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뱀 (13)
이곳에 도착하고서부터 만 하루에 걸쳐, 나는 조금 전의 짐꾼과 같은 자들을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평화유지군이 이들에게 신분증 발급을 강제할 방법은 없었다. 정확히는 방법을 따지기 이전에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테지만.
이 나라 탄자니아를 포함해서,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들의 신분증명 제도는 대단히 허술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사람의 신분을 내가 보증합니다.”라는 지역 주민의 추천서 한 장만 있으면 누구나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것.
추천서를 구하기는 매우 쉽다. 단돈 1달러만 준다고 해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추천서를 써줄 사람들이 넘쳐날 테니.
그렇다고 하여 추천서를 쓸 자격을 제한적으로 부여하겠다고 해버리면, 그때부터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부족과 씨족들 간의 이권 투쟁으로 비화하고 만다. 그 권리를 왜 너희끼리만 나눠먹느냐, 왜 우리에게 주어지는 쿼터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 우리에게 추천서를 쓸 자격이 없다는 건 우리를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등등.
결국 이 나라의 신분증이란 개인의 행정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ID일 뿐, 치안 유지나 확실한 신원 확인 등의 목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이 수십 개의 ID를 만든다 한들 적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평화유지군 입장에선 그나마라도 있으면 없는 것보단 나을 터이나, 신분증 대량 발급에 관한 행정 협조를 요청받은 국가들의 답변은 이러했다.
「그래서 예산은 누가 얼마나 대줄 거요?」
원하는 사람만 신분증을 발급받는 나라에서, 관련 사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수가 많을 리가 있나. 다르에스살람 같은 대도시에도 기껏해야 작은 사무소 몇 개가 전부일 지경.
검은 대륙의 가난하고 부패한 국가들이 이를 빌미로 최대한 많은 지원금을 뜯어낼 의욕을 보이자, 아프리카 안정화 임무에 뛰어든 주요 국가들은 자국에 협력하는 현지인들에게 개별적인 ID 카드를 발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래 봐야, 기본적인 신원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선 사상누각에 불과한 방침이었지만.
주술사 왕의 세력은 이러한 현실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규모가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있단 말이지.’
내가 내 눈으로 직접 현장을 관찰하고서 내린 결론.
평화유지군이 파악하고 있는 「활과 화살」 및 「후루 연합전선」의 전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이제껏 그들이 한 번의 싸움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전력을 집중시킨 적이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각각의 공세 사이에 시간적으로 상당한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의 세력이 썩 위협적이진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면으로 붙으면 당연히 이길 테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서 고전하고 있을 뿐인 게릴라들. 동조자들의 머릿수만 따지면 많을지 몰라도, 단일화된 지휘체계의 부재로 말미암아 유효하게 활용 가능한 전력엔 한계가 있는 비정규군.
이것이 주술사 왕의 군세에 대한 평화유지군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한국의 외교부, 중국의 국안부,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가 제공한 대외비에 이르기까지, 가용한 모든 정보 채널들이 대동소이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 오판은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주술사 왕은 평화유지군과 각국의 헌터단체들을 방심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장기간에 걸쳐,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마디로 이곳은 부하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인명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예비전장이었다. 정부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 당장은 애들을 빼내기도 어려운 수렁.
“저기요, 헌터님. 죄송하지만 좀 비켜주실래요?”
은근히 짜증이 깔려있는 목소리를 듣고서 자리를 비켜주자, 제복을 땀으로 적신 공익근무요원이 내 뒤에 놓여있던 롤테이너(Rolltainer)를 잡아 간이 하치장으로 끌고 간다. 돌아서 가도 몇 걸음의 차이에 불과했겠지만, 일단은 내가 서있던 자리가 최단경로이기는 했다. 롤테이너의 작은 바퀴들이 계속해서 튀어 오르며 덜커덩덜커덩 거친 쇳소리를 내었다. 바닥이 포장되어있지 않은 탓이었다.
현지 인력을 숙영지 내로 들이면 테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복무기간 단축 및 몇 푼 안 되는 위험수당을 미끼로 데려온 각성능력자 공익근무요원들은 한국 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저렴한 짐꾼들이었다.
공능법인 개마 또한 「특수공인기능요원」인지 뭔지의 TO를 할당받았다. 그러나 나는 필요 없다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 뒤에 외교부 사무관 윤혜원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온 게 희극이었지.
「걔들 어차피 다 공짜인데, 왜 안 쓰겠다고 하시는지…….」
그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윤혜원은 조금 풀이 죽어서 다시 물었다.
「혹시 수연이가 싫다고 하던가요? 제가 신경 써서 최대한으로 챙겨드린 건데.」
내가 그깟 인력을 받아서 어디다 쓰나. 물자추진은 경태가 구축해놓은 보급체계가 있고, 외부인이 들락날락거리면 괜히 신경이 쓰이기나 하지.
이는 필요를 논하기 이전에 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짧은 산책으로 이른 아침의 식곤증을 몰아내고서 텐트로 돌아온 나는, 경태가 작성한 작전계획들을 검토했다. 경태는 빔 프로젝터로 이링가 주 일대의 대축적 군사지도를 띄워놓고 양손엔 레이저 포인터와 리모컨을 들고서 브리핑을 진행했다.
“형님께서 적들의 집결지점이라고 찍어주신 지점들이랑 물자, 인력의 흐름을 보면, 조만간 있을 습격은 이제까지의 습격보다 조금 더 규모가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면적인 공세가 아니고?”
“아뇨. 굳이 말하자면 전면공세의 도입부쯤이 되겠지요. 그 왜, 이쪽 친구들이 저들의 규모를 단단히 오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주력으로 착각할 만한 적당한 규모의 단위제대를 노출시켜 미끼로 삼은 다음, 거대한 그물 속으로 최대한 많은 물고기들을 끌어들이는 거죠.”
“그러기 위한 위장공세와 거짓 패주가 있을 것이다?”
“제가 판단하기로는 끈질기게 버티고 버티면서 무인지대로 내몰려 포위당하는 듯한 구도를 연출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불나방들이 신이 나서 뛰어들겠죠. 평화유지군 입장에서는 그 뭐냐, 한타 싸움을 크게 이기기만 하면 이 지역은 한동안 잠잠해질 거라는 계산이 설 테니까요. 슬슬 가시적인 성과에 목이 마를 때이기도 하고요.”
평화유지군은 이제껏 후루 연합전선을 상대로 속 시원한 승리를 거둔 적이 없었다. 여기서 질금, 저기서 질금. 동원한 병력과 투입한 비용의 규모를 고려하면, 도무지 승리처럼 느껴지지 않는 자그마한 성과들을 거두었을 따름.
계속해서 누적되어만 가는 민간인 오폭 및 대민사고들도 평화유지군 당사국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문제다.
후루 연합전선의 유격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헌데, 정규군과 게릴라의 전투력 격차는 정규군의 분산도가 높아질수록 줄어든다.
그러므로 평화유지군은 광범위한 지역 안정 임무를 다양한 헌터 집단들에게 외주로 떠넘겼고, 성과가 곧 돈으로 직결되는 헌터들은 당연히 빈번한 대민사고들을 일으켰다.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걸려있었다. 이런 외주는 유사시 책임을 떠넘기는 용도로도 유용한 것이고, 따라서 물의를 일으킨 헌터 집단은 계약위반 및 법규위반으로 불이익을 받게끔 되어있었으니까. 배상금 지불, 계약 파기, 기타 법적인 처벌 등등의 불이익을.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보여주기일 뿐이지.’
대개의 헌터 집단은 법인이고, 법인을 해산해버리면 보상을 받아야 할 피해자들은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다. 어쨌든 법인이 해체되었으니 명목상의 처벌은 이루어진 셈.
직접적인 실행범들에 대한 처벌 또한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국에서 처벌하겠다며 데려가 놓고, 새로운 신분을 주어 다른 지역의 안정화 임무에 돌려막기로 투입하는 것.
이 대륙에선 중무장 용팔이들도 무작정 소모할 수 없는 한정된 인적자원들이다. 해적제독의 말처럼, 선진국들이 험한 일에 각성능력자를 동원하는 데엔 뚜렷한 한계가 존재하니까.
“관건은 각국 평화유지군 지휘부들이 어디까지 속아주느냐? 인데 말입니다. 게릴라들이 그간의 행동 패턴에서 갑작스럽게 벗어나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게 아무리 지금껏 파악한 적의 규모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요.”
경태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봐야 소수의 의견이겠지. 후루 연합전선의 난잡한 조직구조를 고려하면, 저쪽에서 삽질 한 번 하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건 그렇긴 한데요…….”
전쟁은 원래 잘 싸우는 쪽이 아니라 삽질을 덜 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과거엔 자기가 수립한 작전계획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나머지 전쟁을 개시하기 한참 전부터 작전계획 전체를 출판해서 팔아치운 미치광이도 있었다. 칼레 해전과 그 여파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말아먹은 펠리페 2세의 이야기.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 오직 전령을 통해서만 명령을 하달한 프랑스 총사령관은 또 어떠한가. 이 새끼는 군사명령을 무전과 전화로 전하는 게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명령서를 작성할 때도 예술적인 표현을 고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병신이었다.
찾아보면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이 세상은 비합리적인 인간들의 우행과 광기로 가득한 곳이다.
경태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일단은 평화유지군이고 헌터들이고 다 낚여서 퍼덕거린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짜긴 했습니다. 다만 일부 부대들이 낚이지 않을 경우, 비교적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몇 개 뽑아서 행동방침을 미리 정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굳이? 그때 가서 상황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텐데?”
“에이, 아니죠. 우리가 미리 대비를 한다고는 해도,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일부 기동대는 그물 안으로 제법 깊숙한 곳까지 진출을 시켜야 하잖습니까? 그러면 형님께선 보나마나 이번에도 솔선수범을 하실 거고요. 인력 손실을 워낙에 싫어하시고, 황금기의 눈은 피아가 뒤섞인 전장에서 최고의 정보 획득 수단이 될 테니까요.”
“흠…….”
“뭐, 형님께서 자리를 비우고 계셔도 수연 누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재량을 발휘하는 데 그만큼 부담이 적어지겠죠.”
맞는 말이었다.
말이 국제연합군이고 평화유지군이지, 평화유지군 소속 부대들은 언제든 국가별로 독자적인 행동에 돌입할 수 있었다. 외교 관계 악화를 각오해야 하고, 또 패배의 책임소재를 논할 때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될 터이긴 하나, 어쨌든 가능하기는 하다는 말.
나는 경태의 제언을 받아들여 계획을 보강했다. 이런 쪽으로는 나보다도 위인 경태가 다양한 상황들을 가정하여 질문을 던지고, 나는 숙고를 거쳐 답을 돌려주는 과정의 반복.
이렇게 완성한 계획이 필요해진 것은 토의를 마치고서 고작 하루가 경과한 다음의 일이었다.
후루 연합전선의 전투단은 숫제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출현했다. 민가와 지저에 은닉해두었던 장비들을 꺼내고, 민간인을 가장하여 흩어져있던 전투 병력을 집결시키는 등.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평화유지군과 여타의 헌터 집단들이 보기에 그러했다는 뜻이고, 나와 내 애들은 진즉부터 진지보강공사를 가장한 전투 배치를 완료해놓은 상태였다. 다만 저들의 공격 시점이 예상보다 다소 빨랐을 따름.
삐이이이이익-
표면이 붉게 산화된 커다란 쇳덩어리가 거친 기세로 수증기를 내뿜는다. 저 멕시코 마피아들이 몬스터 트럭을 숨기는 요령의 하나와 유사하게, 후루 연합전선이 지저에 조립해놓았다가 전투 직전 돌출시킨 수제 장갑차량이었다.
‘기본 설계가 아주 우수해.’
복잡하거나 정교한 물건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철저한 모듈화가 이루어져 있어, 용접이 가능한 화염능력자만 있다면 어디서나 분해와 재조립을 할 수 있었다.
광대한 대지, 너무도 많은 개인운송 사업자들, 허가를 얻지 않은 인력 운송수단들, 개미굴 같은 지하터널들의 존재 등과 더불어, 큼지막한 장갑차량의 재배치가 국제연합군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은 이유.
존재 자체는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으되, 실제로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주술사 왕의 엔지니어들은 분명 보통 놈들이 아닐 것이다.
쿵…… 쿵…… 쿵…… 쿵……
일견 고철 덩어리처럼 보이는 대형 장갑차량의 심장은 증기기관이었다. 커다란 실린더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짐승의 심장 소리를 닮은 울림이 먼 곳까지 들려온다. 심장이 뛰는 박자는 점점 더 속도를 더하여 강철 짐승에게 동력을 전달했다.
「Tayari kwa vita! Tayari kwa vita! Kitengo cha tanki, njoo mbele!」
저쪽의 지휘관이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 지휘엔 무전기와 스피커를 함께 쓰고 있다. 군세가 보유한 무전기의 총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전투흥분에 빠진 광신도들을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싶었다.
명령이 떨어진 후 연합전선의 장갑차량들이 대열을 이루어 전진해온다. 예기치 못한 기습적 정면공격을 맞아, 평화유지군 주둔지 및 헌터들의 집단 숙영지는 혼란 속에서 성긴 임전태세를 갖추는 중이었다. 급하게 차단진지로 달려가는 놈들 중 장비를 제대로 갖춘 경우는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뻐벙! 뻥!
연합전선 측의 기갑차량들이 일제히 주포를 발사했다. 장약을 터트리는 대신 증기압을 충전하여 쏘는 대구경 저압포들. 포연을 닮은 하얀 수증기가 폭발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온다. 평화유지군 병사들과 헌터들은 크게 울리는 포성에 당황했으나, 무겁고 느린 포탄들은 피아의 중간쯤에 중구난방인 탄착군을 형성했다.
포탄들의 정체는 연막탄이었다.
촤아아아아-!
염화칼륨, 설탕, 베이킹 소다를 섞어 만든 연막탄은 삽시간에 물리적인 전장의 안개를 만들어냈다. 연막차장의 효율은 내가 취급하는 제품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더해 도로와 가까운 산등성이마다 화염능력자들의 조직적인 방화가 이루어지니, 각성능력자가 달리는 속도로 번져나가는 산불은 깨끗하던 저물녘의 하늘을 삽시간에 불투명한 잿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개시되는 기병대의 돌격.
「아-라-라-라-라라라라라라이!」
각성능력자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포효가 야생동물들의 울음을 닮아있다. 간선도로와 그 주변의 평지를 따라 고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로켓 추진 삼륜차 기병대는, 기수들의 무장과는 별개로, 안장 뒤쪽의 짐칸에 여러 발의 폭탄투창들을 꽂아놓고 있었다.
투창에 매달려 흔들리는 지향성 폭탄들은 파인애플 통조림 캔에 화약을 채우고 충격신관을 달아 제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