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58화 (258/561)

#31. 승천의 계단 (1)

인장반지를 낀 사내의 마력회로는 기이할 정도로 구조가 깔끔했다. 대마법사의 작품과는 거리가 멀지언정, 마력누수가 전무하고 군더더기도 전혀 없는 회로구조는 자연적인 각성능력자들에게선 발견하기 어려운 희소함이었다.

물론 자연각성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라고 단언할 수준은 아니어서, 다른 때 같았으면 운도 좋고 자질도 좋은 놈이로군, 하고 가볍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 회로의 구조가 인위적인 설계 및 세례의 산물이라 치면, 고려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제 행적을 감추고 싶은 대마법사가 제 권능을 적당히 줄여서 행사한 결과이거나……’

혹은 OSML에 속한 누군가가 오래된 지혜의 편린을 계승해오고 있었거나.

가능성은 전자가 더 높겠으나, 후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원탁이 스승새끼의 배신으로 황금기의 눈을 상실하기까지, 과반세기에 걸쳐 행해진 원탁의 사다리 차기가 완벽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과거 원탁의 대마법사들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행정력에 기대어, 전 세계의 영험하다는 주술사들과 수행자들을 초청하거나 찾아다닌 바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의 조각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차 사다리를 타고 오를지 모를 버러지들을 찾아 박멸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탐색은 저가 사이비인 줄도 모르는 사이비들과 자기최면에 빠진 얼간이들을 찾는 결과로 끝났지만, 아주 드물게 마법이라 할 만한 지혜를 다루는 자들이 있기는 했다.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기슭, 외진 산간의 아스라마(आश्रम/은둔자들의 사원)에 틀어박혀있던 요가 수행자 집단이 대표적인 예.

나는 스승새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대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이라는 건 잘 알겠소.」

오랜 고행과 수양, 그리고 미약하나마 마력이 깃든 육체로도 견디기 어려웠던 가혹한 고문의 끝자락에, 수행자의 한 사람은 증오가 아닌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해할 수가 없구려. 모든 깨달음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음으로써 성취하는 것일진대, 그대들은 그렇게까지 앞서 깨달은 자들이면서 어찌 이리도 잔인한 심성을 지니고 있단 말이오? 어찌하여, 그대들은 우리에게 이토록 크고 깊은 고통을 주는 거요?」

「그대들의 요구 또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요. 우리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그대들이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지혜를 캐묻는 이유가 무엇이오? 너무나 높은 곳까지 올라가, 더는 아래가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이오?」

통역이 전하는 말을 들은 스승새끼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개인적으로, 그 ‘보잘것없는 지혜’만 가지고 지금의 경지에 도달한 너희의 노력엔 경의를 표한다. 설마하니 선천적으로 열등한 족속들 가운데 여기까지 도달한 무리가 있을 줄이야.」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촛불보다 희미한 빛 한 줌을 쥐고서 얼마나 긴 어둠을 헤쳐 온 것이냐. 우리는 이제껏 무수히 많은 버러지들을 보아왔으나, 그들 중에서 너희만큼 먼 길을 온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은 처음부터 너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 언제까지고 「승천의 계단」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둘 순 없는 것이다.」

「너희는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죄인이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아라. 그러면 너희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베풀어주리니.」

승천의 계단(Stairway of ascension).

거창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건 결국 세상에 남아있는 마소를 독점하고픈 욕심에 불과했다. 안 그래도 고갈이 심한 마소를 너희 버러지 같은 것들이 낭비하면, 더욱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야 할 우리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 이런 욕심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승천의 계단이다.

우리는 너희를 밟고서 높은 곳으로 향하리라고.

원탁의 관점에서, 현재의 인류는 진정한 인류가 아니었다. 그저 진정한 인류의 형상(Imago)만을 회복한 열화판 모조품들일 뿐이지.

빛과 진리의 원탁이 지닌 모든 지혜의 궁극적인 원천,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은 천만 년 전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래된 인간의 유해는 원시인류의 형상이 아닌, 현생인류에 가까운 형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키와 골격 양면에서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인류의 기준으로도 극히 우월한 편에 속하는 형상을.

이를 곱씹은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대홍수 당시 승천자들을 제외한 인류 문명은 이미 한 차례 총체적인 멸망을 맞이했고, 희소한 생존자들의 후계는 본연의 형상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퇴보와 퇴화를 거듭하여 짐승의 몰골로까지 전락했던 것이었구나.」

「현재의 인류는 퇴화에 뒤이은 진화로 간신히 영화롭던 시절의 형상만을 회복한 것이로구나…….」

결론이 이러하니 절박함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나. 존재 자체가 문명이었던 자들의 반열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날 수밖에. 벌레들을 찾아 죽이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그 요가 수행자들의 관점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기는 하군.’

수행자들은 이야기했다.

「우리는 현재 암흑의 시대(칼리 유가)를 살고 있으며, 그렇기에 영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라고. 이들이 말하는 칼리 유가는 일반적인 힌두 신화에서 논하는 칼리 유가보다 원탁이 말하는 마법의 암흑기에 더 가까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곧 제국주의자들과 같아짐을 뜻하진 않았다. 도덕규범을 무시하더라도, 그로써 해를 입히는 대상을 자신에게만 한정지었던 까닭. 요가의 수행은 언제나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해야 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이런 선례가 있는 만큼, 세상 어딘가엔 원탁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구도자나 지혜의 조각이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

가령 어느 귀한 가문에서 무관심 속에 전해지던 수집품들 가운데 하나가, 마법의 시대가 돌아오자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거나.

마침 OSML에 속한 가문들은 원탁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좋은 배경들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 가문들 중 하나가 매우 특별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다, 라는 게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닐 터.

인장반지가 선사하는 기시감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있는 내게, 호텔에서의 식사가 끝나갈 즈음 얼큰하게 취한 임마누일이 뜬금없이 중요한 정보를 내뱉었다.

“아, 참. 그거 생각났어. 그거.”

“그거라니?”

“있잖아, 왜. 전에 통화할 때, 뭔가 빼놓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던 거. 그게 뭐였는지 이제 생각났다고.”

“……?”

“내 부하가 협상장에서 영국 상인들의 통화를 우연찮게 엿들은 적이 있는데, 상대를 마이 로드(My lord)라고 부르더래.”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대꾸했다.

“……특이하군.”

“그치? 조직의 문화라는 게 원래부터 천차만별이고, 또 멀쩡하던 동업자들도 심심찮게 머리가 돌아버리는 시대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마이 로드 어쩌고 하는 건 좀 많이 괴상하잖아? 그래서 내 부하도 알면 알수록 더 이상해지기만 하는 신참자들이다…… 하면서 듣고 있었는데, 통화 중에 욱스브릿지 백작이라는 사람이 언급되더라는 거야.”

욱스브릿지 백작.

영국의 전(前) 상원의원이며, 아버지인 앵글시 후작으로부터 원탁과의 인연을 물려받은 자.

그 인연이라는 게 좋아서 맺은 친분이라기보다는 정부와 원탁의 소통창구로서 귀찮은 일을 떠맡은 것에 가깝긴 하나, 어쨌든 원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난날 수연이 런던에 공작을 가할 때, 내가 표적으로 삼으라 지시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이런 게 있으면 좀 빨리 알려줄 것이지.’

나는 못내 화가 나려는 것을 꾹 억눌렀다. 이게 중요한 정보다, 라는 티를 내는 건 이쪽이 욱스브릿지 백작이라는 인물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것과 같으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다시금 표정을 관리하며 절제된 관심을 내비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언급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언급이었는지 듣고 싶군.”

내 말을 들은 임마누일은, 비어버린 보온병들을 차례로 흔들어보고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요는 백작이 자기들 하는 일을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거였어. 너희가 무슨 꿍꿍이로 그런 짓들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지원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나? 근데 통화 상대는 개의치 않는 것 같더라구. 예, 예 하던 영국 놈이 그럼 계속 진행하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고 하니까.”

“흠…….”

“이게 말이야, 듣다 보니 이것들이 진짜 귀족들이랑 엮여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게 아니겠나? 백작이니 마이 로드니 하는 칭호들이 조직문화가 아니라 진짜 백작이고 진짜 마이 로드가 아닌가 싶은. 심지어 내가 찾아보니까 욱스브릿지 백작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더라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고 자시고, 그것만 듣고서 무슨 결론을 내리겠나. 미리 알려주었으면 나도 조사를 해보았겠네만.”

일말의 화를 담아 뱉은 말에, 임마누일은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 탓을 했다.

“에이, 그건 자네 잘못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그때 그랬잖아. 술을 더 마시면 떠오를 것 같다고. 그런데도 자네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지. 이게 자네 잘못이 아니면 뭐야?”

나는 손을 관자놀이로 끌어올렸다.

“……그래, 내가 잘못했군.”

“알면 됐어.”

주정뱅이가 끄덕이며 묻는다.

“자, 이제 날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같이 놀아 줄 거야, 아니면 매정하게 자네 볼일 보러 가버릴 거야? 내가 데려온 예쁜이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여자를 바람맞히는 남자는 절대로 좋은 남자가 못 된다구.”

“헛소리 그만하고 일어나게. 자네가 데려온 아가씨들은 자네가 책임지도록 하고. 클라이언트가 이쪽의 미팅 조건을 받아들이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지. 가급적 빠른 연락을 기대하겠네.”

내 사무적인 태도에 레드 마피아는 질렸다는 듯 잔소리를 해댔다.

“나 이런. 장담하는데 자네는 손자 손녀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기 어려울 거야. 뭐, 그 전에 자식부터 보는 게 먼저겠지만. 대체 언제까지 홀몸으로 살 작정이야? 결혼 안 해? 동양의 신비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 같은데? 응?”

여자 끼고 술이나 퍼마시는 게 좋은 할아버지의 자질이라니. 별 헛소리를 다 듣겠군.

자리를 파한 뒤, 레드 마피아 일행은 내가 감옥으로 준비한 호화 요트에 수용되었다. 아홉 개의 스위트, 헬기 이착륙장, 헬스장 및 사우나와 스파까지 갖춘 요트는 요트들의 가격이 예전 같지 못한 이 시대에도 근 천억 원의 중고가를 지켜낸 사치스러운 탈것이었다.

스텔라 포르투나로 복귀한 나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념들로 말미암아 필연적인 수면장애에 시달렸다.

원탁의 하수인들일 게 분명한 섬나라 노예상인들이 욱스브릿지 백작의 경고를 받았다는 건, 그들 내부에 제법 본격적인 갈등이 움트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

영국 정부가 원탁의 고삐를 쥐는 데 애를 먹고 있거나, 혹은 원탁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거나.

전자일 경우 욱스브릿지 백작은 정부와 원탁의 소통창구로서 정부의 경계심을 대변한 것일 테고, 후자일 경우 욱스브릿지 백작과 가까운 원탁의 마스터가 정부의 힘을 빌려 다른 마스터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개연성은 있다. 정쟁(政爭)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쟁의 와중에도 쉬이 그치지 않는 법. 사보이의 대공과 그 아들이 보여주듯, 권력은 피로 이어진 부자간에도 나누거나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내게는 호재면 호재였지 악재가 아니었다. 다만 이걸 당장 이용할 방법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을 따름.

의식의 수면에 무수한 고민과 구상과 의문들이 부침을 거듭하는 가운데,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뇌리가 헝클어지는 새벽으로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