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61화 (261/561)

#31. 승천의 계단 (4)

스텔라 포르투나로 돌아온 나는 조직 본사로부터 지난날에 거둔 전리품의 사진을 받아보았다. 역시나, 인형술사의 인장반지는 문장의 구성요소들을 제외하면 피에르의 것과 완벽하게 동일했다.

비록 피에르의 반지엔 마력이 깃들어있지 않지만,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인장반지가 같은 형태로 여러 개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로 명백한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OSML,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은, 비밀결사 프로파간다 두에의 배후 지주라는 사실만으로도 원탁이 뇌를 파먹고 싶어 할 법한 먹잇감이다. 전근대적 전통을 계승하는 기사단의 특성상, 대외적인 폐쇄성이 높아 잡아먹어도 티가 잘 나지 않고, 정재계와 군, 정보기관의 실력자들로 가득한 프로파간다 두에는 쓸 만한 장기 말이 되어줄 테니까.

프로파간다 두에의 세력권은 모국인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3개국은 확실하게 확인된 프로파간다 두에의 영역.

특히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 버금가는 제2의 본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프로파간다 두에의 회원이 대통령까지 해먹었고, 군사정권 시절의 주요 각료들 또한 다수가 프로파간다 두에의 회원이었으므로.

그러나 원탁이 이토록 매력적인 먹잇감을 잡아먹는 데엔 한 가지 걸림돌이 존재한다.

바로 영국 정부.

‘그들이 이런 식의 세력 확장을 곱게 용인해주었을 리가 있나.’

창설 이래, 빛과 진리의 원탁은 단 한 순간도 영국 정부의 감시대상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사람 알기를 땔감으로 아는 미치광이 학살자 집단을 어찌 아니 감시할 수 있겠는가. 원탁의 잔혹함은 그 활동을 후원하고 제물을 조달해주었던 영국 정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점점 더 심해지는 마소 고갈 속에서 영국이 원탁의 계륵들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고 난 후에도, 영국의 비밀정보부엔 언제나 대마법사들을 감시하기 위한 예산이 할당되어 있었다.

지금 영국 정부는 마법의 재래로 기세등등해진 미치광이들을 제어하는 데 애를 먹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비밀결사 그 자체인 원탁이 또 다른 비밀결사에 마수를 뻗도록 내버려둔다? 그것도 이탈리아의 정보기관들을 방패막이로 쓸 수 있고, 자체적인 전통도 아주 깊으며, 남미에까지 세력이 뻗어있는 다국적 비밀결사에?

제정신으로는 내리지 못할 결정이지.

담당자들이 마약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에야.

애초에 영국이 원탁을 전면적으로 지원해주었다면, OSML에 대한 대마법사들의 침투는 훨씬 더 본격적인 것이었을 터.

OSML 산하의 각성능력자 무장단체는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가 유일했다. 수연에게 홀린 피에르가 아낌없이 수다를 떨어댄 바,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대지휘관 한 사람을 제외하면 기사단 내부에 딱히 대단한 능력자도 없는 모양이고.

이렇게 조심스러운 물들이기는 원탁의 역량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수연 역시 내 판단에 동의했다.

“아울러, 저는 대지휘관 발다싸레에 대한 회유가 과연 원탁의 총의로 이루어진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발다싸레(Baldassarre)는 피에르가 말한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3인의 동방박사들 가운데 하나, 발타자르의 이탈리아식 변형.

나는 수연에게 되물었다.

“특정 마스터 개인의 독단, 혹은 특정 계파의 일탈을 점치는 거냐?”

“예.”

“이유는?”

“정부의 견제를 받느라 원탁의 역량을 있는 그대로 투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누가 이 일을 담당할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들의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형의 잠식은 먼저 행하는 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았으면 자연히 나오는 답이었다. 원탁은 대가리가 여러 개인 독사와도 같은 조직이니까.

표면적으로는 원탁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어느 하나의 마스터, 어느 하나의 계파가 불균형하게 힘을 불리는 꼴이 된다면, 반대쪽에 선 자들이 얌전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누군가는 생각하겠지. ‘정부에 정보를 흘려서라도 저 인간의 밥상에 재를 뿌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물론 마스터들이 비생산적인 주도권 싸움을 멈추고 대승적인 합의를 이뤄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에르가 드러낸 무지와 그 무지가 낳은 허술함은, 무게감이 인장반지에 버금가는 상황증거였다.

‘그럼 이것들이 지금 끈 떨어진 연 신세일지도 모른다는 말인데.’

만약 기사단에 접근한 자가 인형술사 하나뿐이었다면, 인형술사의 죽음을 기점으로 기사단은 원탁과의 접점을 상실한 셈이다. 대지휘관 발다싸레는 저가 섬기기로 한 자의 죽음도 모르는 채 기약 없이 연락을 기다리는 중일지도.

뭐, 지금 당장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은 아니다.

“계속해서 감시를 유지해. 중국 놈들 채널도 이용하고. 다만 후샨량에 대한 지시는 피할 것. 중국 국가안전부를 이용할 일이 있다면 다른 두 놈을 써먹어라.”

“예.”

“마무르 쪽에서 들어온 연락은 없나?”

비록 갓 활동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무슬림들의 종교적 연결망은 ‘종교적인’ 수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수연은 내 기대에 부응하는 답을 내놓았다.

“함께 간 인원들의 정기보고에 따르면, 루구루족의 일맥인 음라리 부족의 족장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자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해당 부족과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는 개인 운송업자라더군요.”

“괜찮은 시작이로군. 정기보고 외에 마무르 본인의 전언은 없고?”

“있기는 합니다만, 형님께서 굳이 들으실 만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한 푸념일 뿐이지요.”

“뭐라고 했기에?”

“「나는 이 나라 형제자매들의 수준을 알았어요. 시시해서 죽고 싶어진 것입니다.」가 전부입니다.”

“…….”

말 그대로 들을 가치가 없는 푸념이로군. 변질된 신앙을 참아주기가 생각 이상으로 고역이었나?

본인 입으로 이미 인도네시아를 경험해봐서 괜찮으리라 말하긴 했지만, 사하라 이남의 주술신앙은 인도네시아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력한 것. 내가 쿠란 좀 읽었노라 자부하는 지하디스트가 보기엔 보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뒤틀리는 기분이 아닐는지.

그래도 전언으로 푸념이나 늘어놓는 걸 보면 잘 견뎌내고 있는 모양이다.

지하디스트를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놓고 수연을 위시한 참모진과 현안을 논의하기를 근 한 시간여. 나는 새롭게 들어온 보고를 접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영국 선단 하나가 인근 해역을 통과할 예정이다?”

“예. 구식 프리깃 한 척에 민간 무장선박 두 척으로 구성된 선단인데, 현재 항로를 유지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와의 거리가 50킬로미터 이하까지 줄어들 것 같습니다. 형님께서 잠시 시간을 내셔도 좋을 법한 고가치 표적이라 보고 드립니다.”

나는 부하가 가져온 낱장짜리 인쇄물을 받아들었다. 종이엔 흑백으로 인쇄된 항로도와 함께 선박의 현재 위치와 상태가 건조한 문자열로 인쇄되어 있었다.

「HMS SUTHERLAND / UK / -6.350912° 39.113061° / Position Received : 05-13-2021 22:11 UTC, 3 minutes ago / Status : Underway / Course : 158° / Speed : 20kn / ……」

「INDIGO BLUES / UK / -6.205812° 39.113883° / Position Received : 05-13-2021 22:11 UTC, 3 minutes ago / Status : Underway / Course : 158° / Speed : 20kn / …」

「CORAL VENTURE / UK / -6.210856° 39.112196° / Position Received : 05-13-2021 22:11 UTC, 3 minutes ago / Status : Underway / Course : 158° / Speed : 20kn / …」

문자열을 눈으로 훑어 내린 나는 부하에게 물었다.

“교차검증은?”

“끝났습니다. AIS 위치조작은 없는 듯합니다.”

바다에서의 인명보호를 위한 국제협약(SOLAS)에 따라, 원양을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의무적으로 선박 자동식별장치(AIS)로 자신의 위치를 공개해야 한다. 해상충돌을 예방하고 사고 발생 시 인명구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물론 여기엔 군사적인 예외조항이 있어서, 작전 중인 군용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은폐하거나 조작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다못해 소말리아의 해적들조차 AIS 데이터를 조회해보고 사냥감을 물색하므로, 데이터를 잘만 조작한다면 해적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위축시킬 수 있었다.

“거짓은 아니란 말이지…….”

나는 인디고 블루스와 코럴 벤처라는 두 민간 무장선박의 상세를 살폈다. 두 척을 합쳐 1만 5천 톤에 달하는 배수량. 이는 곧 최소 1천 이상의 섬나라 각성능력자들을 한꺼번에 수장시킬 기회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기운다. 나는 보고를 가져온 부하에게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다.

“남은 시간 동안 이 선단에 어떤 놈들이 타고 있는지 알아봐. 눈에 띄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가 조사 결과 이렇다 할 특이사항이 나오지는 않았다.

두 척의 무장여객선은 영국의 여러 헌터 클럽(HC)들이 연명으로 대여한 것으로, 선박을 대여하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모집이 진행되었다.

「우리 클럽 단독으로는 이 배를 운용하기가 부담스러운데, 혹시 힘을 합칠 다른 클럽이 있느냐?」 하는 식.

선박의 체급은 선박의 활동범위, 장비 운용 및 항해생활의 편의성, 교전시의 방어력, 수주 가능한 의뢰의 수준 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머릿수가 많지 않거나 자금력에 한계가 있거나 한 헌터 단체들은 힘을 모아 연명으로 배를 빌리는 일이 흔했다. 인력과 자금력 모두가 충분하더라도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기가 싫어 이 방법을 활용하는 단체들도 많았고.

그렇게 공개모집이 진행된 탓에, 온라인에 남아있는 흔적들만으로도 두 무장선박의 탑승자들을 가늠해보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혹등고래 각성체의 활동정보를 조회한 나는, 마침내 예정에 없던 야간 사냥에 나섰다.

적도 인근의 밤바다는 의외로 수온이 높지 않았다. 가볍게 손으로 끌어와 보면 오히려 시원함이 느껴질 만큼. 해풍은 동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희미한 실바람이었고, 파도가 드문 해수면은 바다보다는 호수에 더 가까운 잔잔함을 보여주었다.

사냥감들은 기존의 속도를 유지하며 무방비하게 다가왔다.

언제라도 해적들의 습격에 대응할 수 있게끔 대형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수중으로부터 가해지는 기습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면 반드시 속도를 줄여야만 한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음향탐지장치의 효율이 감소하니까.

‘금방 끝나겠군. 서덜랜드가 끼어있다고 해서 약간은 경계했는데.’

영국 해군의 프리깃, HMS 서덜랜드. 합동훈련을 벌였던 미 해군이 「수중의 적을 상대하는 능력으로는 세계 제일」이라며 극상의 찬사를 보냈던 배.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긴 하나, 이 배가 완전히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면 나로서도 조금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었다.

회로에 마법을 장전한 나는 머릿속으로 몇 번의 예행연습을 거쳤다.

그러곤 술식을 발현했다.

우웅-! 우우우웅-!

다양한 음계의 장파장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고래의 노래. 내가 알리바이를 위해 재현한 「키요우타마히코」의 호곡(號哭)은 조용히 물살을 가르던 프리깃을 삽시간에 긴장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군함이 감속에 들어가면서, 선체 뒤로 길게 늘어져있던 견인식 음향탐지기(견인소나)가 잠깐의 관성으로 흐물흐물하게 흔들린다. 함교와 전투정보실에선 긴급한 교신이 이루어지고, 함정 내부에 붉은 경고등이 명멸하며 전투배치가 개시되는 순간,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냥감을 겨냥하여 최대출력의 지향성 음파 공격을 때려 박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프리깃의 선체 하부가 비현실적인 속도로 파쇄되었다. 굵직한 용골조차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명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져, 뼈대를 잃은 군함이 두 쪽으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금속피로의 색채가 가장 짙은 부분을 공격한 결과였다.

여기에 진동마찰에 힘입은 연료의 발화까지 더해졌으므로, 5천 톤짜리 프리깃의 운명이 단 일격에 결정나버린 셈이었다.

군함과 대열을 이루어 나아가던 두 척의 무장여객선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두 척의 표적에 대해서도 프리깃과 같은 운명을 선사해주었다.

손쉬운, 너무나도 손쉬운 사냥.

사냥보다는 차라리 밤마실을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갈라지고 불타는 배들로부터 군인과 민간인들이 탈출을 기도했다. 탈출용 보트를 전개할 시간조차 부족하여, 2천여 인명(人命)의 대부분은 맨몸으로 난간을 넘어 바다에 투신했다.

-!

수면 위에서 빚어지는 아비규환은 들리지 않는 절규들로 가득했다. 몇몇 뛰어난 각성자들은 짧은 거리나마 물결을 밟고 달림으로써 자신의 비범함을 드러냈다. 침강하는 와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배가 물 밑으로 완전히 잠겨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생존자들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치사량의 음파들을 흩뿌려주었다.

잔잔했던 바다가 파르르 흔들리는 순간, 물에 잠겨있던 자들은 모조리 살갗이 터져 죽었고 물 위를 달리던 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물 아래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진 다음엔 당연히 온몸이 분해되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의 색상이 달라진다.

황금기의 눈이 아니더라도 선명하게 느껴질 색채의 변화.

뭉글거리며 올라가는 세 갈래의 굵은 연기들 아래, 불타는 배들이 해수면에 삼켜지며 푸슉 푸슉 달궈진 수증기들을 내뿜는다.

합계 2만 톤의 배수량을 물 밑으로 처박고 네 자릿수의 인간을 터트려 죽인 나는, 수면부족과 끝없는 고민으로 인한 피로가 조금이나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좀 개는 기분이군.’

이제는 소말리아의 해적들도 알고 있는 바,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의 핵심은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수행의지를 파괴하는 것.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은 그러한 전략의 가장 파멸적인 실천이었다.

런던을 공략하기 전까지, 나는 앞으로 몇만 톤이나 되는 강철을 더 심연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히게 될까.

침몰하는 선체들 내부엔 미처 탈출하지 못한 생존자들이 남아있었다. 선실에 갇힌 공기 덕분에 간신히 익사를 면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비각성자 수병들과 선원들이었다.

나는 추가적인 공격을 가해 빠른 죽음을 선사할까 하다가, 각성체 혹등고래가 이미 가라앉고 있는 배를 집요하게 해체해버린 사례가 없음을 떠올리곤 회로에 장전한 마법을 거두었다.

강철의 관에 갇힌 우는 얼굴들이 느릿한 침강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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