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승천의 계단 (2)
머리가 혼잡한 사고로 가득하니 마법적인 수면유도도 큰 효용이 없었다. 어차피 잠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나는 어두운 선실을 나와 스텔라 포르투나의 종합지휘실로 향했다. 현대적인 전투함으로 치면 전투정보실쯤 되는 공간.
베크룩스를 탈 때엔 함교에서 지휘를 수행했지만, 선단과 투입인원의 규모가 커지고 운용 장비도 다양화된 지금은 정보수집 및 분석, 통신에 특화된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함교에도 지휘기능을 남겨두었으므로, 어느 한쪽이 무력화된다 한들 스텔라 포르투나는 여전히 기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지휘실로 향하는 적막한 통로엔 오직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생화학적 오염에 대비해 고가의 환기 시스템을 고밀도로 구축하도록 지시한 보람이 있어, 선내의 공기는 청정실 수준으로 깨끗했다. 감염성 높은 병원균이 침투하더라도, 제때 대응하기만 한다면 집단감염이 일어나긴 어려울 환경.
지휘실로 들어서자, 당직을 서고 있던 경호실 인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
“잠이 오질 않아서.”
“그래도 조금 더 잠을 청해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이 시간에 여기 계셨다는 사실을 알면 비서실장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
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부하를 비뚜름하게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 내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부하는 강한 당황의 색채를 드러냈다.
“아, 그, 죄송합니다. 절대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건 그러니까, 형님께서 평소에 비서실장을 배려해주시는 부분들을, 음…….”
“됐다. 피곤하면 말이 좀 잘못 나올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항상 정돈된 말만 하나. 황망해하는 감정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사소한 말실수를 트집 잡을 이유가 없다.
“경태는?”
“표적의 주변 인물들 가운데 하나와 동침 중으로, 현재 위치는 704호실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경태의 위치를 눈으로 탐색해보았다. 선체의 벽을 뚫는 시야가 어렵지 않게 호텔 내부에 닿는다.
‘이게 호텔인지 매음굴인지 모르겠군.’
호화로운 호텔의 객실들은 온통 떡을 치는 남녀들로 가득했다. 하나의 방에 셋 이상의 인간들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고. 몇몇 방에는 남자와 남자만 있거나 여자와 여자만 있거나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목숨을 밑천 삼아 장사를 하는 헌터들에겐 정신적인 부하를 덜어낼 방편이 필요하니까. 술, 도박, 아니면 성(性).
이유는 다를지언정, 정신적 부하를 심하게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매 올림픽 대회마다 십만 단위의 콘돔을 써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봐야겠지.
경태는 머리색이 짙은 이탈리아 기사와 뒤엉켜있었다. 인종을 넘어서는 낯짝과 마법 같은 붙임성을 활용해 미인계를 사용한 모양. 헌터들 가운데 외양이 단정한 인간은 드문 편이라, 여자 입장에서도 반가운 유혹이 아니었을는지.
날이 밝은 뒤 경태 녀석이 물고 올 정보를 기대해 봐도 좋을 듯하다.
자리에 앉은 나는 내면의 코드 해석과 아직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궁리, 추후의 행동에 대한 구상 따위를 느슨하게 병행하며, 눈으로는 때때로 정박지와 호텔 주변의 위험요소를 탐색했다. 임마누일을 만나기 전에 이미 위험요소가 없음을 확인했고, 이 순간에도 곳곳에 배치된 인력들이 경계망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눈만큼 정확한 탐색수단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자연히 사고의 흐름은 침대 위에 있을 때 이상으로 두서가 없어졌다. 피곤한 와중에 집중도 하고 있지 않으니 당연한 일. 반쯤은 휴식에 가까운 시간 활용이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사방에 쓰레기가 널린 해변에서 기침을 하며 배를 몰고 나갈 준비를 하는 초췌한 어부 두 명이었다. 중국산 폐병에 걸린 환자들이었다. 한쪽은 기침을 하다가 피 섞인 가래를 뱉기까지 했다.
이 환자들은 나로 하여금 마샤트를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녀 또한 험난한 도피행에서 지랄 맞은 폐병에 걸렸고, 지금은 나의 보호 하에-실질적으로는 제독의 보호라고 해야겠지만-푸에르토 바야르타의 모처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니까.
‘산 채로 올 수는 있으려나?’
취약해진 리더십이라도 구심점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마샤트가 퇴장하는 건 충분한 수의 부족원들이 내 그늘에 떨어진 다음이어야 이상적인 것. 지금 정통성을 지닌 추장대행이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내가 원하는 인력의 ‘유통 중 손실분’이 유의미한 증가를 보일 게 뻔했다.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기에 가장 질이 좋을 인적자원의 손실 증가다.
그래선 곤란하지.
「죽고 싶습니다.」
호흡도 멀쩡하지 않은 마샤트가 통화 상에서 토로했던 절망 가득한 자책.
「저는 애초에, 이 자리를 물려받아선,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 부족이 꿈꿨어야 할, 더 나은 내일들이, 저 하나 때문에, 전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때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여기까지, 아낌없는 도움을 베풀어주신,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 자신이,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저는, 차라리, 여기서 죽어 없어지고만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께 진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꺾여버린 심지. 오죽이나 심리적으로 몰려있었으면, 또 오죽이나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으면 나에게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까.
정신이 피폐해진 인간을 상대해주기가 번거로웠으나, 나는 해야 할 위로를 입에 담았다.
“빚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
“마샤트 양, 내가 언제 빚 갚으라고 독촉이라도 했습니까? 그렇잖아도 힘겹고 아픈 와중에 왜 그런 쓸데없는 근심까지 하고 있습니까? 다 필요 없으니 살아서 오기나 하십시오. 금전적인 손익을 떠나, 나는 당신이 무사히 내게 와주기만을 바랍니다.”
「어째서…….」
“내가 그랬지요. 이익을 따지는 사업가의 우정으로도, 당신 한 사람쯤은 대가 없이 살길을 마련해줄 의사가 있노라고. 그러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망설이지 말고 내게 의탁하도록 하라고. 기억합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하지만 제가, 저 혼자 도망친들, 무슨 염치로 남은 생을 살아, 사, 살아가겠습니까. 후회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럼 다 데리고 오시지요.”
「……예?」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속마음이야 어쨌든, 아직도 당신의 지도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길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지금처럼 언제 끝날지 모를 한시적인 보호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기가 원하는 대로’에 축적된 분노로 제 생명을 태워버릴 선택이 포함될 따름이지.
경험하고 또 연구한 바, 가난하고 못 배운 원주민들의 뼛속까지 배어있는 증오는, 대상의 경계가 넓으면서도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표층의식으로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원망한다고 여기지만, 실질적으로는 백인사회 전체를 혐오하는 것.
이 다분히 ‘인종적’인 혐오에 바람을 넣고 약간의 역사의식을 배양해주기만 하면, 그들로 하여금 백인문명 전체에 대한 증오를 품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물론 마음이 닳고 닳아 증오를 품을 기력조차 없는 자들이 있기는 할 것이다. 정신의 근간까지도 다 타버린 잿더미와 같아, 아무리 강한 바람을 불어넣어준들 타오를 불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들.
그런 ‘낙오자’들은, 뭐, 마샤트의 눈과 귀가 닿는 곳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살아가도록 조치할 요량이다. 내가 이번 일에 그을 자기만족의 선이라 해야겠지.
돈이 들어봐야 얼마나 들겠는가.
나는 달콤한 유혹을 이어갔다.
“딱 거기까지가 당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미 저지른 실수들을 어쩔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의 수습은 하는 셈이라고. 난 마샤트 양 당신의 부탁 때문에 다이아몬드 카지노의 예치금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 정도면 부족한 대로 위안을 삼기엔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는, 저는.」
“내게로 와서 다 내려놓으십시오.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저 시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내가 내미는 조건 없는 호의들의 진의를 캐묻는 대신, 약해질 대로 약해져있던 마샤트는 그저 울음을 터트릴 따름이었다.
「제가 그렇게까지, 당신께 의지해도 괜찮은 걸까요?」
“물론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무너져준다면 나로선 오히려 반가운 일이지. 마샤트를 퇴장시키고자 일부러 경쟁자를 밀어준다거나 하는 귀찮은 작업을 생략할 수 있을 테니.
“내 우정엔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는 어두운 터널이 아니라, 끝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밝은 길을 걸으십시오. 가능한 많은 부족원들을 내게로 피신시키고, 더는 당신에게 의지하는 부족원이 없어졌을 때, 그때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당신의 행복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추장이 아닌 개인으로서.”
마샤트라는 한 인간의 행복을.
이후 통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마샤트는 한참을 울고 또 울어대며 고장 난 기계처럼 고맙다는 소리를 반복했다.
이렇게까지 약해진 인간이 나를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본인이 믿고 싶은 현실을 믿는 동물이고, 나는 계속해서 믿는 편이 행복한 환상을 보여줄 터이므로. 이런 종류의 자기최면은 한번 시작되면 그걸로 끝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새벽의 항구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슬슬 건기로 접어드는 적도 인근 지역에서 이 시간에 비가 내리는 건 드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떨어지는 빗줄기들은 굵기가 굵고 기세가 사나웠다.
아마도 이상기후의 한 단면이겠지.
대기 중 탄소농도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들, 지구온난화의 여파가 즉각적으로 사라질 리 만무하다. 탄소농도의 감소추세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전 세계의 기후는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갈 것이다.
선체에 빗발이 부딪히는 소리는 청각적으로 작용하는 안정제에 가까웠다. 그 사이로 간혹 천둥이 울리기도 했지만, 나는 골통 안에 가득하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야야. 조용히. 더 주무시게 둬.”
……?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경태의 목소리를 인지했을 때, 나는 내가 지도를 펼쳐놓은 테이블에 엎드려있음을 깨달았다.
“…….”
고개를 들어보니 낭패를 본 듯한 경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쏟아지던 새벽은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되어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뚝 잘려나간 듯한 감각. 마법적인 수면유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경과한 시간은 대략 두 시간 반 남짓. 멍한 의식을 더듬어보니 질 나쁜 꿈의 파편들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내 기준으로는 정말로 드문 숙면을 취한 셈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렇게나 많은 고민거리들이 있었건만.
어쩌면 고민거리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덕을 본 것일지도.
나는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왔나?”
“예, 형님.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되어 송구합니다.”
“아니야. 깰 때가 되어서 깼을 뿐이지. 뭔가 알아낸 건 있나?”
“어느 정도는요.”
경태는 이탈리아 기사를 침대에서 녹여 얻어낸 정보들을 보고했다.
내가 눈여겨보았던 사내가 OSML 산하 각성능력자 헌터 조직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발로레」 기동대를 맡고 있는 지휘책임자이며, 계급은 일반 기사(Cavaliere)의 바로 위에 해당하는 간부(Ufficiale)라는 것.
그의 아버지는 기사단의 핵심 회원들 가운데 하나로서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창설을 주도한 대지휘관(Grand’Ufficiale)이자 힘이 매우 우수한 축에 드는 이중각성능력자라는 것.
명목상으로는 평기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부 취급을 받는 아들 역시 빼어난 수준의 각성능력자이긴 마찬가지라는 것.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계급체계는 모체인 OSML의 것을 그대로 이식하였으되,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의 계급이 OSML의 계급과 동등하게 인정되지는 않으며, 오직 대지휘관 한 사람만이 예외라는 것 등.
3대가 나란히 자연적인 각성을 이룬 것도 평범한 일이 아닌데, 그 셋 모두가 준수한 능력자로 거듭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알고 보니 이 기사단이 전에 우리 애들에게 스카웃 제의를 넣은 적이 있더라고요.”
“전이라면 언제?”
“무장공비들 때려잡고 나서요.”
“…….”
“당시 비슷한 제의들이 하도 많이 쏟아져서 일일이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데, 베네데타가 말하기를……. 아, 베네데타는 간밤에 같이 잔 자칭 기사 아가씨의 이름입니다. 아무튼 그 아가씨가 말하기를 우리 쪽에서 누구 하나 회신을 보낸 사람이 없어서 유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네 대우가 정말로 좋은 편이니 지금이라도 넘어오는 게 어떠냐고 떠보기도 하고.”
마지막은 그냥 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근데 확실히 뭔가 있기는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저한테 넘어오라고 떠볼 때, 자기네에게 특별한 수련방법이 있다는 말을 흘리더라고요. 능력을 효율적으로 강화하면서도 불사암 발병확률을 낮추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나요?”
이런 유혹 자체는 특별한 게 아니다. ‘특별한 수련법’은 중국의 일개 도관부터 시작해서 장삿속 밝은 온갖 능력자 단체들이 앞다퉈 주워섬기는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적인 맥락이라는 게 있었고, 경태 역시 그 부분을 이야기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흔한 약팔이들 중 하나구나 하고 넘겼겠지만, 형님께서 그 반지 낀 남자의 회로가 자연각성 능력자 치고 보기 드물게 정교하다 하시기도 했고, 제 촉이라는 것도 있고…….”
“네 촉이면 믿을 만하지.”
내 평에 칭찬받은 개처럼 헤헤 웃어 보이는 경태.
“감사합니다, 형님. 아무튼 그 반지 아재가 저녁에 국제 고위험 수렵협회에서 주관하는 뭔 인적 교류행사에 참석한다던데, 거기 한번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 촉이 아무리 좋다 해도 형님의 눈과 감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요.”
“……고려는 해보마.”
나는 방금 들은 것들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