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웨인과 웨이네타 (1)
그레이스-684와 대면한 이래, 나는 이링가 일대에 원탁의 촉각이 뻗어올 가능성을 보다 깊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가 「콜레로의 뱀」을 전장에 출현시킨 것은 원탁의 아프리카 원정군에게 던지는 강력한 도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원탁도 주술사 왕과 그레이스 사이의 상관관계를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경태도 내 판단에 동의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입니다. 마스터 로더필드가 그만큼 대단한 기동전투단을 이끌고 있다면, 그 역할이 수세적인 방어로 국한될 리가 없죠.”
그러고는 이런 의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이렇게나 자신감 넘치게 드루와 드루와 이러고 있는데, 곧바로 들어오는 건 바보들이나 할 짓이죠. 뭐, 형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로더필드라는 양반의 성미를 감안하면 「강자에겐 병법이 필요 없다!」 이러면서 멧돼지처럼 들이박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독행동이 아니니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지. 형님께서 확보하신 정보가 정확하다면, 함께 움직이고 있을 다른 가문의 관계자들이 제동을 걸 테니까.」
“그렇죠. 그쪽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조금은 당황하고 있을 겁니다.”
경태에게 말을 보탠 것은 화상통화로 연결된 수연이었다. 화면 속의 수연은 내 쪽으로 주의를 향하며 발언을 계속했다.
「어쩌면 그레이스가 계획한 이번 공세의 저변엔 그녀 자신이 직접 나서기 전에 원탁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끄덕였다.
“흉물의 데뷔가 지나치게 화려하기는 했지.”
이는 그레이스가 가짜 공세를 가했다는 뜻이 아니다. 대군에게는 대군만의 전략이 있으니, 하나의 수를 두어 두셋의 이익을 거두려 했다는 뜻이지. 가장 위험한 적인 로더필드를 따돌려놓고, 그레이스 자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마법사의 충격력을 투사하는 건 제법 괜찮은 기만전술이었다.
경태의 말마따나, 로더필드 아래의 원정대는 마녀의 자신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터.
내 짐작이 맞다면, 왕의 군세는 그레이스가 원탁의 사각지대에서 길러낸 비밀스러운 힘이었다. 그 비밀스러움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비수가 되기에 충분했다는 의미. 그런데도 그레이스는 굳이 그 비밀의 장막을 스스로 걷어냈다.
원탁의 구성원들 입장에선 당연히 여기에 다른 계산이 있으리라는 의심이 들겠지. 살면서 위험한 실수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오랫동안 원탁을 애먹여온 교활한 마녀가 갑작스럽게 악수를 두었을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것이니까.
내가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하자, 경태와 수연은 내 예상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답변들을 내놓았다.
먼저 경태가 내놓은 의견.
“음, 그런 부분이라면……. 우선 원탁으로서는 주술사 왕과 그레이스 사이의 연관성 자체가 속임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볼 수가 있겠죠. 사실은 둘 사이에 아무 관련성도 없는데, 그레이스가 「콜레로의 뱀」과 현지인 추종자들을 움직여서 주술사 왕의 행사로 보이게끔 일을 꾸몄을 가능성 말입니다.”
이 경우 원탁이 해석하는 그레이스의 의도는 원탁으로 하여금 자신과 전혀 무관한 제3자에게 전력을 낭비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는 수연이 의견을 내놓았다.
「꼬리가 길어지면 언젠가는 밟힙니다. 다중 스펙트럼 위장막이나 스커드 탄도탄 같은 고급 무기체계들을 밀수하는 과정에서 칠각기사단의 역량이 투입되었고, 영국 비밀정보부가 그 냄새를 맡은 징후를 포착했다고 가정하면, 그레이스는 언젠가 드러날 비밀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노출시키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는 이익은?”
「원탁에게 초조함을 선사하는 거지요.」
수연은 차분하면서도 논리정연한 말을 이어갔다.
「활과 화살, 그리고 후루 연합전선은 장차 유럽을 넘어 영국 본토에 위협을 가할 군사력으로 성장할 개연성이 큽니다. 그레이스 자신도 당연히 그런 구상을 품었을 것이고요.」
“그렇겠지.”
「이 같은 전력을 노출함으로써, 그레이스는 원탁으로 하여금 준비가 충분치 못한 공세에 나서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원탁의 참모들 또한 이러한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겠지요.」
그러고서 또 다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내가 시에라리온의 아기공장을 처음 보았을 때 품었던 불안감이었다.
「또 하나. 그레이스는 지금 원탁에 타격을 가해놓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원탁이 돌리는 아기공장들의 잠재력 때문에?”
「예. 원탁 측에서 각성능력자 대량생산공정을 완성하고 태어난 아기들의 성장 가속과 전력화를 위한 기술까지 획득할 경우, 그레이스가 주술사 왕의 군세에 아무리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자한들, 원탁과의 전력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크게 벌어지기만 할 테니까요. 그레이스가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의 하나입니다.」
언젠가 내가 런던 공략에 걸린 시간제한을 실감하고 초조함을 느꼈듯이, 그레이스의 흉중에도 같은 종류의 초조함이 박혀있으리라는 이야기.
「아기공장의 성과가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한 지금, 원탁이 그레이스의 자신감을 주술사 왕의 군세가 완성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원탁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참수작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참수(斬首). 즉 조직의 머리를 잘라 나머지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
마스터를 잡으려면 마스터가 움직이는 게 이상적이다. 그리고 원탁 유일의 양차대전 참전용사인 로더필드는 위험한 임무를 회피할 인간이 아니었다. 즐겁게 받아들인다면 또 모를까.
나는 스승새끼의 기억으로부터 로더필드의 말버릇을 떠올렸다.
「생명 가진 것들의 우열은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에 가장 분명하게 판가름나는 것.」
「나는 죽인다. 고로 우월하다.」
사람을 죽일 때 희열을 느낀다는 이 무투파 미치광이가 양차대전의 전장을 헤치고도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것은, 그레이스와 나에게는 불행이요 원탁에게는 행운이었다고 해야겠지.
나는 경태와 수연을 향해 말했다.
“의견들은 잘 들었다.”
두 녀석이 내놓은 상황분석은 내 생각이 이미 닿았던 부분들이었다. 그러나 두 녀석의 견해가 나와 일치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나 혼자서만 내리는 판단은 매양 얼마간의 불안감이 뒤따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지금 당장은 경계를 강화하고 유사시의 대응태세를 점검하는 정도가 최선이겠어.”
내 말에 경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죠. 원탁이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그레이스 쪽인 데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처음부터 전력으로 들이받을 확률도 희박하고, 또 여기 있는 우리에 대해선 미처 알지도 못하는 상태일 테니까요.”
그러고서 이렇게 다시 덧붙인다.
“경계를 강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는 만큼, 원탁이 파견할 수색견들을 반드시 감지한다는 보장은 없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에도 원탁과 칠각기사단이 충돌하는 순간만 놓치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중요한 건 나와 그레이스의 대화가 얼마나 잘 풀리는가.
대마법사와의 정면충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대마법사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건 그레이스에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기회로 느껴질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그렇게 느끼기를 바란다고 해야겠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이만큼이나 괜찮은 조건에서 그녀와 교섭을 할 기회가 다시 오기는 어려울 터였다.
경계 강화의 세부적인 시행방침과 향후의 행동 방침, 그레이스와의 협상 방침 등을 논하고 회의를 마무리 지은 나는, 경태를 내보낸 후 아직 연결을 끊지 않은 수연에게 몇 가지 사소한 질문들을 던졌다. 근래의 업무 부담이 과중하지는 않은지, 전투근무지원에 종사하는 인력의 보강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끼니와 휴식은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그 외에 여타 고충사항은 없는지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어본 게 일전에 한 번 짧게 고민했던 선물에 관한 문제였다.
「받고 싶은 선물…… 말씀이십니까?」
수연이 드물게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너에게나 경태에게나, 뭔가 오래도록 기념이 될 법한 무언가를 하나씩 주고 싶구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해주고 있는 너희들이니까.”
오래도록, 이라는 단어를 말하며 나는 못내 입안이 껄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직은 철저하게 내 생존의 도구로서 만들어진 것이며, 런던 공략 이후의 조직 경영에 대해선 아직 막연한 구상조차도 가진 게 없었기 때문.
극단적으로 말해, 런던 공략을 위해 조직 전체가 소모된다고 하더라도, 그로써 내가 바라는 평온을 온전히 손에 넣기만 한다면, 나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일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인데.
나는 그저 사기 고양을 위한 수사법에 불과한 말을 하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나 자신이 다시 한 번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는 명백한 본말전도의 징후이지 않은가, 하고.
나 자신에게 결함이 있음을 깨닫는 건, 그 유익함과는 별개로 유쾌한 경험이 못 되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이 느리게 대답했다.
「……형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제게는 그게 무엇이든 소중할 것입니다.」
“그러냐.”
돌아오는 건 결국 형식적인 답변이었다. 이 건조한 녀석에게 뭔가 평범한 사람들과도 같은 물욕 따위가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연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물었다.
「혹시 경태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까?」
“했지.”
「경태는 뭐라고 했습니까?」
“좋은 술을 많이 사서 나중에 시간이 날 때 함께 마셔달라고 하더군. 나와 네가 제 앞에서 함께 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던가. 그래서 다른 걸 생각해보라고 했다. 술처럼 마시면 없어지는 것 말고.”
「……경태답군요.」
희미하게 웃는가 싶던 수연의 표정이 이내 평소와 같은 무채색으로 돌아간다.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연결을 종료하겠습니다.」
“음. 나중에라도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면 사양 말고 말하도록.”
「……예. 그럼.」
영상통화 화면이 검게 물든 후, 나는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바라보다가 지휘막사 밖으로 나섰다. 정신적인 휴식을 위해 바람이나 쐴 겸 하여.
부우우우우웅-!
멀지 않은 간이 활주로에 중형 항공기가 내려앉는 소리. 주익에 붙은 플랩을 최대로 꺾고서 저속으로 내려앉는 기체는 일본 항공자위대가 파견한 터보 프롭 전술수송기였다. 착륙하는 기체 후방으로 작은 모래폭풍이라고 해도 좋을 크기의 먼지구름이 일어난다.
멀지 않은 저공에선 같은 국적의 제트 바이크 1기가 화려하게 불을 뿌리며 수송기의 착륙을 에스코트하는 중이다. 허공에 펼쳐지는 뜨거운 열의 장막은 단 한 사람의 능력자가 전개하는 「발화」 치곤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어떤 열 추적 탐색기도 저 장막에 속지 않을 재간이 없을 만큼.
‘여기서 저 과체중 비행광대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날아다니는 0.1톤」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일본 수위의 발화능력자, 키무라 마사노리(木村 雅規).
열도에 상륙한 시베리아 대호를 잡을 적에 몇 차례 멀찍이 엇갈린 적이 있는 이 제트 바이크 기수는, 이 먼 타역까지 날아와 교민 구조, 물자 운송, 위험지대 수색, 항공기 이착륙 에스코트 등의 위험한 임무들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특유의 마법 같은 붙임성으로 말을 붙여본 경태는 광대의 됨됨이를 이렇게 평가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좀 심하게 신경질적이긴 한데, 막상 사람 자체는 의외로 질이 좋은 구석이 있더라고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들도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식이고.”
그러면서 원어로 어조까지 흉내 내어 옮기는 키무라 마사노리의 말이 이러했다.
「일본은 똥 같은 놈들로 가득한 똥 같은 나라다. 뭐가 히어로고 뭐가 나라의 자랑이라는 거냐! 매일같이 행사장에 끌려나온 원숭이 짓이나 시키는 주제에!」
「그 나라에 있으면 나는 단순히 구경거리일 뿐이야! 다들 겉으로만 그럴듯한 소리들을 해주지, 본심(本音)으로는 그냥 불 뿜는 신기한 돼지새끼나 집 지키는 개로 취급하는 게 뻔히 보인다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생김새만 가지고 사람을 낮잡아보고…….」
「이제 됐어. 똥 같은 놈들의 시선 따윈 아무래도 좋아. 남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일들로 내 인생의 남은 시간들을 채울 거야.」
길었을 리가 없는 대화에서 이렇게까지 속을 내보이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경태의 친화력과 화술이 대단한 덕분이었을지, 아니면 0.1톤에게 쌓인 울화와 자격지심이 많은 탓이었을지.
현재 이링가 시에 갇힌 평화유지군과 여러 나라의 헌터들, 그리고 주요 국가들의 교민들을 구출하는 문제는 전 세계에 걸친 관심사가 되어있었다.
이 와중에 일본은 이링가 주(州) 전역의 자국 교민들에게 알아서 탈출지점까지 집결하라는 방침을 전달했다. 항공기는 보내줄 터이나, 자위대의 교전권이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교민들이 활주로까지 오는 과정의 안전은 보장할 방법이 없다면서.
일본정부가 자위대의 교전권을 운운하며 교민들의 안전을 방기해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자국민들의 죽음을 국치(國恥)로 삼아 평화헌법 개정에 힘을 보태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많았다. 지금처럼 험난한 시기에 국수주의의 마력은 국민들을 홀리기에 좋은 마취제니까.
그래서일까. 키무라 마사노리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아주 제한적인 협조만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하다못해 탈출을 원하는 교민의 위치조차 알려주기를 거부하고 있노라고.
일본의 언론들 또한 기이할 만큼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던가.
하기야,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데 민간인이 활약하는 건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니겠지.
키무라가 허락도 절차도 없이 무턱대고 날아온 시점에서, 정부는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없는 명성을 만들어 도구로서의 영웅을 탄생시켰더니 저가 진짜 영웅인 줄 알고 주제 넘는 짓을 하고 있잖은가.
허나 이제까지 띄워준 게 있는 만큼,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보는 눈이 있는 만큼 대놓고 뭐라고 하기는 또 곤란한 노릇.
사람 사는 세상에선 딱히 대단하다고 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