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검은 대륙의 러시아인 (11)
“작작 좀 처마시게, 모냐. 난 정신이 멀쩡한 상대와 대화를 하고 싶으니.”
내가 한마디 하자, 임마누일은 술 따르기를 그치는 대신 짐짓 성난 척을 해보였다.
“모욕적이군! 고작 이 정도로 내 정신이 무뎌질 거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자네 생각이 맞아.”
“…….”
“걱정 말라구. 이제부터는 천천히 마실 거니까. 앞의 두 잔은 일부러 빨리 비운 거야. 술의 양이 적을 땐 마시는 속도라도 빨라야 위장에 기별이 온단 말이지. 그 뜨끈함 말이야.”
새로 채운 잔을 아쉬운 눈으로 응시하길 잠시. 임마누일은 시선을 거둬들이며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무튼, 어떻게 할래?”
나는 길지 않은 고민을 끝내었다.
“나도 내 애들과 함께 공중침투로 들어가도록 하지.”
“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뭔가.”
본디 군인이었던 독재자에겐 이쪽의 강인함을 어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조건을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 착륙지점은 대통령 관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바꿨으면 좋겠군. 우리의 침투를 재료로 삼아 정치적 자작극을 연출하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일련의 무장한 외국인들이 대통령 관저를 노리고 조용한 공중침투를 감행했다? 이건 정치적 스캔들을 꾸며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재다. 우리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노라 해명한들 먹힐 리가 없겠지. 우리의 해명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을 테니까. 애초에 착륙단계의 기습으로 살인멸구를 해버리면 귀찮아질 일 자체가 없다.
물론 내가 직접 가는 시점에서 살인멸구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리지만, 그 뒤의 흐름은 나로서도 수습하기가 곤란한 것일 터였다.
임마누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매사에 신중하기도 하지. 나랑 내 아들을 인질로 잡고도 안심이 안 되나? 내 옆엔 자네 부하들이 붙어있을 거고, 내 아들은 이쪽에 남겨두고 갈 텐데? 우리 브라츠키 크루그의 보복능력은 확실하다니까 그러네.”
“나는 자네 조직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기본을 지키려는 것일 뿐.”
대부분의 사고는 기본을 지키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지진, 홍수, 해일 등의 천재(天災)들조차 인재가 더해짐으로써 화룡점정을 찍은 사례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거 참…….”
수염을 긁적이는 임마누일.
“그 사람은 나름 이동시간도 아끼고 외부노출도 최소화하겠다고 장소를 거기로 잡은 건데,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장소변경을 통보하면 불쾌해할지도 몰라. 시작부터 점수를 까이고 들어가는 셈이지.”
“잃은 점수는 다른 방법으로 만회하면 돼.”
“다른 방법?”
“일단 착륙지점부터 물색해보지. 지도와 위성사진,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대통령이 제정신이라면, 이런 요구를 하면서 가장 최신의 지도와 위성사진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본디 장군이었던 인간이 설마하니 이 정도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을까. 역시나, 임마누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핸드폰에 이미지를 띄워 내밀었다.
“자. 보게나.”
지도와 위성사진을 차례로 살펴본 나는, 이내 새로운 착륙지점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곳, 도시 중심부의 골프장이 좋겠군.”
대통령 관저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골프 코스는 대체 착륙지로서 최적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면적은 넓고, 심야의 코스에 사람이 있을 리 없으며, 낙하산이 걸릴 법한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곳곳에 자리 잡은 워터 해저드와 골프장 바로 옆의 저수지는, 착륙속도를 충분히 줄이지 못했을 때 인명손실 확률을 조금이라도 낮춰줄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
“본관 앞 초지에 착륙하겠다고 전해주게.”
내 말에, 임마누일이 어깨를 으쓱인다.
“뭐, 일단 말은 해보도록 하지. 싫다고 거부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고, 점수를 만회할 방법이라는 게 뭔가?”
“간단해. 출발지점을 아주 먼 곳으로 잡는 거지.”
“멀다면 어느 정도나?”
내가 마음에 둔 출발지점은 탄자니아의 루피지 강 중류에 있는 시완두 호수였다. 내륙 깊숙이 들어간 이곳에 선단을 띄워두고, 유사시 물줄기를 따라 기동하는 거점으로 삼아 공능법인으로서의 활동과 개인적인 사냥을 병행하는 게 사전에 수립한 계획이었던 까닭.
나는 임마누일의 폰을 돌려준 후, 내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대략적인 비행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적어도 천 킬로미터는 넘어가겠군.”
“맙소사. 얼마라고?”
“천백 킬로미터쯤 되지 않을까 싶네. 이 정도면 실력을 과시하는 건 충분하지 않겠나?”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지! 그런데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진심이 아니면?”
“이상하잖아! 평소엔 그렇게나 신중하게 굴던 친구가, 갑자기 이토록 마쵸(Мачо)스럽게 나온다는 게.”
윙슈트 비행은 급격한 체력소모를 동반한다. 마법이 돌아오기 이전 시대의 최장시간 비행기록이 채 10분이 되지 않았을 정도. 각성능력자라 해도 몇 시간씩 비행을 이어나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비행 도중 열량을 보충할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니까.
현 시점에서 최장거리 비행기록은 「전미 슈퍼히어로 협회」의 「파이어 팰컨」이라는 관심종자가 가지고 있었다. 무모하게도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횡단하겠다고 나섰다가, 체력 고갈로 비행경로가 비틀린 끝에 강한 돌풍과 비구름을 만나 추락사 위기를 경험한 인간.
그 쫄쫄이 애호가의 비행거리가 1,339킬로미터다. 보스턴에서 출발하여 인디애나폴리스 서쪽 평야에 불시착했던 것.
파이어 팰컨……의 기록을 깨겠다고 도전한 후발주자들도 그 거리에 못 미쳐서 불시착을 하거나 사고사를 당하거나 하였으므로, 내가 입에 담은 천백 킬로미터의 집단비행은 위험도가 매우 높은 것이었다.
적어도 제3자가 보기엔 그렇겠지.
가까운 거리에 관측자가 없는 중고도 이상의 비행환경에서라면, 나는 내 마법적 역량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 날짐승과의 충돌이나 예기치 못한 강우 따윈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뜻. 부하들의 비행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에도 내가 바로잡아주면 그만이다. 이 모든 ‘응급조치’들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부분이 까다롭긴 하지만.
“성공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야. 자네를 민망하게 만들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게.”
차분하게 하는 말에, 주정뱅이 마피아는 시원하게 웃고서 보드카를 들이켰다. 두 번 꿀꺽이고 내려놓는 잔은 절반 가량이 비어있었다.
사무적인 대화는 음식이 나오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급사가 놓는 넓은 접시 위엔 불그스름한 갈색 양념에 졸인 닭 한 마리가 담겨져 있었다. 조리된 상태를 보니 졸이기 전에 한 번 구워낸 듯도 하다.
내가 포크와 나이프로 작은 조각을 썰어 입에 넣자, 벌써 닭다리 하나를 흡입하듯 먹어 치운 임마누일이 제 손가락을 빨며 내게 묻는다.
“어때? 입맛에 맞나?”
나는 천천히 씹어 삼키고서 대답했다.
“나쁘지 않군. 다소 인도 요리 같은 느낌이 들긴 하네만.”
인도식 마살라는 어느 음식에 들어가도 자기주장이 강렬하다. 하여 요리의 맛 자체는 괜찮았지만 탄자니아의 전통요리를 먹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근대 이후 영국령을 통해 흘러들어온 향신료가 이쪽 대륙의 식문화에 녹아든 게 아닐까 싶다.
좋은 식사는 부하들의 사기 유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국적인 풍미를 충분히 음미하며 식사를 이어가던 나는, 조금 떨어져있는 다른 테이블에서 신경 쓰이는 것을 발견했다.
‘……반지?’
해당 테이블에 앉아있는 일행 중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반지를 끼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하나 끼어있었다. 중심에 가문의 문장이 들어가 있고, 필요할 땐 봉랍(Seal)을 찍는 용도로 쓰는 것도 가능한 전통적인 형태의 인장반지(Signet ring)를.
무게를 달면 10돈은 나갈 두툼한 순금 인장반지는, 그 디자인과 문장의 구성요소가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흐음?”
맞은편의 주정뱅이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내 시선을 슬쩍 따라가 보더니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었다.
“뭐야, 저쪽 테이블의 아가씨에게 관심이 있어?”
아무래도 내가 같은 테이블에 동석한 다른 사람을 훔쳐본다고 착각한 모양. 나는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닐세.”
“아니긴. 부끄러워할 필요 없네. 자네도 사내는 사내였구만. 저런 여자가 취향이었나?”
“아니라니까.”
“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대두. 저 아가씨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나한테만 좀 알려줘.”
“그만하지?”
“싫은데?”
“…….”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신기해서 그래, 신기해서. 온갖 미인을 골라 한 트럭을 쏟아놔도 시큰둥하던 자네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게. 어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라도 붙여 보고 올 텐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말 많은 주정뱅이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며 조용한 관찰을 이어갔다.
청각을 조율하고 흡음결계로 다른 방향의 소음을 차단하자, 해당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가 보다 선명하게 귀에 들어온다. 사용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 비록 내가 배워놓은 언어는 아닐지나, 스페인어와의 공통분모가 많아 듬성듬성 알아듣는 정도는 가능했다.
사내를 포함하여, 같은 테이블에 앉은 자들은 통일된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전투복의 우측 어깨엔 몰타식 십자가(Maltese Cross)와 트레플리 십자가(Trefly Cross)가 서로 다른 각도로 포개어진 문양이 박혀있다. 이는 인장반지와는 다른 의미로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불완전한 엿듣기와 문양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여, 나는 인장반지를 낀 사내의 일행이 어느 단체에 속해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저것들,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 소속이로군.’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OSML)은 명목상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에 충성하는 기사들의 조직이자 명예 서훈체계이며,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근대의 기사단들 가운데 하나다. 이탈리아가 공화국으로 바뀐 이후로는 왕국을 추억하는 수구세력들과 몰락한 옛 왕가의 친목모임 비슷한 단체로 전락했었던 곳.
그렇다고는 해도 가진바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이 기사단엔 극우 비밀결사 「프로파간다 두에」의 간부 및 후원자들이 포진해있고, 이탈리아 총리직을 세 번이나 해먹은 베를루스코니가 프로파간다 두에의 핵심회원이었으니까.
꼴을 보아하니, 마법의 시대를 맞이한 OSML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합법적인 무장단체로의 변모를 꾀한 모양이다. 21세기에 문자 그대로의 ‘기사단’을 부활시킨 셈. 짐작컨대, 개별 구성원들의 젊은 후계자들을 전투조직의 지휘관으로 삼고, 민간 헌터들을 끌어들여 머릿수를 채우는 식이 아니었을는지.
저편에서 오가는 대화는 그들의 그랜드 마스터‘들’에 대한 것이었다. 서로가 자신이야말로 적법한 사보이의 대공이라 주장하며 기사단의 수장 자리(Gran magistero)를 두고 다투는 중인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 둘이 아직도 싸우고 있었나?’
한쪽은 나폴리 공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다른 한쪽은 그의 아들이자 베네치아와 피에몬테의 공작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이들 부자의 권력싸움은 딱히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그에 관한 내 앎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갱신되지 않은 채로 멈추어있었다. 프로파간다 두에가 마피아와도 연관이 있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이라곤 하나, 실질적으로 얽힐 일이 없었으니까.
“파블릭.”
내 부름에 옆 테이블의 경태가 고개를 돌린다.
“저기 저 이탈리아 연놈들에 대해 한번 조사해봐라. 특히 황금으로 된 인장반지를 끼고 있는 놈에 대해서.”
“직접 접촉하는 것도 허용됩니까?”
“필요하다면 해. 모든 것을 네 재량에 맡긴다. 단,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되면 그 즉시 작업을 중단하도록.”
“옙.”
“먹던 건 다 먹고. 어차피 저것들이 금방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이름은 가명으로 불렀으되 지시는 한국어로 내렸으므로, 나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피아 간부의 오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설마 아랫사람을 시켜서 말을 걸어보려는 거야? 아름다우신 레이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임마누일.
“이봐, 바딕……. 그건 지나치게 고전적이잖아. 좀 더 용기를 내보라구. 자네 액면가는 그래도 되는 액면가란 말이야.”
이 새끼는 그만 좀 닥쳐주었으면 좋겠는데. 내심 고개를 저으며, 나는 귀를 이탈리아 기사들에게로 열어놓은 채 잠시 소홀했던 식사를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