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검은 대륙의 러시아인 (9)
5월 22일 토요일은 스텔라 포르투나가 다르에스살람 내항에 정박한 첫 번째 날이었다.
외교부 사무관 윤혜원의 제안을 거부한 탓에, 무장여객선 선단을 포함한 각종 장비들의 운용비용은 전적으로 우리 조직의 부담이 되었다.
“와, 세상에.”
경태가 감탄했다.
“입항료도 장난이 아니긴 했는데, 정박료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네요. 진짜 미친 것 같은데요?”
말은 정박료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기본 정박료에 무장여객선에만 부과되는 특수 환경보호분담금을 합산한 것이었다. 환경보호분담금 요율 책정은 무장여객선 자체의 체급, 여객선이 탑재한 장비들의 종류와 수량, 여객선에 탑승한 각성능력자 헌터들의 수, 해당 여객선이 사용하는 엔진 및 추진기관의 종류 등을 종합하여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책정된 12시간 정박료는 총톤수(GRT) 1톤당 1,350 탄자니아 실링. 스텔라 포르투나의 GRT가 2만 7천 톤이니, 하루를 정박하려면 7,290만 탄자니아 실링을 지불해야 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매일같이 3만 달러 상당의 돈이 빠져나간다는 뜻이었다.
함께 정박한 다른 배들의 몫까지 더하면 일일 정박비용은 10만 달러 이상으로 치솟는다. 일부 선박들이 바깥에서 활동 중인데도 이러했다.
이 정박료는 나갈 때 한꺼번에 정산해도 무방한 것이건만, 항만관리국의 공무원들은 12시간 단위로 정산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시로 찾아와 임검을 하겠다고 귀찮게 구는 것은 덤.
미신고 인원과 장비가 있지는 않은가 확인해보겠다는 게 표면적인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매번 이렇게 시간 빼앗기기 싫으면 적당히 뇌물 좀 내놓으라고 은근히 찔러대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뒷돈을 받아 챙긴 공무원들은 희희낙락하며 자신들의 배를 타고 돌아갔다. 뱃전에 기대어 선 나는,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액수만 놓고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돈 아니냐.”
정박료라는 딱지가 붙어서 많아 보일 뿐이지.
솨아아아-
강물과 해수가 섞이는 만 안쪽의 바람이 파도와 함께 문명의 악취를 몰아왔다. 거대한 도시의 생활하수가 최소한의 정화조차 거치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바다. 이런 바다의 냄새가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것도 영국 놈들이 망쳐놓은 것 아니었나?’
이 나라의 수자원과 상하수도를 독점한 회사가 영국과 독일의 합자회사이고, 최고경영자는 분명 영국 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해당 계약이 단독입찰로 끝나게끔 조율했던 브로커가 누구였더라?
「옥수수 사세요, 옥수수! 발화능력으로 즉석에서 구워드리는 옥수수가 한 개에 1달러!」
누군가가 확성기에 대고 투박한 발음의 영어로 외치는 소리. 시선을 돌려보니, 보이는 것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헌터들의 선단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누비는 인력 보트 하나.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각성능력자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 스크류를 돌리는 가운데, 목에 팻말을 건 탑승자들이 부유한 헌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군옥수수 한 개가 1달러, 핸드폰 충전도 1달러! 휴대용 배터리 충전은 5천 암페어당 1달러! 마사이식 머리 땋기도 단돈 1달러에 해드립니다! 최고로 강하고 멋있는 사냥꾼 여러분! 저희 『움직이는 셰리던 1달러 샵』을 이용해주세요!」
이런 보트는 한 척이 아니었다. 본래는 방역을 위해서라도 현지 경찰이 단속을 해야 할 불법영업이었으나, 경찰들은 인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뇌물을 받은 건지 모습을 드러낼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바로 코앞의 선착장에 수상 경찰의 사무소와 부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두에 매인 순찰정들은 탑승자 하나 없이 탁한 물결에 흔들리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힘 좋은 각성능력자 잡일꾼이 필요하신 분들은 여기 적힌 번호로 연락 주세요! 오십 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한나절에 백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는 성실한 잡역부들이 여러분들의 부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슬레이움 알리 인력사무소』는 다르에스살람에서 가장 낮은 수수료를 자랑하는 각성능력자 인력알선 업체입니다!」
「여러분! 초원과 산지에서 길을 알려줄 안내인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프와니 지역의 각성체 분포 정보를 숙지하고 있는 뛰어난 패스파인더입니다! 원하신다면 관광 가이드를 해드릴 수도 있어요!」
「맥주 사세요, 맥주!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가 종류를 불문하고 한 병에 3달러! 코코넛 주스와 망고 주스, 오렌지 주스도 있습니다! 전부 오늘 갓 짜낸 생과일 주스입니다!」
경태는 맥주라는 소리에 반응했다.
“오, 맥주?”
개처럼 귀를 쫑긋거린 녀석이 뱃전으로 몸을 내밀고는 냉장고를 실은 보트를 불러들인다. “여기까지 와서 이 동네 맥주 맛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라고 즐겁게 중얼거리며.
상하로 기다란 가정용 냉장고를 비스듬히 올려놓은 작은 보트는, 불균형한 무게중심으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다가왔다. 냉장고와 연결된 배터리에 전기를 공급하는 건 홀쭉하게 마른 중년의 각성능력자였다. 생김새를 보건대 호객을 하며 페달을 밟는 청년과는 부자관계로 보인다.
“거 맥주가 뭐뭐 있습니까?”
경태의 질문에, 페달 밟기를 멈춘 청년이 대답 대신 냉장고 문을 열어 보인다. 킬리만자로 프리미엄 라거, 응보두 스페셜 몰트, 세렝게티 더 킥, 비아 빙와 등등. 내 입장에선 온통 생소한 라벨들뿐. 그러나 경태는 그 모두를 알고 있는지 매우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요구했다.
“가진 거 다 내놓고 가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드릴게.”
“예?”
“뒤쪽은 농담이고 앞쪽은 진담입니다. 오늘치 맥주 장사는 여기서 끝내세요. 내가 몽땅 사드릴 테니. 하하!”
이어 경태는 내게 맥주 파는 부자의 질병감염여부를 확인하고는, 전방갑판 화물 크레인 쪽으로 보트를 유도하여 냉장고를 통째로 달아 끌어올렸다. 냉장고에 걸터앉아 갑판으로 올라온 흑인 청년은, 백 달러 지폐 넉 장을 받고는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백 달러짜리 고액권 자체가 낯설어서. 낯설음을 극복한 다음엔 거스름돈이 모자라서.
경태는 경쾌한 어조로 대안을 제시했다.
“까짓 거 잔돈은 과일 주스로 받죠. 잔돈에 맞게 알아서 꺼내놓고 가십쇼.”
맥주팔이 청년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선생님께선 정말로 좋은 분이시군요!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축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Hongo akusimike!”
……?
청년이 마지막에 덧붙인 현지어엔 내 주의를 끄는 단어가 섞여있었다. 경태 녀석도 이를 놓치지 않았으므로, 맥주팔이 청년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경태를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술꾼에서 인간사냥꾼으로 탈바꿈한 경태가 온화한 어조로 묻는다.
“방금 마지막에 하신 말씀, 무슨 뜻입니까? 홍고 어쩌고 하신 거 말입니다.”
“홍고 아쿠시미케…….”
“그래요. 그거.”
“오,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 욕설 같은 건 아니었어요. 요즘 유행하는 인사 같은 거예요. 행운을 빌어주는 거죠.”
청년은 더듬거리며 뜻을 설명했다. 「뱀이 당신을 축복하기를」이라는 의미라고.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태는 부드러운 심문을 이어갔고, 나는 이내 주술사 왕에 대한 믿음이 이 항구도시에까지 퍼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깊이는 얕지만 착실하게 번져나가는 침식.
청년은 언젠가 주술사 왕이 음지니 크와 음팔메- 이른바 「왕의 도시」를 세우고 이 땅의 모든 국경을 허물어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리라는 소문이 돈다고 증언했다. 주로 도시의 빈민층들 사이에서.
맥주팔이 청년이 아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청년을 도로 내려보낸 후, 경태는 부하들을 시켜 갑판에 널린 맥주를 안으로 들여가도록 했다.
“왜 지금 마시지 않고?”
내 물음에 눈을 꿈벅이는 경태.
“지금은 일하는 중이잖습니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사람 하나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을.”
“그래도요. 지금은 주스나 마셔야죠. 형님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나는 됐다.”
권유를 사양하며, 나는 해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현재 스텔라 포르투나가 정박한 위치는 도시 안으로 파고드는 만의 북쪽, 두 개의 페리 선착장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이었다. 러시아인과 만나기로 한 호텔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
고등법원과 대법원 사이에 끼어있는 대형 호텔은 이 가난한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비록 관광객들의 발길은 끊어졌지만, 무기를 휴대한 투숙객들이 관광객들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것. 사하라 이남의 어지러운 정세가 숙박업계엔 호재로 작용한 셈이다.
비록 온갖 국적의 무장인원들로 가득한 건물이긴 하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고위험 수렵 관계자 전용 숙소로 지정한 호텔답게 정규군의 전차와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고, 「국제 고위험 수렵협회」인지 뭔지도 임시본부를 두고 있는 곳이라 위험도 자체는 높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내 선단의 탑재화기들로 초토화시키는 것도 가능한 위치. 미리 보내놓은 부하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이보다 나은 장소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약속장소가 이곳으로 정해진 이유는 단 하나. 임마누일이 부린 똥고집 때문이었다.
「아 거기 음식이 맛있다고! 내가 전에 가봐서 안다니까? 친구한테 밥 한 끼 얻어먹기 참 어렵구만! 사줘!」
막무가내로 우겨대던 목소리를 떠올리니 한숨이 기어 올라온다. 나는 사고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주술사 왕의 소재나 조기에 파악할 수 있다면 좋겠군.’
내가 주술사 왕을 찾으려는 건 공능법인의 업무수행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달콤한 미끼에 꼬일 섬나라 연놈들을 사고사로 처리해주기 위해서이지.
예전에 수연이 조언했던 바, 섬나라 출신 헌터들을 죽이고 또 죽이면 그 공백을 메울 전력은 원탁으로부터 빌리는 수밖에 없다. 영국 정부에 대한 원탁의 발언권이 강해진다는 부작용은 있을지라도, 본거지의 방비가 취약해지는 것만으로도 득이 더 크다고 봐야지. 분산된 전력을 사냥할 기회가 생기는 것은 덤이고.
설마하니 영국 정부가 마법이 도래한 시대의 패권경쟁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터.
콰아아아-!
요란한 발화의 소음이 귓가를 어지럽힌다. 소음의 근원은 현지인들이 루카 텍시(Ruka Teksi) 내지 루카 루카(Ruka ruka)라고 부른다는 인력로켓 택시였다. 생김새도 천차만별이고, 운전자의 능력과 구조적 완성도에 따라 비행능력 역시 천차만별인 고철덩어리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고철덩어리, 파도치는 만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비행 택시의 후방 좌석엔 커다란 덩치의 러시아 마피아가 타고 있었다.
한 손에 힙 플라스크를 든 임마누일은 회전목마에 탄 어린애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시원하게 웃으며 내지르는 소리가 압축 분사되는 발화의 소음을 뚫고 들려온다.
“Это чертовски хорошо!(이거 진짜 끝내주는군!)”
두 명의 발화능력자 운전수는 진땀을 흘리고 있다. 자신들보다 수준이 높은 각성능력자 승객을 태우는 바람에 본인들의 마력장이 위축되었기 때문. 오르락내리락 느리고 위태로운 비행을 이어가는 루카 텍시는 언제 전복되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추락하여 더러운 물에 빠질 위험도 스릴이라면 스릴이라 하겠다.
나란히 지켜보던 경태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가 옛날엔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니었지. 손자 손녀를 보고 나서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을 뿐. 웃음이 헤퍼지고, 수시로 저렇게 얼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나이 오십을 갓 넘기고서부터 다 늙은 노인네 행세를 하며 은퇴 은퇴 노래를 불러대는 등.
루카 텍시가 향하는 방향엔 이 항구의 등대가 서있었고, 그 등대 근처 버스터미널 전면의 도로엔 반팔 차림으로 방탄복을 껴입은 무장인원 일곱이 사륜구동 차량 두 대를 세워놓은 채 대기 중이었다. 숨겨진 문신만 봐도 브라츠키 크루그에 속한 자들. 그것도 제법 고참에 해당하는 정예들이다.
이 무장인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각성자가 아닌 하나는 내가 일찍이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임마누일의 아들 그리고리는 하늘을 날아오는 아버지를 피곤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