나를 풀어놓은 상태였다.
「가장 위대한 주술사의 분노는 하늘을 가리는 모래폭풍과 함께 찾아오리니. 그때에 이르러 왕에게 항거하는 자들은 모두 심장이 꿰뚫려 죽을 것이며, 그들의 영혼은 폭풍이 몰아온 어둠으로 말미암아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헤매는 망령으로 전락하리라.」
폭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흔한 헛소문 중 하나로 끝날 것이로되, 폭풍이 실제로 일어나면 엄청난 이득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어찌 되었든 그레이스로선 손해를 볼 일이 없는 책략이자 심리전이었던 셈.
내가 일찍이 홍콩 남쪽의 작은 까마귀 섬에서 국지적인 열대요란(熱帶搖亂)을 빚어냈듯이, 대마법사는 환경적인 조건이 갖춰질 경우 대단히 강력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
폭풍 속 비산한 모래 알갱이들이 서로에 대한 마찰로 말미암아 상대적 음전하(陰電荷)를 띠게 된 환경 속에서, 그레이스는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번개의 화신으로 연출해냈다.
수백 발의 벼락을 내리꽂으며 전투코끼리를 타고 전장에 강림하는 주술사 왕의 위엄 앞에, 수도를 지키던 탄자니아 유일의 기갑여단은 총알 한 발 쏴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 모든 과정은 그 현장에 있던 CNN 종군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누군가는 항복을 하고, 누군가는 신을 경배하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다시 누군가는 혼절을 하여 쓰러지거나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거나 하는 모든 과정들이.
평소 어떤 전장에서도 침착하기로 이름이 높았다는 기자마저, 마치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헐떡임을 곁들여 떠들어댔다.
「오, 신이시여……. 시청자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가면을 쓴 주술사 왕이, 코끼리를 타고, 저 높은 곳에서부터…… 맙소사……. 찰스, 나 지금 너무 무서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 부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이 영상은 이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는 범람을 야기했다. 도도마 인근에 주둔하던 모든 방어부대들이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연쇄적인 붕괴에 휘말린 것이다.
그리하여 이젠 납치당한 전파(Broadcast signal intrusion)에서만이 아니라, 탄자니아 연방의 공영방송 채널에서도 주술사 왕의 변조된 육성이 흘러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활이요 너희는 화살이라. 내가 오늘 너희를 쏘아 예정된 승리를 거두었나니, 너희가 악한 자들의 심장을 꿰뚫어 그들의 피를 나의 제전에 바침은 곧 나의 기쁨이요 너희의 기쁨이며 장차 낙원을 맞이할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기쁨일지라…….」
덕분에 이링가 시의 분위기는 심연의 밑바닥으로 처박혔다. 광대한 모래폭풍의 한 자락이 이곳까지 밀려든 가운데, 낮에도 어두침침한 시가지는 분노하거나 절망하거나 겁에 질린 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꼭 요즘 한국 주식시장을 보는 것 같지 말입니다.”
세태를 평하는 경태의 말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주식시장이 왜?”
“하루가 다르게 바닥에는 더 깊은 바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이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 하고 손절을 미루다가 더 큰 손해를 보는 투자자들이랑, ‘여기서 더 악화되지는 않겠지-’ 하고 버티다가 더 물러날 데도 없을 만큼 몰려버린 평화유지군의 모습이 많이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
경태의 말처럼, 이링가 시가 막 봉쇄되었을 때부터, 평화유지군과 다국적 헌터단체들 사이엔 다소의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철수를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자들이 있었다.
연료 부족으로 장거리 기동이 불가능한 정규군의 장비들을 모조리 파기하거나 유기하고, 챙겨가지 못할 물자들도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처리해버리고, 어떻게든 몸만이라도 빼내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제는 다 무의미해지고 말았지만.
‘그런 주장을 각국 정규군이 받아들일 리가 있나.’
프랑스가 배치한 전차만 하더라도 대당 가격이 4백만 달러를 넘어간다. 그런 값비싼 장비들을 싹 다 내팽개치고 철수하자고 했으니 먹힐 턱이 없었다.
하물며 그렇게 철수하는 과정에서 다대한 병력손실이 발생할 게 뻔하였음에야.
전쟁에서의 손절은 주식시장에서의 손절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거기에 여러 투자자들의 합의가 필요하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여하간, 봉쇄도시에 밀어닥친 모래폭풍은 기껏 만든 간이 활주로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가뜩이나 심각하던 물류 부족 사태가 한층 더 악화되고, 교민들을 실어 나르고자 기다리던 각국 공군의 수송기들마저 지상에 발이 묶인 상황.
하지만 제트 바이크나 드론 바이크를 모는 각성능력자들은 오히려 평소보다 많은 소티(Sortie/출격횟수)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모래폭풍으로 시계(視界)가 크게 제한된 지금, 대공미사일 공격을 당하거나, 대공포 사격에 노출되거나, 왕의 공중기병들에게 요격을 당하거나 할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졌기 때문.
특히 추력기관의 구조가 단순하여 이물질 유입에 따른 고장 우려가 적고 가속력이 탁월한 제트 바이크는, 거친 모래폭풍을 관통하는 비행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탈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시를 위한 보급추진 임무를 기꺼이 수탁했다.
이제까지 나와 내 애들은 불가피하게 성가신 상황에 말려드는 감이 컸다. 한국정부와 계약한 공능법인이라는 위장막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주의자들과 악마숭배자들의 동향을 은밀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주어진 배역을 뒤집어쓴 채 상황을 치켜보는 쪽이 유리할 터이므로.
이렇게 역할극을 수행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작은 사냥의 기회가 하나 얻어걸리기도 했다.
「피에르프란체스코가 오늘 밤 아들과 함께 이링가를 탈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수연이 오늘 일찍 스텔라 포르투나에서 전해온 전언.
「이번 모래폭풍이 도시를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한 모양이더군요.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가 참여하는 공중 보급수송 에스코트 미션에 끼어 음테메레 게이트 물류집적소까지 이동한 후, 그곳을 거점으로 지휘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방침입니다.」
“그래? 이번에도 저가 스스로 가져다 바친 정보인가?”
「예.」
“다른 말은 없었고?”
「그 외엔 평소처럼 시시한 치근덕거림이 전부였습니다. 간만에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는 셈인데,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면 둘이서 술이나 한잔하지 않겠느냐거나……. 아무튼, 형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언제나처럼 고생이 많았다.”
「별말씀을.」
“그 귀찮은 놈을 상대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
「처리하실 겁니까?」
“좋은 기회니까.”
전문 인력을 불러들여 수연 녀석의 업무 부담을 경감시킬 방법을 찾아보려 했건만, 결국은 이렇게 또 내가 직접 손을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경태는 피에르가 ‘사망 플래그’인지 뭔지를 제대로 세웠다며 즐겁게 웃어댔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내가 여기서 무사히 돌아가면” 운운하는 말 자체가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문화적 클리셰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슥 지우며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님께 그렇게 귀찮게 굴었으니 이 김경태가 친히 좆 대가리를 잘라줘야죠. 잘라낸 건 웰던으로 구워서 개먹이로 던져주고.”
어조와 생체신호를 보아하니 그냥 해보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곧바로 죽여 버려선 곤란하다. 여전히 이탈리아에 있다는 대지휘관 발다싸레를 끌어낼 미끼로 써야 하니까.
그레이스와의 대면을 앞둔 지금, 발다싸레가 간직하고 있을 인형술사의 흔적과 유산들은 내가 그레이스에게 제시할 경력의 물증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발다싸레와 피에르 그 자신들도 살아있는 증거가 될 자격이 있겠고.
그렇다고는 해도 마지막엔 결국 죽여서 처리해야 할 놈들이기는 하다.
왠지 모르게, 발정난 이탈리아 수컷을 죽이는 건 내게도 조금은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너 어디 소속이야?! 눈깔 똑바로 뜨고 운전해라, 이 사생아 새끼야!”
누군가 각성능력자의 성량으로 거칠게 내지르는 고함이 내 주의를 끈다. 돌아보면, 충돌을 가까스로 회피한 두 제트 바이크의 조종사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는 중이다.
이링가 시내에 마련된 물류집적소 인근 공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트 바이크들이 빈번하게 뜨고 내리는 소음들로 가득했다. 이 현장의 가시거리는 정말로 좋지 못했는데, 원래부터 불고 있던 모래폭풍에 제트 바이크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티가 곧 돈인 헌터들은 UN군 사령부가 권고한 속도제한을 잘 지키지도 않았다. 어떻게 통제를 하려고 해도, 헌터들의 국적이 워낙에 다양하니 강제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상황.
신호위반과 과속, 그리고 과적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나는 게 당연한 개인운송업자들의 생리라 하겠다.
지금 우리는 표면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화물을 실어온 참이었다. 식량, 탄약, 그리고 의약품과 위생용품 등의 필수적인 보급품들.
우리가 여기에 도착하고서 벌써 십여 분 이상이 흘렀건만, 화물을 인수해야 할 유엔군 검수장교와 지상호송팀은 도통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않았다. 그렇다고 하역한 물자를 지킬 경비인력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곳은 하역을 위한 공터에서 한국에게 할당된 구역이다. 같이 기다리는 처지에 놓인 검은 머리 헌터들이 갖은 욕설을 다 내뱉는 가운데, 경태는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서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그냥 직배송을 하게끔 내버려둘 것이지.”
제트 바이크와 드론 바이크 등의 각성능력자용 탈것들은 어디가 되었든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이착륙이 가능한 체급이다.
그러므로 편의를 우선한다면 굳이 지상호송팀을 따로 둘 것도 없이 화물의 최종목적지로 직행하면 그만일 터이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평화유지군 구성국들 간의 보급격차와 그에 따른 불화였다.
방글라데시, 베냉, 이집트, 니제르, 가나, 인도네시아, 네팔 등.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의한 개발도상국들은, 세계적인 불황이 한창인 지금 거금을 들여가며 공중보급을 밀어줄 형편이 못되었다.
평화유지군에 지분을 가진 선진국들이 보급물자의 통합관리를 거부하고 자국의 병력과 헌터들만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자, 이집트 대통령은 맹렬한 어조로 이를 비판했다.
「소위 선진국이라 하는 나라들은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더럽고 추악한 본색을 드러낸다! 평소엔 인권이니 자유니 도덕이니 온갖 잘난 척을 다 해놓고서는, 국제연합의 깃발 아래 아프리카의 평화를 위해 연대하여 싸운 전우들을 내팽개치고 자기네 살길만 찾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돌이켜보면 선진국들은 언제나 그 모양 그 꼴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자 국가 단위로 마스크 도둑질을 해대고, 백신이 나오고 나서는 자기들부터 살겠다고 생산물량을 독점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오직 자본주의만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제3세계의 식량을 쓸어가고!」
「당신들이 계속 그따위로 행동한다면 우리도 우리의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먼저 배신을 한 건 당신들이니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이집트의 독재자가 언급한 ‘우리의 살길’이란 주술사 왕과의 단독 강화협상을 의미했다. 주술사 왕을 정식 국가에 준하는 교섭상대로 인정하고, 이집트의 위치를 제1세계와 주술사 왕 사이의 중간자 즈음으로 재조정해버리는 수가 있다는 협박.
이 협박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주술사 왕을 국가 차원의 교섭상대로 인정한 선례가 생길 경우, 동요할 나라들의 수는 한둘로 그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다들 1세계 주요 국가들의 눈치를 보며 참고 있을 따름.
아프리카 평화유지 임무를 주도한 선진국들은 결코 이집트의 협박을 무시할 처지가 못 되었다. 자칫하다간 이 광활한 대륙에 구축해놓은 기득권이 도미노처럼 붕괴할 위기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원칙을 따진다면 평화유지군이 받는 모든 형태의 보급은 1차적으로 평화유지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게 맞았다. 독재자의 말처럼 먼저 명분을 가져다 바친 건 선진국들 쪽인 것이다.
그 선진국들의 목록 말단에 한국이 들어가 있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던 유엔 검수장교, 그리고 외교부 및 타라자 부대 관계자가 포함된 지상호송팀은 17분이 더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