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02화 (302/561)

#33. 흉물 (5)

대화를 다 끝내고 그레이스-684를 돌려보내기 전, 나는 내가 계승하고 발전시킨 크로우허스트의 마법과 인형술사의 제례검을 활용하여 흉물의 너덜너덜해진 영육을 수선해주었다.

파괴된 영적 결합구조의 단면들을 봉합하는 것은 대마법사라도 아무나 해낼 순 없는 마법적인 수술이다. 이 수술을 빠르게 완료함으로써, 나는 내가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대가를 잡아먹은 자임을 실력으로 증명해 보였다.

나는 제례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 정도면 네가 남은 임무들을 수행하기에 충분할 거다.”

앞서 치명적인 공격들을 당했던 경험들이 있어서일까. 제 몸에 칼을 댈 때마다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던 그레이스-684는, 내가 칼을 거둬들이자 선명한 생체적 이완의 색채를 내비쳤다.

684는 내 앞에서 수리가 끝난 영육의 기능을 점검해보았다. 육체가 뜻대로 움직이는지, 운동능력은 어느 선까지 복원되었는지, 또 영의 회로에서 마소와 마력의 누수가 발생하지는 않는지 등등.

「놀랍군.」

저의 회로에 공회전으로 마력을 돌려본 684의 감상.

「……그 정도의 손상을 수복하는 건 어머니에게도 쉽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술을 진행하며 대화의 탈을 쓴 심문을 진행한 바, 「콜레로의 뱀」은 내 짐작대로 원탁이 굴리던 아기공장의 생산물-즉 처음부터 조립식 부품으로 만들어진 아기들-을 강탈하여 완성한 것이 맞았다.

흉물스러운 몸뚱이에 들어가 있다고는 해도, 684는 어쨌든 인간의 뇌와 인간의 인격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술을 진행하는 내내 온건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684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대의 예상치 못한 온건함으로부터 특별함을 느끼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스톡홀름 증후군과 같은 형태의 감정적 편향은 타인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인격일수록 나타나기 쉽다. 그리고 684는 명백히 그레이스에게 종속되어있는 인격체였다.

나는 그레이스가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자식들 하나하나에게 인간적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거인의 뱃속에서 자결을 감행한 596의 불안정성은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해주는 근거였다.

그런즉, 684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겠지.’

원탁을 상대할 무기로서 태어나 적아의 구분이 뚜렷한 흑백의 세계를 살아왔을 684에게, 지금의 나는 난생처음 인간 대 인간으로 접한 회색의 타인일 것이었다.

세상의 나머지를 채우고 있는 제3자들과 달리,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가 없는. 그래서 어머니가 내려준 방침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입장을 정해야만 하는 타인.

온건함을 돋보이게 하려면 온건함과 대비될 억압적 태도가 간헐적으로 동반되어야 하지만, 칼을 댈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상대에겐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생체기계는 너무도 많은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다.

계산이 깔린 치료가 성실하게 이루어지는 동안, 차근차근 경계감을 누그러뜨린 684는 드문드문 유의미한 정보들을 흘려주었다.

그러한 정보들 중엔 칠각기사단이 아기공장들을 파괴하면서 노획한 「콜레로의 뱀」의 원형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털어놓아도 그레이스와 칠각기사단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 정보들.

「원탁의 아기공장들은 오직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게 아니다.」

「어떤 공장에서는 단순히 각성한 아기들을 뽑아내고 있었던 반면에, 이 육체를 이루는 아기들을 발견한 곳에선 외부부착형 조립식 마력회로의 연구와 제작이 진행 중이었지. 어머니께선 그 중간결과물을 탈취하여 이 육체로 재구축하신 것이고.」

「어머니께선 그때 무척이나 즐겁게 웃으셨지. 내버려두면 어차피 원수들의 도구가 되거나 숨이 멎었을 아기들이, 내 덕분에 복수의 기회를 얻지 않았느냐고…….」

684가 심회 번잡한 느낌으로 내놓은 진술은 내가 예상했던 바와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외부부착형 마력회로라 함은 대마법사가 접속하여 마법과 전투력의 증폭을 꾀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마도구를 의미했다. 아기들의 영육으로 조립한 병렬분산 네트워크.

그 네트워크의 크기를 무한정 키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당장 눈앞의 흉물만 해도 설계가 대단하기는 하나 결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융합시키는 영육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구조적인 비효율 또한 증가하겠지.

본래부터 하나의 생명이자 영혼인 「레이디 아밀라리아」나 「전율하는 거인」의 질량은 인공적인 기술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초월적인 영역에 도달해있다.

그러나.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란 말이지.’

예컨대 「콜레로의 뱀」을 조종하는 게 그레이스-684가 아니라 그레이스 본인이나 원탁의 대마법사였다면, 아무리 상극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한들, 나는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싸움을 치렀어야 했을 터였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

684의 목소리가 나를 상념으로부터 일깨웠다. 내게 양해를 구하고서 우거진 수관(樹冠) 위로 머리를 들어 하늘을 엿본 684는 초조함을 담아 몸을 꿈틀거렸다.

「내게는 이 밤이 지나기 전에 타격해야 할 목표들이 많이 남아있다. 웨인 당신만 괜찮다면, 이쯤에서 날 보내주었으면 좋겠는데…….」

옹알이가 모여 이루는 화음은 여전히 기괴한 것이었으되, 나를 대하는 684의 태도는 처음에 비해 체감이 가능할 만큼 누그러져있었다.

처음보다는 확실하게 덜한 긴장과 경계심,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대에게 내보일 법한 어색함, 그리고 처음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부드러움이 약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레이스에겐 말을 잘 전해주었으면 좋겠군.”

뱀의 체내에 복잡한 안도감의 색채가 번진다.

「……시일이 조금 소요될 수 있음은 이해해주길 바라. 어머니께서 주신 임무들을 완수하는 것이 먼저니까. 어머니께서 당신과의 협력을 꼭 긍정적으로 검토하신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난 당신의 인격이 확실하게 크로우허스트가 아니라고 증언해줄 수도 없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만 제대로 전해주면 된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

「그래. 알았어.」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개인적인 질문이다.”

「뭐지?」

“너, 그런 몸이 되고서 유감스러운 마음은 없나?”

「……없어.」

거짓이다.

「이 몸으로 수행해야하는 임무들을 다 마치고 나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

아주 진한 색채의 우울한 거짓이다.

비록 내가 황금기의 눈을 가지고 있노라 밝히긴 했으나, 684는 이 지랄 맞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필사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겠지.

원탁은 이 눈을 「정수」에 남아있는 진리를 엿보고, 마력을 머금은 고대의 유물들을 탐색하며, 승천의 계단을 갉아먹는 버러지들과 원탁의 적들을 찾아 죽이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 밖의 예외적인 용처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황금기의 눈은 평시 「좌안의 사서」와 「우안의 사서」가 엄격하게 분리하여 보관하며,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든 만장일치로 원탁내각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신성한 유물이었다. 모든 사용과정이 감시를 받아야 했음은 물론이고.

그런 유물을 한낱 거짓말 탐지기의 대용품으로 써먹는다는 발상은, 원탁의 구성원들에겐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불경이며 신성모독이다.

그레이스가 아는 눈의 효용 또한 원탁의 지식을 벗어나지 않을 터.

감정을 헤아리고 말의 진위를 구분하는 건 이 피곤한 눈을 달고서 평생을 살아온 내가 일상의 영역에서 완성시킨 노하우다. 이 눈을 달고 직접 살아보지 않는 한 쉽게 상상하지 못할 영역인 것이다.

뱀의 형상을 한 우울함이 머뭇거리며 작별을 고했다.

「달리 할 말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보겠어……. 다음에 만날 땐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당신처럼 위험한 상대와 다시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뒷짐을 지고서 몸을 돌려 멀어지는 뱀을 바라보았다. 수관 아래로 드문드문 내려오는 달빛을 받으며 기어가던 뱀은, 얼마간 나아간 곳에서 한 번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금 속도를 내어 한층 더 빠르게 멀어져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와 똑같이 생긴 자식들을 소모품처럼 써버리는 그레이스의 광기는, 생존을 위협받았을 때 제 새끼들마저 잡아먹는 작은 동물들의 광기와 얼마만큼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까.

생존의 저울과 복수의 저울. 그레이스의 마음속에선 어느 쪽의 저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인가.

내 심중엔 복수의 저울이 없다. 오직 생존의 저울만이 있을 뿐.

그레이스와 나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었다.

「콜레로의 뱀」이 일으킨 충격은 단 하루 만에 이링가 주 전역을 휩쓸었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났을 땐 탄자니아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마법의 시대가 돌아온 이래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율하는 거인」이나 「레이디 아밀라리아」 같은 자연각성체들은 어디까지나 원래부터 존재하던 생명들이 초월적인 힘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원탁이 기초를 만들고 마녀가 강탈하여 완성시킨 「콜레로의 뱀」은 기존의 각성체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신화적인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 어두운 시간마다 출몰하여 주도(州都) 일대의 평화유지군 세력을 쓸어버리고 있으니, 전 세계의 이목이 이 땅에 쏠리게 된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주술사 왕의 여론전이 더해진 결과, 주술사 왕을 추종하는 세력은 급격하게 그 수를 늘려갔다.

심지어 유럽과 미국에서조차 서로 다른 신비주의자들의 무리들이 공개적으로 운집하여 「활과 화살」의 상징을 경배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 원래부터 주술신앙이 팽배해있던 검은 대륙의 사정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여기엔 반작용이 뒤따랐다.

공포스러운 미지의 존재를 전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는 자들과, 마법의 시대가 깊어질수록 기존의 신앙이 완고하게 굳어지는 자들이 드러내는 증오.

그렇잖아도 개판이었던 전장에 양극단의 숭배와 증오가 녹아들면서, 검은 대륙 동부의 고원엔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짙은 피비린내가 감돌게 되었다.

끼익- 끼익-

배가 갈라진 채 목이 매달린 시체가 건조한 바람에 흔들린다.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한 자들은 혐의가 확실치 않은 개인운송업자들이었다. 등짐을 메고 산야를 달리며 새로운 시대의 물류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던 자들.

벨기에 정부와 계약한 헌터 단체가 이들을 잡아 죽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들이 명백히 다국적 헌터들이나 평화유지군의 소유물이었을 물품들을 지니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것을 빌미로, 이 운송업자들이 주술사 왕의 끄나풀들로서 국제연합의 패잔병들을 사냥한 살인자들이라 단정 지었던 것.

물론 이 대륙에선 개인운송업자와 무장 강도의 경계가 뚜렷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무기를 휴대하는 각성능력자 짐꾼들은, 좋은 기회를 만나면 기꺼이 강도나 밀렵꾼으로 돌변하여 이익을 챙기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짐꾼들이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인 것은 아니다. 단순히 주인을 잃은 물건들을 주워 모았을 뿐인 자들도 얼마든지 넘쳐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헌터들은 그런 사정을 일일이 헤아리려 들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면 어쨌든 그 사이에 죽여야 할 자들이 끼어 있긴 할 테니까. 헌터들이 그만큼 독이 올라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더러운 깜둥이 새끼들. 본성 자체가 글러먹은 종자들 같으니.”

내 눈에 들어오는 피부 하얀 헌터 하나가 침을 뱉으며 내뱉는 프랑스어.

“어이, 물건들 검수는 아직이야?!”

“기다려, 얼간아! 이 양을 보고 재촉하라고! 니가 밥을 굶지 않는 게 누구 덕분인지 알기나 해?!”

벨기에 국적의 처형 집행인들이 나와 내 애들을 경계하며 망자들이 남긴 유류품의 무더기를 헤집는다. 돈이 되는 물건과 정부에 제출할 증거품들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짐꾼들 하나하나가 제 체중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에 유류품의 양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일단 최소한의 증거를 제시하기만 하면 책임을 추궁당할 일은 없다. 지금은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고, 각국 정부의 판단능력엔 과부하가 걸린 지 오래이며, 아프리카 토인(土人)들의 죽음 따위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할수록 정부로부터 받을 수당은 늘어난다. 만약 정말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 경우엔 일확천금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식량이라도 나오면 이득이지 않은가. 사실 이쪽이 주목적인 헌터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시체들 아래로 쏟아져 파리가 꼬인 내장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아주 좋아하겠어.’

다국적 중무장 용팔이들이 이런 식으로 실적을 창출할 것은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다. 어떻게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 정부 예산을 빼먹으리라고.

피로 돈을 버는 용병들이 닥치는 대로 인간 사냥을 이어갈수록, 외세에 대한 증오를 품고 주술사 왕에게 의탁하는 현지인들이 늘어날 것은 당연한 일.

촤아아아아-

바이크에 탑승한 일련의 무장인원들이 길도 없는 울퉁불퉁한 땅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처음엔 인간사냥에 여념이 없는 헌터들인가 했지만, 복장과 장비의 차이를 통해 나와 내 애들이 기다리던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링가 시 동남부에 인접한 평야지대의 안전을 확보한 후 기다리라고 했던 미 공군 전투통제단(Combat Control Team) 대원들. 한국으로 치면 공정통제사에 해당하는 특수부대원들이다.

언뜻 보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자그마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이들은, 인간 도축에 여념이 없는 벨기에인들을 향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봐요! 당신들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벨기에인들은 눈을 찌푸리며 억양 투박한 영어로 대꾸했다.

“당신들이야말로 뭘 하려고 온 거요?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서 무작정 여기를 지키고 있으라고만 하니, 주변을 지나가는 주술사 왕의 병사들이라도 잡아 죽여야지 어쩌겠소.”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아니, 그전에 여기 매달린 게 다 왕의 병사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뭐 문제라도 있소?”

전투통제단 대원들이 한층 더 당혹감을 드러낸다.

우리 또한 이곳을 안전하게 확보해놔야 하는 이유를 듣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 전투통제단이 돌아다닐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도시 근처에 간이 활주로라도 확보하고 싶은 거지.’

각국 공군의 수송기들 중엔 체급이 제법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야지 이착륙이 가능한 기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야지 이착륙이 가능하다고 해서 아무 평지에서나 뜨고 내려도 되는 건 아니었다. 먼저 전문인력이 활주로로 삼을 땅으로 가서 외부물질에 의한 손상 가능성을 평가하고, 또 지면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을 계산해놔야만 하는 것.

그런 작업을 선행하지 않으면, 랜딩기어가 지면을 푹 파고들어가거나 엔진에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해서 대형사고가 터질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체급이 가벼운 경비행기들과는 사정이 다른 셈이다.

이곳이 예비 활주로 부지임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 또한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자고갈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는 이때, 여기 활주로가 생긴다는 정보가 퍼지면 온갖 떨거지들이 와서 지랄병들을 떨어댈 테니까.

“이런 맙소사.”

상황을 물어물어 벨기에인들이 증거랍시고 모아놓은 물건들을 본 미군 특수부대원이 방탄모를 감싸 쥔다.

“겨우 이것만 가지고 사람을 죽였다고? 확실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잖아! 당신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벨기에 헌터들의 우두머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 뒤늦게 쫄래쫄래 기어들어온 인간들이 대체 뭐가 잘났다고 떠들어? 사정을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을 것이지.”

이는 상황이 이렇게 되고서야 병력을 파병한 미국에 대한 여론을 반영하는 대꾸였다.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동맹국들의 등쌀과 참모들의 간언에 못 이겨 소수의 특수부대원들을 선심 쓰듯 파병해주었다.

“생각을 해보라고! 지금 같은 때 괴물과 왕의 전사들이 돌아다니는 위험지역을 수백 킬로미터씩 뚫고 들어오는 짐꾼들이 보통 짐꾼일 것 같아?”

벨기에 헌터들의 우두머리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가르치듯 말했으나, 이 또한 겉으로만 그럴듯할 뿐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 인식이었다.

짐꾼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이링가는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수백 달러를 남길 수 있는 기회의 도시다. 봉쇄된 도시 안에 구매력 높은 고객들이 무더기로 갇혀있으니까.

불과 재작년까지만 해도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1천 달러를 벌면 많이 버는 축에 들었던 나라에서, 사나흘에 수백 달러면 충분히 목숨을 걸어볼 만한 이익이지 않은가. 특히나 이 땅을 등지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자들에게는.

왕의 군세 또한 민간업자들을 가장하여 돈을 벌고 있으리라는 심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게 오가는 짐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일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당신들은 저걸 왜 말리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좀 달라 보였던지, 벨기에인들의 광기 앞에 말문이 막힌 미군이 우리 쪽으로 와서 묻는 말. 경태는 떨떠름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우리가요? 무슨 권한으로요? 그랬다간 외교부를 통해 항의가 들어올 텐데요?”

“신이시여.”

전투통제대원이 신을 찾으며 고개를 흔든다.

이 와중에 저 멀리 북쪽에서는 은은한 폭음들이 울려왔다. 공항과 가까운 고지를 점령한 왕의 전사들이 탄도탄 떨어진 활주로의 복구공사를 방해하고자 박격포 사격을 가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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