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뱀 (19)
과거 뉴욕 타임즈는 평화유지군을 이렇게 비판했다.
「평화유지군 사령관은 언제나 서로 다른 두 개의 지휘계통에 속해있다. 하나는 유엔. 다른 하나는 자국 정부. 두 지휘계통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언제나 우선시되는 것은 자국 정부로부터 내려온 명령이다.」
이는 평화유지군에 속한 각국 전투부대의 지휘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었다. 겉으로만 하나의 깃발을 내걸고 있을 뿐, 실상은 누더기나 마찬가지인 조직이라는 뜻.
지난 전투에서 평화유지군이 적의 공격을 수동적으로 받아내기만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로 손발이 안 맞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찌 보면, 평화유지군은 후루 연합전선보다도 거시적인 결속력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연합전선은 하다못해 주술사 왕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공유하기라도 하지.
내가 보기에 평화유지군의 가장 큰 구멍은 인도에서 파견한 병력들이었다.
‘지난 전투에선 존재감이 아예 없다시피 했지.’
아예 따로 움직이는 중국군을 제외하면 병력 비중은 가장 큰 놈들이, 막상 싸움이 벌어졌을 땐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개발도상국들에게 있어서 평화유지군 임무 참여는 쏠쏠한 외화획득의 수단이다. 그리고 인도는 이런 쪽에서 예로부터 악명이 높았다. 돈은 돈대로 받아가면서 싸움은 그게 아무리 작은 싸움이라도 이를 악물고 회피한다는 악명이.
지난 후루 연합전선과의 전투 현장에 있었던 미국의 한 종군기자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에 현장 관계자들의 증언을 더하여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던 인도군의 행태를 성토했다.
「저들은 2012년의 고마 사태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다!」
고마라면 내가 르완다 대통령의 의뢰로 침투했던 콩고 민주공화국의 동쪽 변경과 가까운 도시다.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
인도군은 과거 여기서도 평화유지군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무단 철수를 감행한 전적이 있었다. 이는 인도 본국의 지시에 따른 것. 인도군이 물러난 자리에선 당연히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르완다의 대통령이 배후에서 조장한 학살극이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강력히 항의하자, 인도 정부는 평화유지 임무에 파견한 자국군 전부를 철수시키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지.
인도군은 당시 평화유지군에서 가장 많은 머릿수를 차지하는 전력이었다. 이들이 빠지면 평화유지군은 총체적인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만다. 유엔 총장은 인도의 압력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으로 돌아가는 꼴은 이번에도 비슷했다.
삐이이이익-!
높고 요란한 호각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나는 눈을 찌푸린 채 소음의 근원을 찾았다. 길게 호각을 불어 시선을 모은 중년인은 붉은 완장을 찬 「해병대 엽사회」의 관계자였다. 배후엔 같은 복장을 한 일군의 엽사들이 따르고 있다.
「전체 주모오오오옥!」
각성능력자의 기본 성량으로도 충분할 것을, 굳이 확성기를 써가면서까지 외치는 소리.
「현시각부로 이 구역은 우리 해병대 엽사회가 통제하겠습니다! 각 공능법인의 엽사분들은 본 해병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자칭 해병이 외치고 있는 곳은 해병대 엽사회의 담당구역이 아니었다. 견고한 진지 안에서 느슨하게 풀어져있던 각성능력자들은 황당해하는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뭔 개소리야?! 당신들이 왜 여기서 설쳐?!”
누군가 목소리를 높여 성내듯이 항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 소속이 다른 중무장 용팔이들 간의 기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의 구역에 와서 월권을 시도하는 자칭 해병에게는 나름의 대의가 있었다.
「지난 싸움에서 우리가 왜 졸전을 면치 못했는지 모릅니까? 각각의 공능법인들이 저마다 다 따로 놀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지휘체계는 엉망진창이에요!」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언제까지나 같은 실패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확고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 해병대 엽사회가 그 중심이 되겠습니다! 애국적인 대한 엽사분들의 양해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아니 씨발, 그러니까 그 중심을 왜 당신들이 맡겠다는 건데? 차라리 개마에서 나온 사람이 그러면 또 몰라! 당신들 지난 전투에서 빤쓰런이나 치기밖에 더했나? 팬티 바람으로 죽은 시체들이 발견되었다더만. 숫자만 많지 순 가오나 잡을 줄 아는 허당 새끼들이 무슨-”
「뭐 이 새끼야? 빤쓰런? 너 말 다했어?! 이 어린 노무 새끼가 어디 어른한테! 내가 너만 한 자식이 있는 사람이야!」
해병대 전우회에서 각성능력자들이 모여 조직했다는 해병대 엽사회는 전투력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 그러나 머릿수는 가장 많다는 점에서 인도군과 포지션이 닮아있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전체 공능법인들의 평균적인 수준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해병대 전우회의 엄격한 기수 문화가 법인 내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나. 갑작스레 초능력을 얻은 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라도 질서를 잡을 수 있다는 건, 분명 다른 조직들이 가지지 못한 비교우위겠지.
다만 정부의 선별을 거친 단체들 사이에선 뒤떨어질 보일 따름. 실적보다는 규모를 내세워 자리를 얻은 자들이니까.
‘박살 나겠군.’
단 한 번의 실전경험은 많은 것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나 차후 상황 전개의 변수가 될까 싶어 각 공능법인들의 상태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듯했다.
법인 파견장교들의 근태도 그대로였다. 서로 다른 법인에 파견된 장교들은 한정된 승진 TO를 두고 다투는 경쟁관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TO를 따낼 자신이 없는 자들, 그리고 불확실한 승진보다 확실한 돈을 더 좋아하는 자들은 일찌감치 보험을 드는 데 열중했고.
여기서의 보험은 당연히 전관예우다. 법인에 대한 평가-주로 공공의뢰 수행평가-를 최대한 후하게 주는 대가로 사외이사직이든 뭐든 한자리 약속을 받아두는 것. 군인들에겐 일이 없어도 초과근무를 찍는 수준으로 당연한 밥그릇 챙기기였다.
정책상의 수렴진화를 거친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대동소이했다.
다시금 되새기건대, 전쟁은 잘 싸우는 쪽이 아니라 삽질을 덜 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평화유지군과 다국적 헌터집단들의 비교우위는 단위제대의 장비 및 개별적인 전투력에 국한될 따름이었다.
이런 와중에 경태는 유사시의 행동계획에 보완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올렸다.
“느낌이 좀 많이 쎄하지 말입니다.”
“뭐가?”
“그 정신 나간 무당 아줌마요.”
러기드 태블릿에 전술지도를 띄운 경태가 공능법인 「연화암」, 그리고 김연화를 추종하는 현지인 세력의 배치·동선·일자별 특기사항 등을 표시하며 말을 이었다.
“보급이 별개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높으신 양반들이 나눠놓은 행정적인 구분일 뿐이지, 현장에선 서로 얽힐 일이 많단 말이죠. 이 친구들의 물류 흐름을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뭐, 확증편향일 수도 있겠지만요.”
나는 경태가 표시한 정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경태가 가장 수상하게 보고 있는 것은 용처와 사용량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폭약과 탄약의 흐름이었고, 그다음은 평화유지군의 보급·지휘 결절을 토막 치기에 좋은 배치들이었다.
“……사보타주? 아니면 적전 배반?”
내 말에 경태가 크게 한 번 끄덕여 보인다.
“그 얼굴 낭비 심한 아줌마는 자기가 주력 대결로 현지 주술사들을 굴복시켰다고 했죠. 근데 그게 사실은 주술사 왕이나 왕의 일곱 사도들 중 하나를 만나 거꾸로 감화를 당한 것이었다…… 라는 시나리오는 어떨까요? 그 콜레로의 헤그하라는 사람만 해도 그럴싸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던데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긴 하나, 기본적인 사고방식부터가 다른 차원에 가있는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이성과 합리로만 이해하려 들어선 곤란할 것이다.
“그래서, 계획은?”
“보십시오.”
경태는 화면을 넘겨 변경된 계획의 상세를 보여주었다. 기존 계획과 비교하여 바뀐 부분들만 명료하게 뽑아놓았으므로 그 내역을 뇌리에 새기기가 어렵지 않았다.
“잘도 여기까지 짜놨구나. 시간이 빠듯했을 텐데.”
“에이.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제가 바로 김경태입니다, 김경태. 이 정도는 그냥 슥 하면 슥 하고 나오는 거죠.”
“…….”
“누님한테는 조금 미안하네요. 제가 처음부터 여기까지 딱 파악해서 계획을 세웠어야 하는데, 이게 또 하필 자려고 누우니까 딱 생각이 스치는 바람에……. 한밤중에 예고도 없이 변경사항을 통보했으니 갑작스러운 추가업무를 소화하느라 잠을 설쳤을 겁니다. 시간을 끌어도 무방한 사안이 아니었으니까요.”
현장에서 거두는 빛나는 성과들은 그게 무엇이든 견실한 병참과 후방지원의 토대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인원·무기·탄약·식량·연료·기타 장비와 치장 물자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조달하여 어떤 경로를 통해 적시에 수송을 완료하는가. 이를 변화무쌍한 현장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이 대륙에서 단 한 번도 후방지원과 관련하여 난맥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필요한 순간 필요한 장소에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현장의 경태와 후방의 수연이 그만큼 완벽한 호흡으로 일을 처리해주었다는 이야기다.
“누님께 전화해서 항상 수고가 많다고 격려 한마디 해주시죠.”
싱글빙글거리는 경태의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 같은 상황에 용무도 없이 고작 그 한마디 하려고 연락을 하란 말이냐?”
“못할 건 또 뭡니까? 그 한마디 하려고 연락을 했다고 하면 누님이 많이 좋아할걸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하더라도요.”
“…….”
이 녀석은 수연을 이렇게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헤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평소 칭찬과 격려에 인색하게 구는 리더였다면 또 모를까, 이번 일에 대한 치하는 추후 업무평가와 논공행상을 실시할 때 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뭐,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이 녀석들에게 뭔가 선물을 주는 것도 괜찮겠군.’
조직의 지도자는 특정 부하를 대놓고 편애한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그건 조직문화의 건전성을 저해하고 아랫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내가 부하들에게 주는 선물은 근속선물과 특정 사안에 대한 표창의 부상(副賞)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먹거나 마시는 것은 예외로 치고.
그러나 나에 대한 경태와 수연의 충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보다 사적인 느낌으로 선물을 사여하더라도 잡음이 생기지는 않을 터.
요즘 세대는 무엇을 주면 좋아하려나.
여의도 김 씨를 위시한 조직의 중역과 사장단들에겐 순금명패나 금 거북이, 명품시계, 외제차, 고가의 주택 같은 것들을 주면 충분했었지만,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경태와 수연을 상대로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
나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고민을 의식의 한쪽으로 밀어냈다.
경태가 가져온 보고는 사후승인을 위한 것이었다. 필요할 때 두 핵심측근이 실시하는 선조치 후보고는 이제 와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 나는 별다른 첨언을 덧붙이지 않고 모든 변경사항을 수용했다.
“가서 일 봐라. 난 이걸 숙지하고 있을 테니.”
“옙.”
경태의 모든 계획은 경태 녀석이 ‘맵핵’이라고 즐겨 부르는 내 전장파악능력에 기초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개판이라는 게 느껴지는군.’
당연한 말이지만, 적의 공격을 가정하여 세운 대응계획들은 적이 어떻게 치고 들어올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고로 경태가 수립한 대응계획들은 곧 평화유지군 세력의 약점을 난도질하는 공격계획의 데칼코마니이기도 했다.
이토록 무질서가 가득한 전장에서 파국은 정해진 필연처럼 찾아왔다.
구미권 언론들은 이날, 6월 17일부터 개시된 주술사 왕의 대공세를 「이링가 참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