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뱀 (16)
차단진지의 배후지대에서는 마력장을 비교적 넓게 전개할 수 있었다. 강력한 산탄 폭풍이 강습보병들의 무전기를 모조리 박살내버렸으니, 사지 깊숙이 들어온 적들을 살려서 보내지만 않으면 된다.
후방 유개호와 교통호 부근에 분분히 떨어져 내린 적 로켓강습보병들은, 내 확장된 존재감을 감지하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맹수의 냄새를 맡은 소동물들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동물들과 달리, 왕의 전사들의 전율은 찰나의 머뭇거림에 불과했다. 강대한 존재감에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각성체 전투코끼리로 적응훈련이라도 시켰나?’
전사들은 마력장의 중심- 즉 내가 엄폐한 교통호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겨누며 일제히 쇄도했다. 사전에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한 훈련이 있었던 모양이다. 산탄 폭풍에 휩쓸려 흩어져버린 상황에서 통일된 행동을 보여주다니.
물론 로켓 부스터를 활용한 맹렬한 돌진이 정확할 순 없었다. 마력장을 느끼는 감각만으로 그 중심을 겨냥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므로 전사들의 급속 기동은 일정한 오차범위를 두고 어지럽게 어긋나는 직선들이었다. 실력 없는 골퍼가 홀을 노려 치는 공 같은 동선들.
이 어긋남은 곧 빗발치는 사격이 두렵지 않은 이유이자, 내게 주어지는 대응시간의 여유이기도 했다.
‘차라리 잘됐지.’
알아서 내게로 모여 준다니. 전력을 집중해 강한 적부터 배제할 겸 재집결을 꾀한다는 발상인 것 같은데, 이건 내게도 형편이 좋다.
찰캉- 초연의 한가운데에서 맑게 울리는 쇳소리. 나는 참호의 벽에 기대어 대구경 반자동 라이플의 주퇴복좌기를 전진시켰다. 총열 전체가 후퇴 전진하며 반동을 받아내도록 설계된 물건이다.
콰앙!
라이플이 불을 뿜는 순간, 참호 밖에서 직선으로 다가오던 전사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철갑탄이 깨고 나간 투구 뒤쪽으로 세차게 이어지는 뇌수의 방출.
직후 또 다른 왕의 전사가 수평비행에 가까운 질주와 팝업 기동(급속상승 후 급속하강)으로 다이빙을 하듯 교통호에 뛰어들었다.
“Kwa ajili ya mfalme!”
근접경호를 맡은 부하들의 즉각적인 대응사격이 전사의 전신을 난타한다. 고통스럽게 무기를 놓친 전사는 착륙과 동시에 내게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뿌득 소리가 나도록 옆으로 꺾이는 허리. 부러진 갈비뼈들이 폐를 찢어발겼다. 각성능력자라도 감당이 안 되는 부상이다.
“Nighufuru…… zambi zote…… zangu…… nikubali…….”
나는 쓰러진 채 헐떡이는 광신도의 흉곽을 힘과 무게로 밟아 으스러뜨렸다. 입으로 울컥 피를 쏟아내고서 절명하는 왕의 전사.
느슨하게 이완되는 망자의 얼굴 위로 굵은 탄피가 떨어진다. 콰앙! 구불구불한 교통호를 돌아 출현한 새로운 전사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나를 발견하고서 로켓 부스터를 점화하는 순간 총탄을 맞은 까닭이다.
놈이 들고 있던 대구경 샷건과 무거운 도끼가 바닥을 나뒹군다. 후자는 참호 속 근접격투를 위해 뽑아들었을 무기였다. 총을 한 손으로 옮겨 잡은 나는 도끼를 염동력으로 불러들였다. 허공을 격하여 날아와 내 손에 잡히는 강철 도끼. 도끼의 손잡이엔 전사의 체온이 미지근히 묻어있었다.
허공에서 돌던 인간 팽이가 바닥과 충돌하여 물수제비처럼 튄다.
“Ku, Kutomba……!”
돌아버린 평형기관의 영향으로 비틀비틀 일어서는 전사를 향해, 나는 전신의 힘에 염동력을 더하여 냉병기를 투척했다. 전사의 낯짝에 도끼날이 박힌다. 대구경탄을 맞고도 버틴 중장갑 보병의 죽음이었다.
“후방에 적 3인! 슬러그탄 방어!”
뒤를 돌아본 내가 경고한 직후, 참호 모퉁이에서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는 전사들. 산탄 폭풍을 맞고도 살아남은 자들답게 예외 없이 전신갑주를 두르고 있다.
“Na mbingu sabaa kugeuliwa!”
하나는 정면으로, 둘은 로켓 점프로 참호 좌우 상단을 점하며 달려든다. 회피기동을 겸하는 입체공격. 콰쾅, 쾅! 부하들은 대구경 슬러그탄 세례를 엄폐물과 방탄방패로 받아내며 반격탄을 날렸다. 방어력을 충실하게 갖춘 중무장 각성자들의 난타전.
디딤 발을 미끄러뜨려 전후를 좌우로 바꾼 나는, 자세를 낮추며 좌우로 한 발씩의 사격을 가했다.
콰앙! 쾅!
좌로 갈긴 탄환은 부하들의 좌상단을 점한 전사의 복부를 후려쳤고, 우로 갈긴 탄환은 구부러지는 교통호 벽을 때려 막 모퉁이를 돌아오려던 적 전사의 발걸음을 지체시켰다. 이 짧은 지체를 틈타 자세를 고친 나는, 다음 순간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전사를 안정적인 조준사격으로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Tawakali kwa hongo!”
팝업 기동으로 다이빙을 할 때에도, 모퉁이를 돌 때에도 저들은 바지런히 소리를 질러댔다. 필시 저들 나름의 피아식별수단이겠지.
의도치 않게 흩어진 상황에선, 아군에 대한 오인공격을 경계하는 동시에 서로를 불러들일 방편이 필요하다. 피아간의 언어장벽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적은 제법 분전하긴 했지만, 산탄 폭풍에 휘말린 시점에서 승기는 이미 기울어있었다. 중장갑을 두른 자들이라도 장갑의 틈새를 파고든 볼베어링에 부상을 입은 경우가 많았으니.
나는 탄창을 교환하며 무전을 때렸다.
“솔개 파파! 사령이다! 기지점 브라보 하나에 공격 준비! 탄종, 무유도 로켓! 표적, 적 장갑차량! 준비되면 보고!”
내가 내 역할을 다하려면 지엽적인 교전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나는 어느덧 통상 시야의 가시거리를 코앞에 둔 증기전차를 쏘아보았다.
‘두 대는 알아서 탈락했군.’
저들의 증기전차는 험지 주행의 안정성도, 무한궤도의 품질도 좋지 못했다. 승조원들의 숙련도 또한 훌륭한 편은 아니었으니, 거친 산지를 기어오르던 증기전차 둘이 기동불능에 빠진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낙오된 전차들은 고정포대로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주포가 전방으로 고정된 이 전차들은 차체를 틀어 조준을 해야 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제는 그저 기관총 달린 토치카 겸 연막탄 투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로켓강습보병 둘을 더 사살했을 때 솔개의 보고가 들어왔다.
「당소 솔개 파파. 공격 위치에 도달하였음.」
“대기! 신호하면, 콜록, 신호하면 발사!”
「대기. 신호하면 발사.」
매캐한 바람 탓에 갑작스레 밭은기침이 튀어나왔다. 이 순간에도 여러 산등성이들이 타오르고 있다. 만약 일반적인 숲처럼 식생의 밀도가 높았다면, 양측 모두 전투고 뭐고 화마를 피해 달아날 생각부터 해야 했을 것이다.
“지금! 쏴!”
하늘에서 직사로 쏘아진 무유도 로켓이 증기전차를 대각선으로 파고든다. 방어력의 태반을 전면에 때려 박은 전차는 측후방의 공중으로부터 가해지는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끼아아아아악-!”
나는 증기전차의 균열에서 새어나오는 비명들을 들었다. 깨어진 압력관에서 새어나오는 고온 고압의 증기에 산 채로 지져지는 각성능력자들의 절규. 그렇게 죽는 자들 가운데엔 공간 활용의 효율을 더하고자 태웠을 소년병 발화능력자도 끼어있었다.
압력용기 자체가 깨졌더라면 차라리 고통이 적었을 것을.
쐐애애애액-
내가 사지 멀쩡한 강습보병들을 다 정리할 즈음, 하늘에서 제트 바이크와는 결이 다른 비행소음이 들려왔다. 긴급출격으로 뜬 국제연합군의 다목적 전투기였다. 숫자는 겨우 둘. 라운델(국적 식별기호)을 보면 둘 다 독일기다.
그러나 현 상황에선 둘도 많이 온 것이었다. 공중지원 요청은 전 대륙에 걸쳐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국제연합군 구성국들의 공군 가동률은 형편없이 떨어져있는 상태니까.
유럽 병신들.
아프리카 안정화 임무에 뛰어든 유럽 국가들 가운데, 보유한 공군 기체들의 가동률이 50%를 넘어가는 국가는 영국이 유일했다.
가동률이 가장 낮은 독일 같은 경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체가 전투기와 공격기를 더해 고작 일곱 기밖에 되지 않을 지경. 그 일곱 기를 아프리카 방면에만 몰아서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어떤 머저리가 이 난장판에 공중지원을 호출했지?’
지금은 공중지원을 요청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전장이 불투명도가 높을뿐더러, 적아의 거리가 위험할 정도로 가깝지 않은가. 이럴 땐 부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두 전투기가 피아식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저공비행을 감행했으나, 나는 그 신중한 움직임마저 신경에 거슬렸다. 파일럿들의 긴장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조종간을 쥔 장갑 속에 진득한 땀이 들어차있다.
기체 가동률 저하로 연간 필수 비행시간조차 채우지 못했을 풋내기들이었다.
“전원, 오폭에 대비해라!”
걸프전에서 발생한 다국적군 사상자는 둘 중 한 명이 아군에게 당했다. 나는 누구도 바라지 않는 진내사격(陣內射擊)이 임박했음을 예감했다. 그게 우리의 일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전투기 하나가 심상찮은 비행경로를 잡는다 싶더니, 황당한 지점을 겨냥해 2천 파운드 항공폭탄을 투발한다.
「아잇, 시팔! 미친 새끼들이 어디다 대고 폭탄을 떨궈?!」
폭발 여파로 진감하는 참호 속에서, 한껏 웅크린 경태가 무전으로 내지르는 불만과 욕설. 아무런 유도도 없이 떨어진 폭탄은 우리 측 차단진지로부터 겨우 40미터 이격된 지점에 작렬했다. 견고하게 구축한 참호선의 일각이 진동을 못 이겨 무너져 내린다. 살상반경이 33.5미터, 부상위험반경은 350미터나 되는 폭탄이었다.
항공지원에서 40미터는 그냥 오차범위일 따름. 정말로 재수가 나빴으면 저 폭탄은 내 애들이 있는 참호 안쪽으로, 혹은 내 머리 위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어처구니없게 죽을 뻔했군.’
물론 정말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작 한 발뿐이라면 발화억제를 써서 어떻게든 불발탄을 만들어놓았을 테니. 혹은 폭발을 지연시켜 지표 아래로 깊게 처박혔을 때 터트리거나.
그러나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능한 아군은 유능한 적군보다도 위험하다. 아무리 일이라지만, 내가 저런 새끼들과 같은 편 흉내를 내고 있어야 한다니.
「괜찮으십니까, 형님?!」
“이쪽은 아무 이상 없다. 마무리에 집중하도록!”
「옙!」
항공폭탄을 얻어맞은 적들은 더 이상의 공격을 단념했다. 공중보병의 강습이 들어갔는데도 동요하지 않는 방어선을, 이렇게 폭격까지 맞고서 뚫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섰을 테지.
뿌부우우우-
나팔소리와 함께 조명탄이 터진다. 전투가 느지막한 저물녘에 시작되었기에, 어스름이 내린 하늘을 배경으로 터지는 인공조명들은 먼젓번보다 선명한 광채를 내뿜었다.
바야흐로 거짓 패주를 꾸미기에 적합한 시간이며, 저들은 여기까지 계산하고서 전투개시 시점을 골랐을 터였다.
“Mafungo! mafungo!”
적들은 무수한 시체들을 남겨둔 채 물러났다. 거동도, 이송도 불가능한 부상자들은 즉석에서 처리된다. 이런 공세에 동원된 걸 보면 딱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지도 않겠으나, 당사자들은 필시 이 공세의 진정한 의도를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죽는 자와 죽이는 자 사이엔 잠깐이나마 종교적인 경건함이 깃들었다. 죽는 자는 느낌상 기도문 같은 말을 읊조렸고, 죽이는 자는 경의를 표하며 전우의 머리통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기동 불능 상태인 증기전차들은 세찬 증기를 방출하여 마지막 역할을 다했다. 본디 접근하는 보병을 지져 죽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기능을 최후의 연막차장에 활용한 것이다.
콰아아앗- 쾃- 콰콰쾃-!
철수 신호를 보았는지, 부상을 당했을지언정 아직 숨이 붙어있기는 한 강습보병 생존자들이 기를 쓰고 「발화」를 일으켜 연소 체임버의 압력을 끌어올린다.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로켓 노즐의 거친 소음들.
그러나 그 움직임들은 살충제 맞은 파리새끼들을 닮아있었다. 산탄지뢰가 일으킨 볼 베어링의 폭풍에서 사지가 멀쩡할 수 있었던 건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참호 밖에 누워있던 것들은 추가로 항공폭탄의 파편들까지 얻어맞았으니까. 로켓 팩 조향(操向)은커녕 상반신을 세우는 것조차 버거운 부상자들이다.
이것들을 상대로, 나와 내 부하들은 단순노동에 가깝게 목숨을 수확했다.
왕의 전사들과 후루 연합전선의 군세가 거대한 유인의 막을 올린 밤, 이슬람 성전연합의 사자 마무르는 루구루 족의 관계자와 함께 내가 머무는 숙영지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