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92화 (292/561)

#32. 뱀 (18)

“뱀이라고?”

“그렇다.”

반문하는 내게 깊이 끄덕여 보이는 니쿠수빌라.

“그것은 위대하고도 오래된 존재. 땅속 깊은 곳에서 천둥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을 지배하는 자. 콜레로의 땅굴에서 유구한 세월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 주술사 왕은 그 고대의 뱀을 굴복시켜 베나의 대추장에게 내려주었다. 베나의 대추장이 당대의 헤그하가 된 것이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느낌상 루구루족의 신화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은데,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확인합시다. 우선, 그 고대의 뱀이라는 건 뭐요?”

“이미 다 이야기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저의 강에 살았던 것이라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 거대한 뱀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가버린다. 물룬구, 인간과 세상을 만드신 자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두렵고도 강대한 존재란 말이다. 주술사 왕은 그런 존재를 사역하고 있다.”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는 거요?”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허황된 소리로 들릴는지. 개명한 교육을 받고 올바른 믿음을 가진 나 역시,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사람들의 두려움이 빚어낸 공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보았다.”

“……보았다고? 그 뱀을?”

“그렇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목격했다. 비늘이 없는 몸뚱이에 무수한 아기의 얼굴들이 박혀있는 거대한 뱀이, 달빛 내리는 숲의 그늘을 빠르게 기어가는 광경을.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 살펴보니 기어간 자국이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알라께 맹세컨대,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큰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아, 신께서 나를 보호하시길…….”

슬슬 이거 미친 인간이 아닌가 싶은 고민이 드는데. 마무르 이 새끼는 데리고 와도 뭐 이런 인간을 데리고 와서는.

그러나 맛이 간 인간의 진술에서도 건져내려면 건져낼 것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심문을 이어갔다.

콜레로는 지저의 강이 흐르는 곳을 의미했고, 헤그하는 현재 베나 씨족의 우두머리가 자칭하고 있는 옛 주술사의 이름이었다.

“음게타의 음바고. 키놀레의 킨갈루. 그리고 콜레로의 헤그하. 이 셋은 루구루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위대했던 주술사들이다. 베나의 대족장은 본래의 이름을 버리고 콜레로의 헤그하로 다시 태어났지.”

“옛 주술사의 이름을 자칭하는 건 그가 과거에 지녔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 주술사의 본질을 계승하기 위해서지.”

“……?”

“외지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오래도록 내려온 이름엔 그 자체로 마법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름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다. 이름을 이어받은 자는 과거에 그 이름을 썼던 자들과 연속성을 이루는 하나가 된다. 주술사 헤그하가 가졌던 것들을 주장할 권리는 이름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마무르는 옆에서 들어주기 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색이 신앙의 형제라는 자가 마법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으니 듣기 괴로울 만도 하지. 무슬림의 관점에서, 주술신앙은 알라 이외의 힘을 신성시하는 삿된 가르침이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진다는 하소연이 나올 법한 이유였다.

나는 이런 무가치한 헛소리들의 갈피에서 쓸 만한 정보들을 골라내고, 또 그런 정보가 나오도록 심문을 이끌어갔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부족과 씨족들이 베나의 우두머리에게 무릎을 꿇은 거요?”

“밤을 살피는 자들, 숲을 지키는 자들, 풀무를 만드는 자들과 철광석을 캐는 자들, 숯을 굽고 모루를 두드리는 자들도 모두 헤그하의 아래로 들어갔다. 하늘을 찌르는 산과 그 주변지역 전체가 사실상 통일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

하늘을 찌르는 산은 보나마나 울루구루 산맥을 의미하는 것일 터.

서로 다른 부족과 씨족들이 직업적인 역할 구분으로 나뉘는 건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역할의 구분이지 계급의 구분은 아니라는 점. 그나마 그 역할의 구분도 가계에 따른 정체성의 구분일 뿐 카스트만큼 엄격한 천부적 기능 배분이 아니었다.

니쿠수빌라는 그렇게 느슨한 정체성의 구분마저 외부세계와의 교류로 인하여 희미해지고 있었으되, 베나의 대족장은 이를 과거 이상으로 강화하려 하고 있노라 증언했다.

나는 증언을 듣고 생각했다.

‘이건 부족사회에 적합한 전시체제 이식이라고 봐야 하나?’

카스트 제도가 여러모로 좆같은 것이긴 해도, 카스트에 내재된 정교한 사회적 분업체계는 전근대 인도의 높은 생산성을 뒷받침했다. 공동체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산 시스템으로 기능했던 까닭이다.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어릴 때부터 부품으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해 늙어 죽을 때까지 기술을 갈고 닦는 시스템. 이런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확립하여 초능력자 숙련공들을 육성하면, 루구루족이 전쟁에 최적화된 기계적 공동체로 거듭나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당장은 여러모로 모자란 구석이 많을 테지만.

“내가 조사한 것과는 조금 다른데.”

나는 앞서 수연이 올렸던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네들의 주요 씨족들 중엔 추마니 폰다니 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소만. 그런 씨족들은 어떻게 된 거요? 아직 베나에게 저항하고 있는 건가?”

“추마가 철광석을 캐는 자들이고, 폰다가 숯을 굽고 모루를 두드리는 자들이다. 나는 그저 이방인인 당신이 이해하기 쉽게끔 뜻을 풀어 말했을 뿐이지.”

“그렇군…….”

단순한 명칭의 문제였나.

나는 보고서의 가장 비관적인 예측에 니쿠수빌라의 진술을 더하여 장차 출현할 루구루 전투단의 규모를 추산했다. 이러한 추산에 근거를 제공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심문엔 최소한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초 내가 품었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효용이었다.

‘내가 바랐던 건 주술사 왕과의 교섭창구였건만.’

마무르에게 루구루족과의 접점을 만들어보라 의뢰했던 건 그 너머에 있을 주술사 왕을 겨냥한 포석이었다. 그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든, 아니면 저 미친 무당 김연화가 하는 짓처럼 주력 대결로 굴복을 받아내든, 주술사 왕은 원탁과의 싸움에서 와일드카드로 삼기에 충분한 패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번 함정 건만 해도 그렇다. 얼마나 거대한 대전략을 구상한 것이며,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실행하는 것인가. 거대한 대륙에서 세력을 일구는 와중에, 연대가 허술할 수밖에 없는 연합세력을 거느린 채로, 한 개 전역에서 이렇게까지 정교한 계획을 진행하다니.

가장 훌륭한 장수는 싸우기 전에 승리를 확정짓는 자다. 여기에 선동가와 행정가로서의 자질도 엿보이니, 주술사 왕은 겪으면 겪을수록 욕심이 나는 고급스러운 인적자원이었다.

이 인간을 아군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뱀, 콜레로의 뱀을 조심해야 한다.”

니쿠수빌라는 진술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뱀의 위험성을 반복해서 경고했다.

이를 듣고 내가 한 생각은 주술사 왕이 현지의 문화적 코드들을 곧잘 활용한다는 정도였다. 콩고 동북부에서는 킨도키를, 여기서는 콜레로의 뱀을.

이뿐인가. 대륙 서단에서는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해묵은 독립의 불씨를 이용하기도 했지.

모든 성공에는 이유가 있다.

부하들로 하여금 니쿠수빌라를 후방으로 이송시키도록 조치한 후, 나는 마무르와 독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를 나만큼 존중하려 들지 않는군.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다라-아담-켈에도 항의를 전해두도록 하겠소.”

“오우…….”

“이것은 당신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나의 두 번째 경고이며, 아마도 세 번째는 존재하지 않을 거요. 반드시 당신이 참관인을 맡아야 할 이유는 없지.”

5대 공장 기술자들의 2진까지 수송을 마친 시점에서, 내 사업자로서의 신용은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성전연합은 5대 공장을 통해 전해질 내 항의를 가볍게 흘려넘기지 못할 것이다.

아쉬운 건 종교적 명성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그들이지, 내가 아니니까.

마무르는 입술을 삐죽였다.

“알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동행을 수락하십시오. 싸장님은 매우 매우 소중한 사람. 나는 나의 빛나는 지성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동행하시오.”

“정말입니까?”

“단, 조건이 있소. 내가 요구하기 전까진 입 다물고 무조건 통제에 따라줄 것. 이를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팔다리를 묶어 짐짝처럼 보내버릴 거요.”

내가 동행을 승낙하는 것은 이 인간에게 한 번쯤 내 위기대응능력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그래야 이번처럼 번거로운 일이 나중에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흘러넘치는 인간을 다루는 한 방편이었다.

“맹세합니다.”

마무르는 내 요구를 지체 없이 받아들였다.

“싸장님이 나 마무르의 도움 없이 시련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싸장님에게 그만큼 많은 알라의 뜻이 머물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후에 싸장님을 물가에 내놓은 불신자처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나로서도 달가운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죽을 것이 두렵지는 않소?”

“나는 알라의 전사이며,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곧 알라의 뜻입니다. 바꿔 말해 나의 죽음은 높으신 알라의 계획 속에서 정해져 있는 것이에요. 오직 그분만이 나를 죽일 수 있으니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알라는 신이고 나는 무적입니다.”

속 편해서 좋겠군. 누구는 거의 매일 같이 악몽을 꾸며 지내는데.

마무르에겐 공능법인 개마가 영입한 미국인 위장신분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이 아니꼬운 광신도에게 숙소를 배정해주었다. 숙소라고 해봐야 기동차량 옆에 쳐놓은 야전텐트 한 동에 불과했지만.

솨아아아-

고원의 밤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거친 흙 알갱이가 섞인 바람을 맞으며, 나는 야음에 잠긴 전선을 눈에 담았다.

머릿수만 수천에 달하는 각성능력자들은 한나절 만에 지형을 바꿀 수도 있는 거대한 물리력이었다. 그러므로 궁지에 몰린 척하는 후루 연합전선의 미끼 군세와 국제연합군 세력의 대치구도가 하루 사이에 진지전(陳地戰)의 형태로 변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고수방어에 돌입한 미끼 군세는 늦은 시간까지도 견고한 축성(築城)과 참호선 구축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내 눈엔 저들이 파는 땅굴의 구조까지 선명하게 들어온다.

이에 대하여 국제연합군은 포격과 폭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자들의 존재가 확인되었기 때문.

다만 국제연합군은 사방에 흩어져있던 전력을 다닥다닥 끌어모아 2중 3중의 포위망을 구축했다. 각성능력자 전투단의 기상천외한 돌파력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을 포위망을. 이대로 느긋하게 말려죽이면서 협상을 시도해도 남는 장사가 되리라는 계산이 엿보인다.

‘굳이 앞장서서 희생을 감수할 놈들도 없고.’

적이 방어를 굳힌 상황에서 누가 총대를 메고 돌파구를 개척할 것인가. 군인들의 죽음은 정치인들의 부담이다. 그리고 위험한 일에 용병들을 앞세우려면 매우 많은 추가비용을 지출해야만 한다.

그러니 대치국면이 늘어질 수밖에.

이 대치국면을 경태는 이렇게 평가했다.

「알렉산더 대왕과 싸우는 스키타이인들을 보는 것 같지 말입니다.」

주술사 왕이 알렉산더 대왕이고, 평화유지군의 깃발을 든 국제연합군이 스키타이인들 같다는 소리였다. 먼저 미끼를 던져 적을 모아놓고 단번에 감싸 죽이는 전술이 전략적인 단위에서 재현되고 있노라고.

적들이 진짜 공세를 개시할 시점은 대략적인 예측이 가능했다. 평화유지군이 얼마나 치기 좋은 상태인가를 보면 답이 나오니까.

콰쾅! 콰콰쾅! 투타타탕!

이 와중에 울리는 폭음과 총성은 미친 무당 김연화의 가르침을 계승한 현지 주술사들의 제례의식이었다. 주술사 왕의 기운을 몰아내어 적을 약화시키겠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굿판. 미친 무당은 제자들의 제례를 지켜보며 훈수를 두는 중이다.

나는 못내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 곱씹었던 바, 모든 성공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저런 짓거리가 성공가도를 이어가는 것에서 현실감을 느끼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김연화와 그 추종자들은 현재 미국정부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일이건 근시안적으로 비용을 따져대는 백악관의 미치광이 때문에, 미국은 아프리카의 평화유지 임무에 매우 적은 규모의 병력만을 파견한 상태였다.

미국이 계속해서 세계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바, 미국의 각계각층에서 평화유지군을 증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그 모든 의견들을 단호하게 묵살해버렸다.

그런 와중에 더글라스 맥아더의 신내림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가 백악관 참모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적은 비용을 들여 그 이상의 지분을 챙길 수 있을 법한 수단이.

취재를 나온 미국 언론의 종군기자가 당신은 어느 나라에 충성하느냐고 묻자, 김연화의 대답이 이러했다지.

「미국 육군 원수는 당연히 미국에 충성하고 백악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원수의 신령께서 그러하시니 이 몸은 다만 장군의 의지를 따를 뿐!」

김연화와 추종자들이 쓸데없이 소모하는 탄약은 평화유지군 세력과는 완전히 독립된 보급체계로 받아오는 것이었다. 평화유지군 사령부와 한국군 타라자 부대 모두가 미국에 떠넘길 수 있는 부담은 떠넘기고 싶어 했던 까닭이다. 한편으로 이는 외교적 주도권 다툼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저들이 얼마의 화약과 실탄을 받아 어디에 배분하고 어떻게 써먹는지는 오직 저들만이 알고 있을 사정이었다.

미친 무당이 부채를 펼치며 소리 지른다.

“외쳐! 메이크 아메리카 그뤠잇 어게인!”

「Make america great again!」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다.

무당의 정보력엔 솔직히 조금 의문이 있었다. 밤부티 사람들에게까지 닿는 정보망이 놀랍기는 했지만, 당장 가까이에 있는 함정에 대해선 깜깜할 정도로 모르고 있는 듯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경구의 또 다른 실례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난장판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새롭게 바라보는 방향엔 멀찍이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 발로레 기동대의 숙영지가 있었다.

‘저것들이 여기까지 들어왔단 말이지…….’

상황변화와 기회비용을 비교하여 우선순위를 낮게 재조정했던 사냥감이지만, 알아서 사지로 기어들어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잘만 하면 거대한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부수적인 목표 하나를 추가로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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