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67화 (267/561)

#31. 승천의 계단 (10)

「그리운 땅이 가깝구나.」

스승새끼의 유해가 입을 털어대는 꿈엔 언제나 얼마간의 끈적거리는 불쾌감이 감돌았다.

「나와 원탁의 동료들이 「심장」의 세례를 받아 이 세상의 진실을 깨달았던 곳. 세상이 어두운 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우리의 영혼에 처음으로 아이테르(마소)의 길이 열린 성소. 진리의 태양이 잠들어있던 태고의 균열.」

「아아, 너는 알 것이다. 나의 기억을 가져간 너는, 내가 품고 있었던 아련한 그리움을 알 것이다. 그날, 내가 흘렸던 감격과 두려움의 눈물을 알 것이다.」

황금기의 정수가 황금기의 눈으로만 열람 가능한 마법적 영감의 대도서관이라면, 황금기의 심장은 가장 이상적인-적어도 원탁은 그렇게 생각하는-회로의 일부가 남아있는 그릇과 같다.

그 일부에 불과한 회로는, 단지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명의 영혼에 아이테르의 길을 뚫어버리는 이적(異蹟)을 선보였다. 심장이 보존하고 있는 회로의 마력 처리능력은 원탁내각의 대의원들이 지닌 회로를 모두 더해놓아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원탁의 대마법사들은 눈, 정수, 심장 중에서 심장을 가장 특별한 유물로 간주한다. 실용적인 면에선 눈과 정수가 더 중요하지만, 상징적인 가치라는 게 있으니까.

심장이 없었으면 원탁은 애초에 탄생조차 하지 못했다.

황금기의 눈은 가동되지 않았을 것이고, 황금기의 정수는 언제까지고 문이 열리지 않는 도서관으로 남아있었을 테니.

「너는 또한 알 것이다. 내가 정수를 통해 엿보았던 신적인 존재들의 시대를. 하나하나의 존재가 서로 다른 문명과도 같았던 위대한 생명들의 시간을.」

「그들에게는 보금자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몰아치는 비바람과 내리치는 천둥벼락이 그들에겐 어떠한 해도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의복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한과 혹서 속에서도 그들은 괴로움을 느끼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뼈와 살은 그 어떤 갑주보다도 강인한 방어수단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식사마저도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쓰는 「생명」은 우리가 얼기설기 기워 붙인 「생명」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완벽한 지혜였으므로.」

「그들은 행위 없는 결과를 누렸다. 의지가 곧 현상으로 발현되었기에.」

「답해보아라.」

「네가 성취하려는 불가침의 평온이 정녕 이러한 권능들 없이 가능한 것이더냐? 진정한 의미의 불가침을 손에 넣을 능력이 있음에도 불완전한 평온에 만족하겠느냐?」

참으로 정신 사납게 떠들어댄다. 코드 분석에 집중하기 어려울 만큼. 나는 내 무의식의 일부를 물고 계속해서 신경을 긁어대는 제국주의자의 유해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유해의 눈구멍 속에서 새까만 어둠이 일렁거렸다.

「네가 이 세상에 필멸자로 존재하는 이상 언젠가 누군가는 너의 삶에서 저의 필요를 구하려 들 것이다. 네게서 빼앗아 저의 결핍을 채우려 들 것이다. 너를 죽여서 저의 배를 채우려 들 것이다.」

「너를 잡아먹으려 들 것이다.」

「절대적인 자유는 오직 절대자에게만 허락되는 것.」

「그러니 우리는 승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유해가 말하는 ‘우리’는 처음에 이야기한 ‘우리’가 아니었다.

나는 귀찮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가 멈춘 지 오래인 새끼가 무슨 놈의 승천을 입에 담고 있나.”

「네가 나를 받아들이면 나는 너의 욕망으로서 다시 한 번 흐르는 시간을 누리게 될지니.」

“좆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나는 언제나 선을 그어왔다.”

「너에게만 의미가 있는 그 가늘고 위태로운 선. 너 혼자만의 자기만족.」

“그래.”

「내가 너의 응달에서 이르노라. 원탁의 붕괴는 네 욕망의 끝이 아닐 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어떤 인간도 영생과 불멸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네가 가진 것들에 영속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처음엔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다음은 무너지는 도미노와 같지.」

“두고 보면 알 일 아닌가.”

「나는 기다리리라. 나는 기다리리라. 나는 기다리리라.」

이 세 차례의 반복을 끝으로 스승새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텅 빈 안구 너머의 그늘은 계속해서 나를 응시했다.

이 꿈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키갈리는 1년 내내 선선한 기후를 유지하는 도시였다. 또한 5월은 적도 이남이 건기로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여, 꿈자리와 별개로 잠자리 자체는 무척이나 쾌적했다. 살갗에 닿는 마른 이불의 감촉이 몸을 붙잡는 중력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대로 누워 다시 한 번 수면유도를 써먹고 싶은 충동을 인내하며,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킨 나는 뜨끈한 눈두덩 위를 가볍게 문질러주었다.

침대에 캐노피처럼 둘러친 모기장엔 모기가 한 마리 붙어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방 안에 존재하는 모기를 모조리 태워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인가로 사람 냄새를 맡고 기어코 기어들어온 것이다.

새벽에 부하들의 방까지 청소해두길 잘했지. 나는 가벼운 염동력 투사로 모기를 분쇄하고서 모기장을 걷고 나왔다.

르완다의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 숙소는 골프코스와 인접한 부촌의 임대식 별장이었다. 평소엔 관광객을 상대하는 전문 임대업체가 관리하는 곳. 넓은 정원에 수영장까지 딸려있는 별장은, 내 부하들이 독립적인 경계망을 구축하기에 적합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대통령이 우리의 ‘휴식군기’를 관찰하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실내에 깔려있던 도감청 수단은 들어온 직후 싹 제거해버렸지만, 바깥에서 지켜보는 눈들까지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사실 거기까지 치울 이유도 없었고.

거실에선 경태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작전지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경태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주무셔야죠, 형님.”

“충분히 잤다.”

“수연 누님이 당부했지 말입니다. 형님께서 얼마나 주무시는지 꼭 체크해달라고.”

“……됐으니 커피나 한 잔 내려와라.”

“옙. 하는 김에 토스트도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여기 컴플리멘터리가 특급호텔 스위트룸 뺨치더라고요. 커피 원두도 최고급이고 빵도 최고급이고.”

“그래. 부탁하마.”

이런 일은 절대 제 부하에게 양보하지 않는 경태가 직접 부엌으로 간 사이, 나는 지도 옆에 놓여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묻자, 경호실 소속 부하가 대답했다.

“아침에 현관에다 던져놓고 가기에 일단 들여놨습니다. 이 별장을 관리하는 임대회사에서 배달해주는 것 같더군요.”

신문의 이름은 「더 뉴 타임즈(The New Times)」였다. 기사는 모두 영어로 인쇄되어있다.

르완다는 본디 프랑스어를 행정언어로 쓰던 나라였지만, 프랑스와 원수관계가 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영어 사용을 확대했다. 일단 작금의 대통령부터가 프랑스어보다는 영어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수연이 행한 배경조사를 듣자니,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난민캠프의 교육이 모두 영어로 이루어졌다는 모양.

신문의 1면엔 머리가 정수리까지 벗겨진 중년 남성의 정면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사내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진 상태. 사진 위에 걸린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사기꾼의 비참한 말로 : 폴 루세사바기나, 최종심에서도 무기징역 선고 유력」

누구인가 했더니 영화 「호텔 르완다」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르완다 학살 당시, 자기가 지배인을 맡고 있던 호텔에 투치족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보호했던 일로 ‘아프리카의 쉰들러리스트’라는 명성을 얻은 인물.

비록 내가 영화를 보진 않았으되, 워낙 유명한 사건이고 일화인지라 이번 일을 맡기 전에도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었다.

이 인물에 대한 최신 정보는 수연이 조사하여 올린 르완다 현지의 상황정보에 포함되어 있었다. 르완다의 대통령을 대면하기 전에 이 나라의 근황을 숙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루세사바기나의 구금 및 재판은 현 시점의 르완다가 해결해야 할 가장 뜨거운 내부문제 중 하나이자 무거운 외교문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루세사바기나는 르완다 국가정보보안국(NISS)의 비밀공작으로 항공납치에 가깝게 체포당했고, 그렇게 체포당한 그에겐 르완다의 옛 식민종주국인 벨기에의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

나는 보고서에 적혀있던 내용 일부를 떠올렸다.

「루세사바기나의 과거 행적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음.」

「해당 호텔에 실제로 주둔했던 캐나다 장교 로메오 댈레어(최종계급 예비역 중장)의 증언에 따르면, 투치족 피난민들을 주도적으로 보호했던 것은 호텔 지배인이 아닌 콩고 공화국에서 파견한 평화유지군 병력이었음.」

「역시 해당 호텔에 있었던 동일부대의 정보참모 애머두 딤 대위는 「호텔 르완다」를 두고 “거짓으로 가득하여 감상하는 내내 혐오감을 참아내기 힘들었다.”라고 평가함.」

「해당 호텔의 생존자들은 루세사바기나가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금품을 요구하였으며, 돈을 지불하지 못하는 자들에겐 호텔 밖으로 쫓아내겠노라 협박을 가했다는 사실을 증언함.」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해당 호텔에 투숙했던 미국 시민 케리 주커스 역시 동일한 내용을 재확인함. 또한 루세사바기나가 객실의 통신선을 잘라 투숙객들의 외부연락을 차단하였으며, 후투족 민병대 인테라함웨에게 투숙객 명단을 제공하여 평화유지군이 고위험 투숙객들의 객실을 변경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고 증언함.」

「현 르완다의 대통령은 처음엔 이러한 사실들을 몰랐던 것으로 추정됨.」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세사바기나의 명성을 르완다에 대한 외교적 압박 및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

한마디로 할리우드가 ‘사실 기반’으로 제작했노라 주장하는 거짓투성이 영화 한 편에 전 세계가 놀아났으며, 옛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 영화가 탄생시킨 가짜 영웅의 명성을 국제적인 규모의 여론전에 이용해먹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피해자를 악당으로 몰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저지른 지난날의 과오를 희석시키고, 이 땅에 다시 한 번 지배적인 영향력을 투사하기 위하여.

‘이러고들 있으니 계속해서 반감이 커지지.’

구 식민지 종주국들의 입장에서 검은 대륙이 자신들의 통제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달가운 일이 아니다. 보나마나 르완다 이외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수면 아래에선 비슷한 암투들이 벌어지는 중일 터.

그러면 그럴수록 「주술사 왕」의 세력은 사하라 이남 전역에 걸쳐 더욱 빠르게 번져나갈 것이었다. 최적의 환경을 만난 곰팡이와도 같이.

짐작컨대, 르완다의 대통령 또한 이미 암암리에 주술사 왕과의 접점을 만들어두지 않았을는지.

그저 내 희망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이 유럽에 대해 품고 있는 강한 적대감, 그리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한하여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운 르완다 정보국의 공작능력을 고려할 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르완다의 대통령과 주술사 왕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이익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경태가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왔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잔과 접시를 내려놓고는, 상체를 기울여 내가 읽는 대목을 엿보는 녀석.

“이거 완전 그거네요, 그거.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거기 쓰여 있잖습니까. 「테러조직을 만들었지만 테러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주장한다고.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 아닙니까?”

나는 경태가 기사의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루세사바기나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내가 「이후무레」 당(黨)의 창립을 주도했고, 그 이후무레 당 아래에 무장조직 「국가해방전선(NLF)」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국가해방전선이 벌인 테러와 나는 관계가 없다. 당 내부에서의 내 역할은 대외활동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무레는 국외로 도주한 후투족 강경파들의 망명정당들 가운데 하나였고, 국가해방전선은 그러한 이후무레의 당군(黨軍)쯤 되는 조직이었다.

하여간 권력을 꿈꾸는 인간들의 뻔뻔함이란. 설령 본인이 직접 관여한 바가 없더라도, 명목상 당의 수장 자리에 앉아있으면 최소한의 책임은 있는 셈이지.

신문을 읽던 중에 잠시 전기가 나가긴 했으나, 커다란 창문에 걸러진 오후의 햇살이 여러 개의 마름모꼴로 나뉘어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부하들이 지도를 보며 만약의 상황을 가정한 토의를 이어나가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할 때가 되자, 별장의 정문 앞에 하이루프 리무진을 동반한 군용 차량 석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무리를 이끄는 자는 감색 제복을 입은 여성 장교였다. 눈가의 색소가 짙고 윗입술이 두툼한 장교의 얼굴은 수연이 정리한 르완다의 중요 인물 목록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내 앞에 선 대령은, 각 잡힌 경례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딕 회장님. 저는 정보보안국장을 맡고 있는 린더 은쿠랑가입니다. 은쿠랑가 대령이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린더 은쿠랑가 경찰 대령. 대통령의 지목을 받아 정보보안국장 자리에 오르자마자 항공납치를 실행하여 루세사바기나를 잡아들인 첩보계의 기린아.

이 여자는 르완다 대통령의 독재가 철저하게 능력주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 같은 인물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령. 최종 브리핑까지는 아직 여유가 남아있는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는지?”

방문의도를 묻자, 경찰 대령의 두꺼운 눈이 휘어진다.

“대통령 각하께서 알려주신 바, 회장님께서 바라시는 대가는 제 업무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미리 친분이나 좀 다져둘까 하고 왔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좋은 식당이 하나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말하는 기색을 보건대, 대통령으로부터 “자네 눈으로 한번 살펴봐.” 운운하는 지시라도 받은 모양.

나는 선선히 권유를 받아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