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48화 (248/561)

#30. 검은 대륙의 러시아인 (2)

훈련이 종료된 후 본사로 복귀한 나는, 서로 다른 경로로 들어온 세 개의 보고를 접수했다.

첫 번째는 내가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노예시장의 소식이었다. 내 부탁을 받고 영국에서 온 노예상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마르띠네즈 제독이, 그 근방에서 새로운 이권을 탐색하던 러시아 마피아 연합 「브라츠키 크루그」의 간부와 선이 닿았다는 것이다.

제독이 전하기를, 자기가 넌지시 운을 띄워본 바, 그 간부는 여자들을 구하는 노예상인들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더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 간부는 나와 내 부하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임마누일 “볘르늬 모냐(진실한 모냐)” 크냐제비치 칼라쇼프. 브라츠키 크루그의 신사업 개척과 판로확보를 총괄하는 자.

그럭저럭 친분을 쌓아둔 인간이므로 접촉을 해보는 데 큰 부담은 없다.

나는 전화를 만지작대며 또 하나의 보고를 들었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가 우리 마카오 지사의 협조를 구하고 있다?”

“예.”

수연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 업무 일부를 대행한 비서실 소속 부하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자기들이 지금 위안화 현찰을 대량으로 구하는 중인데, 우리가 가진 위안화 진폐(眞幣)의 양이 충분하다면 자기네가 가진 달러와 맞교환을 해주겠다는 제안입니다. 자금세탁 및 달러 지급은 시저스 팰리스와 협력관계에 있는 15개 카지노가 담당하겠답니다.”

“교환 비율은?”

“만약 10억 위안 이상을 제공하는 게 가능할 경우, 거래시점의 환율에 3%의 수수료만 적용하겠다고 합니다. 단,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에 자기네 전문가들이 지폐를 감정하도록 해주는 조건입니다. 1억 위안 당 30인시(人時)의 검사시간을 보장해달라더군요.”

“혹시 단일창구로 들어온 요청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정킷을 통해 전달된 제안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긴 했으나, 대충 윤곽만 잡았을 뿐 우리가 정확히 누구인지, 또 어느 정도의 세력인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흠.”

나는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시저스 팰리스는 라스베이거스에 거점을 둔 마피아 거물들의 비밀스러운 사교클럽이자, 클럽의 창립자가 건설한 카지노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클럽의 창립자는 앨런 도프만.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면서, 전후엔 알 카포네의 「시카고 아웃핏」에 들어가 경험과 인맥을 쌓은 후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입지전적인 유대인이다.

비록 전설적인 창설자는 죽어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가 지은 카지노의 경영권 또한 도프만 가문의 손을 떠나가 버렸지만, 클럽에 모여 자신들의 전성기를 추억하길 즐기는 거물들- 이른바 「라스베이거스의 고참자들(Old timers)」은 양지화가 완료된 조직과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놈들이 냄새를 맡은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마카오의 4분의 1이 놈들의 자본으로 굴러가고 있으니, 우리가 지속적으로 세탁하는 위안화의 흐름을 흐릿하게나마 감지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

그러나 왜?

그들은 왜 위안화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수연이 의견을 제시했다.

“진정으로 위안화를 구하는 주체는, 라스베이거스의 고참자들이 아니라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금융기관들 및 연기금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이 가정이 옳다면 이는 위안화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의 징후라고 봐야겠지요. 거대한 준비과정의 작은 곁가지 하나가 우리에게 닿은 것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이런 데서 위안화를 구한다니,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간 우리가 세탁해온 자금의 규모를 대략적으로라도 어림이라도 잡았다면, 저들이 우리를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경제적 탈출구 즈음으로 오인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엄청난 압력으로 돈이 쏟아져 나올 구멍으로 말입니다.”

“…….”

지금 공산귀족들의 자산도피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높아진 상태이긴 하다. 그들의 애국심이란 보신주의와 이기주의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수연은 남은 말들을 차분하게 이어갔다.

“설령 기대가 빗나가더라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모래알 하나만큼의 힘까지 긁어모으는 단계에서는 암흑가에 흐르는 자금에도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를 통해 내륙에 갇힌 흑해자당의 자금이 흘러나올지 모른다는 기대 또한 있을 것이고요.”

흑해자당의 자금은 이 순간에도 다양한 경로로 유출되고 있을 터이나, 그럼에도 고여 있는 돈의 규모가 워낙에 크고, 이를 차단하려는 공산당의 노력 또한 만만치 않으니, 위안화가 새어나올 구멍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시저스 팰리스의 제안엔, 우리에게 주는 달러가 중국의 외환보유고에 더해질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는 확신이 깔려있을 터.

“흑해자당의 전성기에 해외로 유출된 자금의 규모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파악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흑해자당을 지원하며 그 자금들의 대부분을 가져간 건 분명 서구세계의, 특히 미국의 첩보기관들일 것이고요.”

그렇겠지.

“통계에 잡힌 바 없는 그 막대한 자금이 지금껏 시장에 풀리지 않고 암중의 비수처럼 축적되어있는 상태라면…… 라스베이거스의 고참자들에게 의뢰를 넣은 금융기관들 역시 그저 정부의 계획을 거들고 있을 따름인 것이겠지요.”

침착하게 의견 개진을 마친 수연이 어떻습니까? 라고 묻는 듣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 손해를 볼 건 없어 보이는구나.”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김재환이에게 귀띔을 해놓고……. 미주에게도 언질을 해놔야겠군. 경독들 중 하나에게 정보를 먹여줘야지.”

수연은 무언으로 내 판단에 동의했다.

운이 좋군. 가만히 있어도 던져줄 먹이가 굴러들어오다니.

“아까 보고할 게 셋이라 했었는데, 마지막 하나는 뭐냐?”

내 물음에, 이번엔 다른 부하가 대답한다.

“다이아몬드 카지노의 경영진 교체가 완료되었다는 보고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충성파 간부들이 모두 태도를 바꾸거나 직위를 상실했고, 일부는 도로 위에 목이 매달렸다는군요. 살아남은 추장대행의 파벌은 현재 멕시코 방면 사업장으로 피신한 상태지만, 오늘자로 추장대행 마샤트의 이름이 FBI 수배명단에 올라갔으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드디어.

참 오래도 버텼다. 기침을 콜록거리며 내게 호의를 구걸할 때만 해도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처럼 보였건만, 대체 얼마의 저력을 발휘하였기에 오늘에 이르러서야 권좌를 상실한 것인지. 시련을 성장의 계기로 삼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

어쨌든 이제라도 무너졌으니 다행이라 할 일이다. 원주민들을 테러의 기수로 바꾸어놓는 데 쓸 시간이 조금 빠듯해진 감은 있으되, 거시적인 계획을 망칠 정도의 변수가 생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교육수준이 높고 성향이 온건한 마샤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대를 내려가 줄 필요가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못 배우고 핍박받은 자들의 증오를 입맛대로 부추겨주기만 하면, 지쳐있는 마샤트는 그 맹목적인 분노의 격류를 감당하지 못할 테니.

지금도 마샤트를 향한 추종자들의 마음이 그리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을 모든 것을 잃는 길로 이끌어버린 지도자가 아닌가. 대신할 사람을 슬그머니 밀어주는 것만으로도 추장대행의 궁극적인 실각을 이끌어낼 수 있을 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보고한 부하가 슬그머니 묻는다.

“다이아몬드 카지노에 예치해놓은 자금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건 그대로 둬. 당장 유동자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예.”

마샤트는 부족의 일각이 저를 배신하는 와중에도 부족의 미래를 걱정했었지. 제발 카지노와의 거래를 끊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의지 하나쯤 존중해주는 건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비슷하게 몇 번을 더 그어도 부담이 되지 않을 자기만족의 선.

옛 추장과 추장대행의 유산에 기대어, 배신자들은 앞으로도 부족의 생명줄을 경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샤트에게 걸린 현상금이 얼마냐?”

“5백만 달러입니다.”

“많기도 하군. 마르띠네즈 제독에게 연락해라. 마샤트를 포함하여, 국경을 넘어온 사막의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수용하게 해달라고. 대가는 1년치의 「바닥의 권리」로 갈음하겠노라고.”

“1년치면 현상금에 비해 지나치게 액수가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상관없어. 거스름돈은 그쪽 배불뚝이의 선거자금에 보태라고 전하도록.”

“아, 그게 있었군요.”

배불뚝이 페루쵸의 임기는 앞으로 4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모임인 「후앙의 군대」가 점점 세력을 불린 끝에 할리스코와 나야리트 두 개 주에 세력을 투사하는 자경단 겸 예비정당으로 성장했으므로, 당의 중심인물인 페루쵸는 충분히 주지사 자리나 그 이상을 노려볼 깜냥이 되었다.

멕시코의 기름이 부족하지만 않다면 성공을 거둘 테지.

‘그 자신이 후앙을 대체하고 있기도 하고.’

과거의 페루쵸가 후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행운아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페루쵸는 그 자신의 존재만으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는 정치인이었다.

이는 물론 마르띠네즈 제독의 후원이라는 또 다른 행운을 얻은 덕분이긴 하지만, 이쯤 되었으면 운도 실력이라고 봐줘야 한다.

여하간, 후앙의 군대는 이제 더는 후앙을 추모하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게 되었다. 내 위장신분의 실종은 그저 후앙의 군대가 창설된 계기쯤으로 기억될 따름.

나로서도 제법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공연한 시간낭비-또는 인력과 자원낭비-의 가능성이 줄어들었으니.

“그럼 이제 보고는 끝인가?”

“예.”

“알았다. 다들 가서 일 보도록.”

내 말에 경태와 수연을 제외한 나머지 비서진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나는 아까부터 만지작대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암기해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신호가 몇 번 울리는가 싶더니,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활기찬 어조의 러시아어로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언제나 고객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행사 『마그놀리야 골라야(Магнолия голая)』입니다. 어떤 일을 도와드릴까요?」

“여행과 관련해서 가이드 상담을 예약하고 싶소만.”

가이드는 보통 기트(Гид)라 부르지만, 나는 굳이 바자크(Вожак)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안내자라는 뜻과 지도자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단어.

수화기 저편의 상담원은 동일하게 바자크라는 표현으로 말을 받았다.

「가이드 상담이라면, 특별히 찾는 분이 있으신가요?」

“그렇소. 이고르 콘스탄티노비치 카잔체프라는 분이오. 처음 만났을 때 서른셋이라 했으니, 지금은 서른여섯쯤 되셨겠군.”

이고르 콘스탄티노비치 카잔체프는 임마누일 크냐제비치 칼라쇼프와 이니셜이 동일하다. 여기에 33-36의 식별코드가 붙으면, И, К, К의 이니셜을 공유하는 모든 이름은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임마누일 칼라쇼프를 가리키게 되어있었다.

「아, 확인했습니다.」

상담원이 안도하는 느낌으로 대답한다.

「실례지만 누구라고 전해드리면 좋을까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께했던 바딤(Вадим)이라 전해주시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딤 님이시로군요. 원하시는 통화 시간이 따로 있으신지요?」

“언제라도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 빨랐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연락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되는 대기시간은 다섯 시간 이내입니다. 달리 필요하신 것이나 궁금하신 사항은 없으십니까?」

“없소.”

「그럼 저는 여기서 상담을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고객님.」

통화를 종료한 나는 경태와 수연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지. 연락이 금방 오진 않을 테니.”

지금쯤 구내식당에선 메시아와의 만찬을 약속받은 위구르인들이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