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승천의 계단 (16)
대통령이 제공한 정보는 그 자신감에 비례하는 방대함과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다만 내가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 뿐.
“…….”
나는 불타버린 공장의 폐허를 먼발치에서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직까지도 탄내가 독하게 감도는 이 봉제공장은, 영국의 노예상인들이 상품조달을 목적으로 운영하던 위장거점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현지에서 추가로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5월 27일 04시경, 즉 오늘 새벽의 일. 내가 르완다에서 스텔라 포르투나로 복귀한 게 어젯밤 23시경이었으므로, 서둘러 움직였다면 하늘에 어둠이 남아있는 사이 섬나라 노예상인들의 꼬리를 밟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료 검토에 들어간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일단은 주무셔야 합니다.」
어젯밤, 나를 마주한 수연은 단호하게 휴식을 권고했다.
「그쪽에서 잠을 얼마나 주무셨는지는 이미 들었습니다. 자료를 분석하고 검증하는 데엔 어차피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은 수면을 취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는 속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불합리한 짜증을 다스렸다. 녀석의 권고는 당연한 것이지 않았나. 나 자신이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런즉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측근으로 하여금 쉬어달라고 부탁까지 하도록 만든 상급자의 잘못이라고 해야겠지.
그러나 어쨌든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것이다.
원탁의 하수인들이 공장에 지른 불은 침입자들을 태워죽이기 위한 불이었다. 습격을 예상하고, 미리 비운 거점 전체를 함정으로 뒤바꿔놓았던 것.
뉴스에 얼굴을 내민 인근 주민들은 총성과 폭음을 들었다고 증언했고, 공장 곳곳에서 보이는 흔적들은 그러한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다수의 무인 터렛들과 교전하며 시설 내부로 진입했을 습격자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화공에 휘말려 새까맣게 탄 숯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 습격자들은 정체가 뭘까.
마녀가 보낸 악마숭배자들의 전투단이었을까, 아니면 원탁의 일탈을 의심한 영국 비밀정보부의 무장요원들이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제3의 세력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해선 안 되겠지.
하다못해 노예상인들과 거래관계로 얽힌 현지 중개상들조차도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 인세의 현실이란, 내막을 알고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니까. 어쩌면 범죄자들 가운데 주술사 왕의 사상에 감화된 미치광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들어가서 조사를 실시합니까? 바싹 구워진 시체들이라도 샘플을 확보하면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요.”
경태의 질문을 받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짜증이 날 정도로 구름 한 점 안 보이는 케냐 해안지대의 하늘을. 비록 화재현장 주변에 감시하는 눈은 없어 보이지만, 정찰위성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심을 품고 있어야 마땅하다.
지금 하늘 저편에 위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 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정확하게는, 내 뇌와 마력회로가 수용 가능한 시각정보의 한계 너머라고 해야겠지. 통상적인 정찰위성의 체류고도는 지표로부터 4백 킬로미터 언저리에 걸쳐져 있으니까.
그러나 설령 이곳을 주시하는 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신형은 아닐 것이다. 수량 자체가 얼마 안 되는 최신예 정찰위성을 이토록 중요도가 떨어지는 곳에 할당했을 리가 있나. 그런 위성들은 중국, 이란, 러시아 등지를 감시하는 임무만으로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잘해야 해상도 15센티미터급이 고작이겠지.’
그 정도면 사람의 출입 여부를 확인하고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선이 한계다. 그리고 오로지 위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이동경로 추적은 따돌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은 바다에 면한 항구도시의 변두리이기까지 하다. 불과 2백 미터 바깥에 파도치는 해변이 존재하는 곳. 이런 데서 각성능력자가 작정하고 흔적을 지우면 무슨 수로 추적을 이어나갈 것인가. 지상에서 추적을 보조할 전력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경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벼운 어조로 의견을 개진했다.
“원탁이 얽힌 일이라 형님께서 평소 이상으로 경계하시는 건 알겠습니다만, 당장 형님의 눈에 보이는 불안요소가 없다면 그냥 진입해도 무방할 성싶습니다. 저들에게 우리의 방문을 예상할 단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함정으로 끌어들인 기존의 대적자들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그 대적자들을 태워버린 시점에서, 이 함정은 효용가치를 다했다……. 라는 게 경태의 언중언이었다.
거점 철수를 단행하고도 정교한 함정을 구축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노예상인들의 철수는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 작업이었을 것이다. 불타 죽은 습격자들의 패거리가 현장을 샅샅이 뒤지더라도 건져갈 게 없는 셈.
이건 내게도 해당되는 내용이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들어가 보자.”
불타버린 봉제공장은 케냐 몸바사(Mombasa) 항의 남쪽 근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구가 백만을 넘는 항구의 근교라고는 하나, 봉제공장 주변은 황량한 황무지에 가까웠다.
이 황무지 서쪽으로 넓은 면적에 걸쳐 가난한 주거지들이 퍼져있다. 원탁의 하수인들이 여성 실험체들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몸바사는 미성년자 성매매의 천국이었다. 18세 이하 여성 인구의 최대 3할이 매춘을 한 경험이 있으리라 했으니까.
하물며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성년여성들의 수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케냐와 같은 낙후된 국가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는 상호간의 경계가 희미하기 마련이다. 자료를 보건대 화대를 받아봐야 1~2달러가 고작인 시장이고, 포주들은 애초부터 사람 사고파는 장사를 부업으로 삼고 있었을 테니, 두당 수백 달러만 쳐준다고 해도 온갖 상인들이 앞다퉈 내가 여자를 대주겠노라 나섰겠지.
여기엔 언어의 장벽마저 없었을 것이다. 여기는 지난날 영국의 식민지이지 않았나. 하물며, 외국인을 상대할 기회가 많은 암상(暗商)들이 겨우 영어를 구사하지 못할 리가.
타고 남은 공장의 폐허로 다가가는 길에, 나는 우연찮게 바닥에 떨어져있는 라벨 하나를 발견했다. 멀리서 볼 땐 그저 폴리에스테르의 색채를 띤 작은 조각에 불과했던 것.
“이건…….”
“그게 뭡니까?”
“아무래도 공장이 멀쩡할 때 바람을 탄 물건인 것 같다.”
“평범한 쓰레기가 아니라요?”
경태의 말마따나, 이 황무지엔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이 라벨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류기호와 번호를 배열하는 형식이 눈에 익어. 이건 「포튼 다운」에서나 쓰는 형식이야. 그것도 과거 원탁에 대한 행정지원 용도로 만들어진.”
“포튼 다운? 아, 그 영국판 731부대요?”
“맞아.”
“오우. 그래도 다행히 뭔가 건지긴 하는군요. 운이 좋았네요.”
포튼 다운(Porton down).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설립되어, 대영제국의 생화학전 연구를 주도한 「왕립 기술자 실험시설」의 후신.
자국 군인 2만 명, 그리고 규모 미상의 식민지인들을 상대로 온갖 질병과 약물, 생화학무기 등의 효과를 실험한 이 미치광이 기관은, 그 일익이 원탁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수행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스승새끼의 지식이라, 스승새끼가 원탁과 결별한 이후 둘 사이에 관계상의 변화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럴 가능성이 한없이 낮다고 보았다.
「우리 하원 국방위원회는 포튼 다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포튼 다운은 우리가 알기엔 너무나 거대한 기관이며, 그곳에선 상하원 의원들은 물론이고 국방장관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원 국방위원회 소속이었던 한 섬나라 의원의 이 진술은, 스승새끼가 죽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것이었다.
포튼 다운은, 비록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뭉쳐져 있긴 하나, 영국 정부가 제어에 애를 먹기로는 원탁에 버금갈 집단이다. 정부가 원탁을 버리기로 결정한 다음에도 포튼 다운의 일각은 소소하게나마 원탁에 대한 지원을 해주곤 했었으니.
‘간부들 중에 「동반 승천」의 약속을 받은 연놈들도 제법 있고…….’
그 간부들이 원탁의 마스터들을 숭배하는 광신도들은 아니다. 오히려 마스터들을 도구로 간주하는 쪽이지.
그들이 끈 떨어진 원탁을 상대로 매몰차게 굴지 않았던 건, 빛과 진리의 원탁을 국가의 미래를 위해 보존해야 할 가능성으로 보았던 까닭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원탁의 마스터들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원탁내각 공동의 명의로 동반승천의 권리를 약속했다. 언젠가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갈 때, 너희에게 우리의 오른쪽 자리를 내어주겠노라고. 버림받은 대마법사들이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려면 그렇게 공수표라도 뿌려야만 했던 것.
과거 북한의 국채만도 못한 가치를 지녔던 그 공수표들은, 이젠 완전히 새로워진 무게로 포튼 다운의 관계자들을 만족케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라벨에 인쇄된 분류기호를 읽어냈다.
“성별, 여성. 인종, 흑인. 나이, 14세. 혈액형은 AB형이고 건강엔 이상 없음…….”
원탁의 마스터들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기호라 그런지 스승새끼의 기억에서 바뀐 점이 없다. 산 제물에 대한 원탁의 수요라는 건 기본적으로 원탁이 숭앙하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기초한 것이니까. 진리가 변치 않으니 수요를 분류하는 기호도 그대로일 수밖에.
경태가 말했다.
“팀을 나눠서 쓰레기를 좀 살펴보라고 하겠습니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게 있으면 주워오라고.”
“음.”
나는 큰 기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경태, 그리고 동행한 경호 인력의 절반은 부서진 문을 지나 공장 부지로 들어섰다. 그을음을 잔뜩 먹은 담벼락은, 공장의 그것이라기보다 교도소의 담장에 더 가까운 형상이었다. 높은 담장 위엔 깨진 유리조각들이 빼곡하게 박혀있기까지 하다.
경태는 탄화된 시체들의 분포와 내가 눈으로 보고 알려주는 교전 흔적들, 공격자들이 휴대하고 있었던 장비들의 잔해, 그리고 체계적인 폭파 흔적 등을 토대로 이곳에서 벌어진 교전과 집단 몰살의 양상을 유추했다.
“공격자들이 막 엄청나게 잘 훈련받은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쪽 현지 무장 세력이라고 보기엔 수준이 높습니다. 현지 노예상인들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되겠네요.”
“확신하나?”
“예.”
자신 있게 끄덕이는 경태 녀석. 난 눈으로 보고서도 확신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시설 내부에서 어떻게 도망쳐볼 틈조차 없이 타죽은 시체들은, 장시간 고열에 노출되어 골수조차 제대로 남아있는 게 드물었다. 나는 그나마 온전한 뼈와 치아 등을 짚어 부하들로 하여금 회수토록 했다. 또 한 번의 작은 행운이 따른다면 DNA 추출이 가능할지도 몰랐으니까.
습격자들의 인종 구성만 확인할 수 있어도 최소한의 도움은 될 것이다. 성공할 확률이 희박해보이긴 하지만.
빠득-!
떨어져 나온 턱뼈로부터 이빨을 뽑아낸 경태는, 탄화된 인간을 툭툭 발로 건드리며 의아해했다.
“이 녀석은 뭔데 혼자 수갑이랑 족쇄를 차고 있었을까요. 골격이랑 골반을 보니 체격이 좋은 남자였던 것 같은데.”
이는 이 현장에서 유일하게 습격자들의 무리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시체였다. 까맣게 눌어붙은 시체는 배관에 묶여 구속되어 있었다.
“글쎄다.”
공격자들에게 거점의 정보를 누설한 배신자였을 수도 있고, 습격에 앞서 사전에 잠입한 정찰병이었을 수도 있겠지. 공격자들의 구조 대상이었으리라는 가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거라면 아까운 거점을 함정으로 소모해버릴 이유가 없어.’
어차피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곳에 가져다놔도 구하려 들지 않았겠는가.
정보보안국의 자료를 믿는다면, 이 공장에서 장기간에 걸쳐 다른 곳으로 운송된 예비 실험체들의 수는 가볍게 네 자리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잘 기능하던 거점을 공연히 낭비할 리가 있나.
잠시 후, 황무지의 쓰레기를 뒤지던 부하들이 저마다 의심스러운 물건들을 이것저것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개중에 정말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장을 떠나기 전, 나는 공장의 앞마당에 묻혀있는 유해들을 일별했다. 공장이 불타오르기 전에 매장당한 게 확실한 유해들은, 아마도 납품하기에 뭔가 결격사유가 존재하는 불량품들이었을 것이다. 최대한의 수량을 확보하고자 일단 받아두긴 했으나, 최종 검수과정에서 탈락해버린 왜소한 아이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원탁의 행태는 어떤 의미로는 안정감마저 주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내 지식의 유효기간이 아직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니까.
나를 포함하여, 좋은 대마법사는 죽은 대마법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