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51화 (251/561)

#30. 검은 대륙의 러시아인 (5)

내가 잠깐 동안 말이 없자, 수화기 너머에서 놀리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놀랐나? 놀랐지? 놀랐군!」

이어 들리는 것은 꼴깍꼴깍 술 넘어가는 소리.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 입을 열었다.

“의뢰인이 대통령이고, 또 그 대통령을 소개해주는 것의 대가라면…… 반군거점 타격이라는 게 자네 말처럼 쉬운 의뢰는 아닐 거란 예감이 드네만.”

「에이, 그건 아니야.」

“그러면?”

「대통령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일 자체는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을 정도일걸? 그 반군집단이 기본적인 무장은커녕 조직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하더라고. 큰 틀에서 방향성이 일치하는 여러 인사들이, 누구를 지도자로 추대해야 할지, 기존에 있던 다른 반군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면 좋을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각각 세력을 모으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르완다 정부군이 겨우 그 정도 조무래기들을 감당 못해서 외부용병을 고용하려 든다고? 그것도 양지가 아닌 음지의 용병들을? 그게 말이 되나?”

「말이 되지. 왜냐면 그들을 반군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시점에서는 대통령 한 사람뿐이거든! 어때? 갑자기 흥미가 마구 샘솟지?」

수화기 저편으로부터 술 냄새 섞인 구취가 넘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되물었다.

“……요컨대, 그가 바라는 건 일종의 예방전쟁이다?”

「바로 그거야!」

“음…….”

「대통령은 내전이 터지는 것 자체는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보고 있어. 그러니 불이 나기 전에 미리 주변지역의 나무들을 베어두고 싶어 하는 거야. 비록 지금은 뚜렷한 구심점도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을지라도, 그 모두가 후투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으니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면 뭉쳐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후투족이라고? 또?”

「그래, 후투. 그중에서도 극단주의 분파에 속하는 자들. 그들을 제외하면 그 나라에 달리 무슨 불안요소가 있겠어.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얻으면 온건한 자들도 일부 휩쓸릴 것이고. 그 결과는 뻥-! 다시 한 번 거대한 살육의 시대가 열리는 거지.」

“원죄가 깊군. 그들이나 대통령이나.”

「누가 아니래? 나야 뭐, 돈이 되는 파트너 편을 들어주면 그만이지만.」

나는 내가 르완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곱씹어보았다.

‘그쪽도 매미 유충들이 바글거리는 동네이긴 하지.’

벨기에 식민통치의 산물인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은 단 한 순간도 마침표를 찍은 적이 없다. 바깥세상은 르완다 내전을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후투족에 대한 투치족의 보복학살은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이후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왔다. 그저 그 무대가 르완다에서 이웃 국가인 콩고로 바뀌었을 따름.

르완다의 현 대통령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웃 국가로 달아난 수백만의 후투족 극우세력들이, 손닿지 않는 땅에서 군벌을 조직한 채 호시탐탐 조국 탈환의 기회만 엿보는 상황이었으니까. 남의 내전에 끼어들거나 국경 너머의 동족을 무장시켜서라도 ‘전범종족’의 지속적인 파괴를 꾀하는 수밖에.

그리하여, 콩고 전쟁에 개입한 르완다의 주도 하에, 콩고 땅에선 합계 백만이 넘는 후투족 민간인들이 몰살을 당했다.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학살.

그 학살이 남긴 잔열은 매미들을 부화시키기에 충분한 뜨거움일 것이다.

임마누일이 이야기했다.

「대통령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 이거야. 자국 내 후투족 극우세력도 일단은 자기가 지켜야 할 르완다의 국민이라는 점. 후투와 투치의 갈등을 표면적으로나마 봉합한 게 본인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치적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렇게 따지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군대를 움직이긴 어렵겠군.”

「응, 그런 셈이야. 게다가 지금은 평화유지군 딱지를 붙인 강대국 군대들이 지척에서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구국의 결단’을 내리기가 더욱 어려울 수밖에. 대통령 입장에선 특히 프랑스군이 신경 쓰이겠지. 프랑스와 사이가 많이 안 좋은 사람이니까. 콩고 전쟁 개입 건으로 미국이나 영국하고도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있고.」

사정이 그렇다면 용병을 쓰려는 이유는 설명이 된다. 브라츠키 크루그가 대통령에게 저당 잡혔다는 이권은 언제까지고 비밀유지를 위한 자물쇠 역할을 수행할 터였다.

“이봐, 모냐.”

「응?」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무슨 수로 일국의 대통령씩이나 되는 인물과 안면을 트게 된 건가?”

「그걸 맨입으로 알려달라고?」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게. 꼭 알아야 할 사항도 아닌 것을.”

「크핫!」

임마누일은 웃음을 얹어 대답했다.

「자세히 말해주기는 좀 그렇고, 르완다 애국전선(RPF)이랑 오랫동안 거래를 하다 보니 조금씩 만날 일이 생기더라고. 그 사람이 뛰어난 지도자이긴 해도, 딴 주머니 차는 건 여느 독재자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차이가 있다면 경제를 아주 잘 살렸다는 것뿐.」

“알 만하군.”

「아무튼, 의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대통령 본인에게 들어야 할 거야. 군사작전은 기밀유지가 생명이랍시고 나한테도 세부적인 부분까지 알려주진 않았거든. 그 왜, 그 사람이 원래 군인 출신이잖은가. 내전을 승리로 이끈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 부분에 다소 까다로운 편이야.」

어쩌면 아직은 구체적인 작전계획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렇다고 봐야겠지. 계획이라는 건 손 안의 패가 확실해진 다음에 세워야 바람직한 것이니. 이쪽이 쓸 만한 전력인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고.

“그가 내 애들을 문자 그대로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가능성은 없나?”

「내가 이권을 인질로 잡혔다는 식으로 표현하긴 했네만, 그거 사실 “나 망하면 너희도 손해가 클 테니 알아서 좀 도와줘라.”를 자존심 지켜가면서 말한 거라네. 이 역시 자세한 건 사업상의 비밀이지만,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안전장치가 있다고 알아두면 돼. 솔직히 경제력만 놓고 비교하면 우리가 르완다라는 나라보다 덩치가 더 크잖아?」

임마누일의 말은 범죄자의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브라츠키 크루그 연합의 맹주, 연합 속의 또 다른 연합, 「솔른쳅스카야 OPG(Со́лнцевская ОПГ)」 하나만 봐도 수백 개의 은행과 기업과 광산과 카지노들을 굴리며 매해 백억 달러 안팎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되니까. 비합법적인 영역의 이익을 더하면 얼마가 될지 감을 잡기조차 어렵다.

“그래도 내 입장에선 담보가 필요한데. 자네들이 날 위해 그 안전장치를 써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보나마나 손해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쓰지 못할 장치일 테니.”

「내 목숨을 맡긴다면 어때? 뭣하면 내 아들내미도 같이.」

“그 정도면 충분하지.”

「협상 성립이군! 잘 부탁하네, 친구.」

“나야말로.”

「자, 그럼 인질 겸 중개인인 나는 언제 합류하는 게 좋을까? 대통령은 늦어도 이달 내로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고 했네만. 자네 회사의 타격대가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겠나? 그래도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소개해주는 자리이니 자네가 직접 와서 구색을 맞춰주면 고맙겠어.」

이달 내로 행동을 착수해야 한다, 라…….

5월 셋째 주 월요일에 탄자니아 땅을 밟을 예정이니 날짜상으로는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한국 정부에 고용된 공능법인 행세를 소홀히 해선 곤란하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타임 테이블을 그려보고서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시간은 빠듯하게 맞출 수 있을 듯해. 그때 가서 추가로 연락을 넣지. 늦어도 닷새 전까지는.”

「이거 오랜만에 자네를 보게 생겼구만. 아주 즐거운 휴가가 될 것 같아.」

“휴가라니?”

「자네가 나를 먹이고 재워주는 동안 내 본래 업무는 다른 놈들이 맡아줘야 할 텐데, 이게 휴가가 아니면 뭔가? 업무상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잡혀있는 것이니 내 전우들이 대놓고 불평하진 못할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인질을 자청했나?”

「공식적인 답변은 “아니오!”일세. 보드카나 많이 준비해놓으시게. 미인은 이쪽에서 준비해가도록 하지. 자네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VIP(осётр) 접대용 애기들한테도 출장 허가가 나올 거야. 자네 같은 목석조차 녹여버릴 만큼 화끈한 애들을 데리고 갈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하하하!」

“초를 쳐서 미안하지만, 일 관련이 아니고선 자네와 어울려줄 시간이 없을 걸세.”

「아 왜! 그러지 말고 좀 놀아줘! 설욕할 기회는 줘야 할 게 아닌가!」

“설욕할 기회라니?”

「자네 조직의 술 마시기 챔피언! “브라즈니크(술꾼)” 파블릭! 그 친구, 자네가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면 대작할 기회가 없지 않나! 내가 그 친구에게 거하게 지고 나서 내 간을 얼마나 갈고 닦아왔는데!」

파블릭은 경태가 쓰는 가명의 애칭이었다. 간이라는 게 단련한다고 강해지는 장기던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대꾸했다.

“헛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시간이 아깝군. 이만 끊겠네. 용무는 마쳤으니. 술은 좀 줄이도록 하고.”

「잠깐, 잠깐!」

“또 뭔가?”

「기왕 통화를 하게 된 김에 이쪽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말해봐.”

「미얀마.」

“…….”

「우리 자회사 하나가 그쪽으로부터 일감을 하나 물어왔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거야. 그 동네는 분명 자네 회사의 앞마당 같은 곳인데, 우리한테까지 큼지막한 건수가 돌아올 만큼 무기 주문이 밀려있는 상태라는 것이.」

“내 사정이 궁금한가?”

「그거는 아니고, 이것만 말해주게. 거기 뭔가 특별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건가? 자네 회사가 거래를 피해야 할 만한 무언가가 있느냐 이 말이야.」

“아니.”

「확실해? 나 엿 먹이는 거 아니지? 정보가 있으면 팔아달라구.」

“내가 자네를 엿 먹여서 뭐하나. 그냥 보다 수익성이 좋은 다른 일들이 많아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따름이지.”

「혹시 뭐, 그 쎄묘-포우파인가 하는 중국 의용군이나 미얀마 군부랑 거래를 하는 중인가? 그래서 신의를 지키는 거야? 양다리 걸쳤다가 들키면 따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거기까지 알려줄 의리는 없는 것 같군. 아니면 따로 대가를 치르겠나?”

「매정하기는. 그럼 이 일, 우리가 받아먹어도 되는 거지?」

“마음대로 하게.”

「좋았어! 간만에 양키들 돈으로 배를 불리게 생겼구만.」

“이제 정말로 끝인가?”

「아니. 또 있는데?」

“…….”

「이 일감에 관해 상담이 들어왔을 때 말이야, CIA 하청의 야한 냄새가 나는 어수룩한 브로커가 「이름 없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더래. 주 활동영역은 중국 광둥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트라이어드(삼합회) 산하의 조직은 또 아닌 듯하다고. 유효한 정보를 알려줄 때마다 가치를 평가해서 사례하겠다고. 아예 직접 소개를 해주면 소개비로만 백만 달러를 주겠다나?」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극동아시아에 이름 없는 회사가 자네 회사 말고 또 있는가? 우리가 자네 회사랑 거래하는 게 얼만데, 자네를 함부로 노출시킬 순 없지. 그것도 고작 백만 달러를 대가로.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처럼 사업 환경의 불안정성이 높을 땐 자네처럼 안정감 있게 자리를 지켜주는 오래된 파트너가 정말로 소중하다고. 나는 그저 한 배를 탄 입장에서 정보를 공유해주는 것뿐일세.」

“그거 고맙군.”

「고마우면 이번에 시간이나 내봐. 취하도록 마시는 것도 싫어하고, 질펀하게 박아대는 것도 싫어하고. 자네는 대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나?」

“인생이 꼭 재미있어야 하나?”

「맙소사.」

“CIA의 협력업체가 내 회사에 대해 얼마나 파악한 것 같던가?”

「그냥 아까 말한 게 다야. 어렴풋이 존재만 인지한 단계지. 걔들은 우리 브라츠키 크루그에 대해서도 실존 여부를 의심하잖아?」

“흠…….”

「신경 쓰이나?」

“기회가 닿는다면 나중에 소개를 부탁하지.”

「응? 괜찮겠나? 아직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잖아?」

“의도가 어떻든 상관없어. 어떤 의도로 접근하더라도 뒤를 밟히지 않고 이익을 챙길 준비를 할 테니까.”

내 준비엔 세 경독과의 업무협조가 포함될 것이다.

「대담하구만.」

“그럼 이제 정말로 끝인가?”

「어, 아마도?」

“……끝이면 끝이지, 아마도는 뭔가.”

「뭔가 빼놓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 느낌이 들어서. 술을 더 마시면 떠오를 것도 같은데.」

“끊겠네. 뭔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연락하도록 하게.”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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