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97화 (297/561)

#32. 뱀 (23)

타라자 부대가 나와 내 애들에게 거지 무리들을 떠넘긴 건 뭔가 계획이 있어서 행해진 작전지시 같은 게 아니었다. 대참사 앞에서 대가리에 과부하가 걸린 높으신 분들이 문자 그대로 무턱대고 떠넘기고 본 것일 뿐.

타라자 부대장은 파견장교들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보급 공유에 관한 협조를 요청해왔다. 모여든 거지들에게 밥도 주고 무기도 주고 가능하다면 부상자 관리도 해달라는 내용의. 우리가 별도의 보급체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한 직후의 일이었다.

요청을 확인한 경태의 평가는 이러했다.

“말이 되나 이게? 그냥 니들이 다 해줘! 이러고 있으니……. 뇌가 없든 부모가 없든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없는 것 같은데.”

현재 우리의 보급추진 역량은 교전 상황을 가정한 최대수요를 기준으로 200%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 측의 전투력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도, 내 아래에 있는 전투단과 대등한 규모까지는 거지들에게 완전무결한 보급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 최저수요만 채워준다 치면 그 배 이상도 가능할 것이다.

경태든 수연이든, 지금 같은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타라자 사령부는 최소한의 계산조차 없이 비현실적인 요청서를 들이밀었다. 우리가 독립적인 보급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구체적인 보급역량이 얼마나 되는가는 확인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병신 같을 수가 있나.

거덜난 각설이 집단들은 제각기 대표자들을 보내어 지랄들을 해댔다.

“니들 사정은 모르겠고, 정부가 여기 와서 받아가라 했으니 아무튼 내놔라.” 같은 식으로.

이런 생떼를 일일이 상대해주다간 아직 탄약이 남아있는 거지들의 총구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수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거지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유도했다.

정보의 불균형을 이용하여 한정적인 보급량을 제시하고, 분배비율을 저들끼리 합의하도록 해서 감정의 골을 만들어낸 다음, 결론을 내지 못하고 편이 갈라진 자들 중 전력화 및 통제가 용이한 집단을 선별하여 한편으로 끌어들인 것.

이때 앞서 언급한 보급량의 한계를 조금 더 넘어서는 양을 내어주며, 「당신들을 위한 특별한 호의」이자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추가로 감수하는 희생」임을 인지시킨 것은 물론이었다.

보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 우리의 선택을 받은 거지들은 이제 주어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로군.’

내가 사용한 수법은 전형적인 디바이드 앤 룰이었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죽거나 떨어져나갈 놈들이 상대라곤 해도, 기분은 당연히 좋을 수가 없지.

그러나 지금은 수단의 호오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거지 떼의 일부를 회유하고 재무장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친화적인 머릿수를 확보했으므로, 도적이 되기 직전인 나머지 거지 떼들은 우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새로운 협상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었다.

또한 이는 적이 공격을 가해왔을 때, 패잔병들 사이에서 발생한 붕괴의 해일에 우리까지 휩쓸리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였다.

이런 대비를 해둔 보람이 있는지, 적들은 일체의 공격을 걸어오지 않았다. 패잔병들 사이로 숨어든 간자들로부터 이쪽이 여전히 까다로운 사냥감이라는 첩보를 획득한 것일 테지.

하나 경태는 못내 찜찜해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건드릴 생각 자체를 않는 건 이상하네요.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이링가를 향한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지금 당장 밀어내거나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견제를 걸어오는 게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압도적인 수적 우위는 뭐 뒀다가 국 끓여먹으려고 그러나?”

이는 타당한 지적이었다. 나는 주둔지 주변 지역을 눈에 담으며 말을 받았다.

“저쪽 입장에선 이쪽의 휴식만 박탈해도 남는 장사일 텐데.”

본격적인 교전까지 갈 것도 없다. 가볍게 총질 몇 번 하고 도주하는 수준의 차륜전만 걸어와도, 숫자가 적은 우리는 계속해서 누적되는 피로를 감수해야 할 터였다.

황금기의 눈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렇게 판단해야 자연스럽지.

내 말에 경태가 크게 끄덕였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하다못해 저격을 가하거나, 우리가 공격적인 기동을 할 때 곧바로 측면을 위협할 수 있는 지점들을 미리 점유해서 요새화한다거나 해도 되고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무지하게 찝찝하지 말입니다.”

“네가 보기엔 적의 속셈이 무엇일 것 같으냐?”

“글쎄요. 짐작도 안 가는데요. 이제까지 보여준 역량을 보면 딱히 무능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무 잘 싸워서 겁을 먹었을 리도 없고……. 이쪽의 체력을 깎아놓지 않고서도 순수한 힘으로 밀어버릴 자신이 있나?”

“후루 연합전선을 구성하는 세력들이 전과 경쟁에 돌입했다면?”

“왕의 총애를 다투기 위해서요?”

“그래.”

내가 가정한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이쪽이 강하고 단단할 땐 힘을 합쳐 분쇄했지만, 공세가 대성공을 거두어 이쪽이 흩어지고 약해진 지금은, 사방에 널린 전과를 주워 먹느라 조직력이 느슨해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

세상에 삽질을 하지 않는 군대라는 건 없다. 대승을 거둔 군대가 샴페인을 조금 일찍 터트리는 정도야, 그렇게까지 큰 삽질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경태가 볼을 긁적였다.

“음, 그런 거라면 그나마 좀 말이 되긴 하는데……. 주술사 왕과 그 참모들이 겨우 그 정도도 통제하지 못하겠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흠.”

“어쩌면 저 친구들은 우리를 왕의 사냥감으로 남겨둔 것일지도 모르죠. 그 왜 인도네시아 황금 꼰대도 말했던 것처럼, 훌륭한 군주는 우수한 사냥꾼이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우수한 사냥꾼에겐 사나운 사냥감이 필요하겠지요.”

“……그것도 일리가 있군.”

“뭐어, 갑자기 「드람메자」 같은 게 튀어나오더라도 대응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만, 기분이 영 개운치 못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우리는 이미 인도네시아에서 각성체 전투코끼리와 교전을 치러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건 상대적으로 체급이 작은 아시아 코끼리였고, 강화계수는 제법 높았을지언정 육체강화 이외의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었다.

주술사 왕의 전투코끼리는 경우가 다르다.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들이 절반만 사실이라도, 드람메자는 전략병기에 가까운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괴물이었다. 운용하기에 따라 전장의 판도를 뒤집을 잠재력을 지닌 생체병기라는 뜻이다. 전근대의 바다를 지배했던 전열함과도 같은.

기동을 은폐할 수단이 있기에 비로소 성립하는 이야기이긴 해도.

‘러시아는 지금쯤 굉장히 신이 난 상태겠지.’

러시아제 다중 스펙트럼 위장막 「가시나무」가 없었더라면, 덩치 큰 각성체 전투코끼리는 진즉에 폭격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

열 추적도, 전파 탐지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위장막은, 본래대로라면 전술병기에 불과했을 코끼리를 전략병기의 반열로 끌어올린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 전훈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을 각국의 군 관계자들은 지금쯤 열심히 주판을 튕기고 있을 테지. 이게 과연 전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하고.

어쨌든 경태의 말처럼 작금의 고요함이 왕의 자신감-혹은 오만함-으로부터 비롯된 거라면, 저쪽이 내밀어올 가장 유력한 카드는 역시 왕의 전투코끼리 드람메자다. 살아 숨 쉬는 초중전차. 네 발로 달리는 사단급의 폭력.

그 말인즉-

‘주술사 왕 자신도 전쟁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가…….’

일단 한 번 내 시야에 들어오고 나면 나는 그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설령 왕이 몸소 친정을 하지 않더라도, 전투코끼리의 뒤를 쫓다 보면 결국은 왕이 있는 곳에 닿게 되겠지.

마력장을 눈으로 포착 가능한 내게 코끼리 같은 대형 각성체는 추적이 아주 용이한 표적이다. 커다란 배가 지나간 자리에 크고 오랜 항적이 남듯, 대형 각성체가 지나간 자리엔 선명한 마소의 와류가 남으니까.

단 한 번, 눈으로 포착할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된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경태는 조금 곤란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추적대는 언제라도 편성 가능합니다. 근데, 이번엔 제가 직접 근접수행을 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시겠죠?”

“넌 여기서 지휘책임을 맡아줘야 하니까.”

“역시 그렇지요…….”

주술사 왕도 중요하지만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왕의 친정을 물리친 시점에서 가장 위험한 고비는 넘기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나와 조직 최고의 지휘능력자가 동시에 빠지는 건 피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경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입장에선 형님이 가장 중요한데 말입니다.”

굳이 대꾸를 하지 않고 있으려니, 경태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걸 전해드릴까 말까 했는데, 아까 새로운 요청이 접수된 게 있었습니다.”

“타라자 사령부로부터?”

“아뇨. 외교부 긴급대응팀으로부터요.”

“무슨 요청이었지?”

“이링가에 남아있는 교민들에 대한 보호, 구조, 의료지원, 후송 요청 등등이죠. 한 마디로 시가지에 치안 유지 인력을 보내 달라 이거였습니다. 식량을 가져다달라는 건 덤이었고요.”

나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터무니없군. 거절했나?”

“아뇨. 검토는 해볼 테니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왜?”

“거기에 윤혜원 사무관이 나가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단지 그거 하나 때문에?”

“아니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멋쩍어하며 괜히 머리를 긁적이는 경태.

“마운트 로열 호텔의 동태도 살필 겸, 요청에 응하는 시늉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차피 도시 봉쇄가 하루 이틀 만에 풀릴 것 같진 않고, 교민들의 태도도 매우 비협력적이라고 하니 상황을 봐가면서 천천히 결정해도 무방할 겁니다.”

“교민들은 또 왜?”

“뻔하잖습니까? 백 퍼센트 안전한 철수 수단을 마련해라, 현지의 자산 손실을 정부가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해라, 우리 교회가 개종시킨 현지인들을 같이 데려가야 한다 등등. 현실 파악이 안 되는 저능아들만 남아있으니 교민 철수가 금방 끝날 리가 있나요.”

“…….”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백 퍼센트 안전한 철수 수단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잠시 혼돈의 도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목전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

“옙. 잘 생각하셨습니다.”

굳이 하려고 한다면 인력을 마련할 방법은 있다. 보급추진의 일부 구간을 화성무련 아래의 엽사들에게 아웃소싱으로 넘기면 되니까.

그들의 몸값이 높아진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필요한 자금은 중국지사의 처치 곤란한 위안화 뭉치들을 쓰면 될 것이고, 또 련주인 미주의 영향력도 있는 만큼 비용지출을 감수한다면 충분히 사용 가능한 수단이었다. 미주에게 실적을 챙겨주기에도 좋을 터.

여러 생각들이 의식의 수면에서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전장의 밤이 깊어갔다.

내 마법사로서의 감각이 이상을 감지한 것은 자정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뭐지, 이 기괴한 느낌은?’

꿈과 현실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머물러있던 의식이, 등골을 선득거리게 만드는 존재감을 느낀 직후 찬물을 맞은 것처럼 깨어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광범위한 영역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띠고 흐르는 마소의 흐름이었다. 감각이 둔한 자연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감지하지 못할 변화.

이는 곧 마소의 급류가 향하는 방향에 아주 넓은 영역에 걸쳐 마소의 흐름에 영향을 줄 만큼 규모가 큰 마력장이 전개되어 있으며, 그 마력장의 근원인 회로가 맹렬한 기세로 마력을 소모하는 중임을 암시하는 것.

나는 당직을 서던 부하들로 하여금 조용한 전투태세를 발령하도록 지시했다. 너무 빠르게 위험을 감지한 모습을 노출시켰다간 누군가에게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으니까.

전투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료되었다.

“전투코끼리입니까?”

나는 경태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전투코끼리일 리가 없지.’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투사하는 건 코끼리 따위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각성체가 이런 존재감을 지니려면 혹등고래 정도의 체급은 되어야 하는데, 여기는 바다가 아니라 육지이지 않은가.

미지의 존재감은 빠른 속도로 이쪽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야심한 시각의 전장에서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마법적 존재는 일단 적으로 간주하는 편이 안전할 터.

설마 여기서 대마법사와 조우하는 것인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잠시 후 무척이나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느껴야만 했다

“……뱀?”

마침내 가시거리에 들어온 적의 실체는 악몽에나 나올 법한 형상의 흉물(凶物)이었다. 뱀은 아니지만, 외견상 가장 유사한 것을 찾으라면 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습.

이 길고 육중한 흉물의 육체를 이루는 건 찰흙처럼 뭉쳐진 수천수만의 아기들이었다. 뱀이라면 비늘가죽이 있어야 할 곳엔 작고 어리고 동글동글한 얼굴들이 빼곡하게 박혀있다.

이에 내가 반사적으로 떠올린 것은 시에라리온의 산중에 있던 출산 공장의 폐허.

나는 내가 연상한 가능성으로부터 뇌를 벼락으로 지져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뒤틀린 이무기처럼 생긴 흉물은 아기들이 웃고 우는 소리를 내며 내가 있는 전장으로 기어들어왔다.

아직은, 나 정도의 능력자라도 청각을 한껏 열어두어야 겨우 들릴 법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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