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96화 (296/561)

#32. 뱀 (22)

마무르는 불퉁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나는 싸장님에게 즉각적인 포지션 변경을 요청해요.”

나는 이 광신도를 전투근무지원(CSS)을 맡은 부하들 사이에 끼워 뒤따르게 했다. 군부대에 비유하면 기동정비·야전공병·통신중계·무인기를 포함한 정찰자산 운용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동지원대에 합류시킨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나의 마법.

설령 이 알라쟁이가 각성능력자가 아니었어도 바로 옆에 두기는 찜찜했을 것이다. 전투경험이 풍부하다면 전투가 돌아가는 양상에서 아무래도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나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소?”

“문제가 아주 많아요. 나는 위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나의 빛나는 지성으로 싸장님을 구원해드리고자 동행을 희망하였던 것. 그런데 이런 나를 싸우지 않는 자들의 대열에 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로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이다.”

“싸우지 않는 자들이라니. 그거야말로 부당한 평가로군. 기동지원대는 분명하게 전투의 일부를 구성하는 요소요. 당신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그치만-”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알라의 전사로서 진실만을 말씀해보시오. 나와 당신은 분명 같은 전장에서 같은 싸움을 헤쳐 나온 거요. 따라서 나는 나의 전장에 당신을 동행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지. 내 말이 틀렸소?”

“…….”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마무르는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말을 부정해버리면 전쟁의 기본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되어버리니까.

나는 살짝 대화의 흐름을 틀었다.

“당신은 말했었지. 내가 자력으로 시련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내게 그만큼 많은 알라의 뜻이 머물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라고. 그래, 나와 내 애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어땠소? 합격점을 줄 만했소?”

정찰자산을 운용하는 기동지원대는 전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에 좋은 위치이기도 하다. 지원대의 부하들에겐 오가는 통신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공유하라고 일러두기도 했고. 마무르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면서도 짐짓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장님의 역량이 훌륭하였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는 아직 이교도 요술쟁이 왕의 손아귀 안에 머무르고 있어요. 짐작컨대 싸장님의 위장회사는 계약 때문에라도 멋대로 전장을 이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더욱 면밀하게 지켜볼 것이에요.”

“그러도록 하시오. 나 역시 바라는 바이니.”

“아무튼, 결국 나의 포지션 변경은 없는 것입니까?”

“없소. 맹세한 대로 내 통제를 따르시오.”

“에휴.”

한숨을 내쉰 마무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하는 말.

“싸장님. 나는 맹세를 지킬 것이지만, 부디 불신자의 교만을 경계하시라는 거예요. 믿는 자인 나는 이 땅에서 매우 강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싸장님이 아무리 잘 싸워도 팀원들이 병신이면 게임은 져요. 평화유지군은 병신이다.”

“평화유지군에 대한 평가에는 공감하오만, 뭐 특별히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소?”

“이거다 싶은 건 없어요. 그러나 아무튼 불안하다는 거예요.”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명백히 이상한 현상이다. 왜냐면 나는 그 대단한 미군과 싸우던 시절에도 이렇게 불안했던 적이 없는 천하무쌍의 용자이기 때문에. 경청하십시오. 어쩌면 이 불안감은 알라께서 당신의 전사에게 내려주시는 은혜로운 인도일지도 모른다.”

자아도취가 심한 광신도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근거 없는 불안을 말하는 시점에선 그저 전장에 흔한 신경증을 앓는 인간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저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기 전, 마무르는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중국을 상대로 싸우는 제 동지들의 무용담을 짧게 늘어놓았다. 그냥 들으면 단순한 자랑으로 들리는 말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는 먼 곳에서도 형제들의 근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과시하는 방편이자, 간접적으로 성전의 진행을 상기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마무르의 말대로, 우리는 정부와의 계약 때문에라도 이링가 시 일대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능법인을 계속해서 쓸 만한 도구로 남겨두고, 또 경기 북부 일대를 조직의 영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해둘 필요가 있었다.

다른 법인들과 차별화되는 미담을 좀 만들어놓으면, 사후에 청문회니 뭐니 끌려가서 시간을 낭비할 일은 없겠지.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조금 더 남아 상황을 지켜봐야 할 동기는 있다.

우선은 주술사 왕의 고급장교나 사도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미친 무당년도 잠재적 관계자로서 주의대상에 포함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선순위가 낮은 목표이긴 하지만,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 대지휘관의 핏줄을 손에 넣는 것.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발로레 기동대는 이링가 시에 발이 묶인 무수한 헌터 단체들 가운데 하나였다.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는 이탈리아 정부의 주요 계약자 중 하나이니, 기동대장쯤 되는 인물이 저만 살겠다고 몸을 빼내기는 못내 곤란한 감이 있을 테지.

아마 이건 대지휘관 발다싸레의 체면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의 자원으로 전투단을 창설했으니, 기사단에 적을 둔 높으신 분들에게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는지.

‘병신 같은 귀족 낙하산에게 위험한 탈출을 감행할 용기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경태가 보여준 방송에서 등장한 어느 헌터의 말마따나, 현재 이링가 주(州) 인근의 광활한 공역은 걸핏하면 “대공포 사격에 대공미사일에 플라잉 니그로들까지 나를 죽이겠다고 날아오는” 위험한 하늘이다.

비록 도시가 봉쇄된 상황이기는 해도, 피에르와 그 아들놈 입장에서 당장 생명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가지는 유엔군과 협력세력의 통제하에 있잖은가.

돈을 위해 목숨을 걸어도 좋은 하류인생들이라면 모를까, 부족할 게 없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괜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겠지.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행동에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해가 지기 전, 수연은 놈의 소재를 확인해주었다.

나는 수연 녀석과의 통화를 회상했다.

「타겟의 현재 소재지는 시가지 내의 마운트 로열 호텔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냈지?”

「피에르 본인이 직접 알려준 것입니다. 무사하냐는 문자 한 통을 보냈더니 매우 길고 장황한 답신이 돌아오더군요. 본인과 다른 기동대원들, 현재 머무는 객실의 사진들까지 첨부되어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보나 마나 발정난 이탈리아 수컷다운 구애의 편지나 보냈겠지 싶어, 나는 굳이 전문을 요구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스스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사냥감이라니.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한심하다고 해야 하나.

같은 통화에서 수연은 밀린 보고를 간략히 전달했다. 곳곳에서 철도가 파괴되어 물류 적체가 심화되었고, 다르에스살람의 화물역에서도 차량폭탄 테러가 발생했노라고.

대부분의 전력을 온존하고 있던 「화성무련」의 중국인들은 치솟는 몸값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중이고, 중국 엽사들 사이에선 련주의 혜안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했다.

악마숭배자들에게 넘어간 위성전화 단말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하며, 수연은 곁가지로 미주의 변화를 입에 담았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면에서?”

「기합이 많이 들어간 게 눈에 보입니다.」

“그런가?”

「예. 이전의 박 부장이 ‘형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박 부장은 ‘형님을 위해 죽고 싶은’ 사람 같다고 해야겠군요. 이 둘 사이의 간극은 크지요. 그리고 박 부장만큼은 아닙니다만, 중국지사의 파견인력들 역시 업무 의지가 많이 고양되어 있었습니다. 무언가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글쎄. 전에 해주었던 말들이 기대 이상으로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야.”

「동기부여, 라면……?」

“필요할 때 죽으라고 명령할지언정, 죽음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진 않겠다고 했지.”

사람의 이유 없는 변화는 마땅히 경계해야만 하는 요소. 존재 자체가 비밀이어야 하는 범죄조직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조직의 인적자원 관리에 깊게 관여하는 수연이 미주를 위시한 중국지사 인력들의 변화를 신경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시의 상황을 축약해서 들려주었다. 비서실장이 쓸데없이 주의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게끔.

‘처음부터 전시효과를 염두에 두긴 했지.’

미주는 장차 사장단 합류가 확실시되는 고급 간부이며, 권한만으로는 이미 어지간한 사장급 간부에 필적한다.

그런 고급 간부를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도 없이 굴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아래에 배치된 인력들은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중국지사에 파견한 전투인력이 경호실과 순환근무를 하는 정예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 하겠다.

「그랬군요. 이해가 갑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수연에게 나는 신변안전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항상 너 자신과 함대의 안전에 유의해라. 탄도미사일까지 등판한 전장이니 뭐가 더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시완두 호수엔 이동기지 역할을 하는 다수의 무장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있으며, 호변엔 간이 활주로와 헌터들의 집단숙영지, 내륙수운의 중간거점 역할을 수행하는 야적장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주술사 왕이라면 한 번쯤 타격을 고려할 법한 표적이었다.

무장선박들의 화력이 화력이다 보니 전투단을 직접 보내기는 곤란하지만, 기습적인 공습을 가한다거나 탄도탄을 한 발 쏴본다거나 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저들이 쓰는 구형 탄도탄은 명중률이 많이 낮은 편이지만, 공중폭발탄이나 화학탄을 달아서 쏘면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이미 대비를 하고 있고, 조만간 이 호수와 음테메레 게이트를 중심으로 평화유지군의 방공전력이 배치된다는 정보도 있으니까요.」

음테메레 게이트라면 내가 르완다로의 침투비행을 시작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시완두 호수로부터 고작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호수와 연계된 방공우산을 펼치기에 적합한 입지다.

‘그래야지. 도로와 철길이 끊어졌는데 물길까지 끊어지게끔 내버려두면 쓰나.’

비록 중간에 커다란 댐이 하나 존재하긴 하나, 루피지 강은 이링가 시로부터 약 2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물자를 추진할 수 있는 물길이다. 날아다니는 용팔이들의 비행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것이다.

이 물길마저 차단당할 경우, 남는 보급로라곤 남쪽으로 1,522킬로미터를 우회하는 가느다란 왕복 2차선로가 전부다. 수도 도도마를 경유하여 북쪽으로 우회하는 보다 짧은 길은 왕의 전사들의 습격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주술사 왕의 광신도들은 도보로도 얼마든지 보급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쪽은 그렇지가 못하다. 등짐을 지고 달리는 개인사업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며, 신뢰해도 좋을 인력을 선별할 방법 따윈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전화를 끊기 전, 나는 일전에 경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한마디 격려를 덧붙였다.

“네가 아니었다면 모든 일들이 지금보다 많이 귀찮아졌겠지. 새삼스럽긴 하다만, 네 헌신이 고맙다는 말을 해두고 싶구나.”

「……별말씀을.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반 박자 늦게 돌아오는 대답은 미세하게 톤이 달라져있었다.

“어휴, 저 인간. 그렇게 불안하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여기서까지 게임을 하고 있네.”

경태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돌려보니, 탄약상자 위에 노트북과 마우스를 올려놓고 맨땅에 주저앉아 게임을 즐기는 마무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분노 가득한 표정을 보면 과연 즐기는 게 맞는지는 의문이지만.

저 게임은 분노에 중독된 정신질환 유병자들의 여가생활인가?

통신차량에 탑재된 이동식 위성인터넷 단말은 통신 인프라가 전무한 황무지에서조차 유선 광통신에 준하는 응답속도를 보장해주었다.

이 같은 통신망의 존재는 양날의 칼이었다. 정부계약을 체결한 공능법인들은 사전에 여러 채널을 통한 차량 위치조회에 동의해야 했고, 우리가 조직력과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한 정부 측에서 우리를 구심점으로 삼아 흩어진 정규군과 공능법인들의 재집결을 꾀하는 중이었으니까.

덕분에 우리는 정비를 다 마치고서도 이곳에 발이 묶여있었다.

‘전투단이라기보다는 패가망신한 거지 떼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어찌어찌 정보를 전파받고 모여든 패잔병들은 전력으로선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장비와 물자의 망실 이전에 전투의지가 꺾여버린 게 더 문제일 것이다. 대개의 용병들은 오로지 이기는 싸움에서만 용맹을 발휘한다.

거지 무리의 틈바구니엔 적게나마 미친 무당의 추종자들도 섞여있었다.

주술사 왕의 포위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황상 무당과 그 추종자들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살해의 현장을 마주쳤다. 그러나.

‘물증이 없지.’

있는 거라곤 심증뿐인 만큼 대놓고 공격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연화천군」 본대의 위치는 조회가 가능하지만, 탈것을 이용하지도 않고 피아식별장치를 휴대하지도 않는 현지인 추종자들의 동선은 전장의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증거가 있다 한들, 당장은 공격을 가하기보다 지켜보는 쪽이 더 이득이다.

내가 왜 주술사 왕의 군세를 적극적으로 분쇄해야 한단 말인가?

역할극에 따라 불가피하게 교전을 치러야 할 순간들이 있기는 하나, 장차 굴복하는 흉내를 내서라도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싶은 상대에게 과도한 출혈을 강요할 생각 따윈 없다.

내가 의도적으로 치르는 싸움은 다만 이쪽이 만만찮은 세력임을 과시해두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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