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46화 (246/561)

#29. 식량반입명령 (14)

수연은 내려놓은 눈길을 그대로 둔 채 무언가를 생각하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스로의 말처럼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상상은 잘 안 가지만, 이 비인간적인 녀석에게도 어리고 여리던 시절이 있었겠지. 내 앞에 무릎 꿇던 시점의 품성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완성되어 있지야 않았을 테니.

조직의 비서실장이자 기조실장으로서, 강수연이라는 인간은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 인적자산이다. 내가 남은 평생에 이런 수준의 자산을 다시 획득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싶어질 만큼 희소성이 높은.

그러므로 이 녀석이 오래도록 품고 있는 상처라면, 그게 객관적으로 아무리 가벼운 갈등이었어도 나까지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잠시 후, 수연이 눈을 들어 경태 쪽을 돌아보았다. 신경이 쓰이는 건가? 눈길을 받은 경태는 짧은 시간 눈치를 살핀 끝에 조금 풀이 죽어서 입을 열었다.

“어, 저는 귀를 막고 있을까요? 저도 듣고 싶은데 말입니다…….”

“귀를 막는다고 안 들릴 청력이니?”

“고막을 파내버리면 되죠, 뭐. 새끼손가락으로 요렇게 요렇게. 아니면 귓구멍 안쪽을 구워버리거나. 어차피 이 김경태에겐 형님의 가호가 함께하니까요.”

“네가 미쳤구나.”

“제가 좀 미친 듯이 쿨한 남자이긴 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다른 차로 옮겨가는 수도 있습니다. 눈물이 날 만큼 괴롭겠지만, 이 사나이 김경태, 누님께서 바라신다면 그 정도 소외감쯤은 기꺼이 견뎌내 보이겠습니다. 아니지. 형님께서 방음결계를 치시는 쪽이 더 빠르겠구나.”

한심해하는 눈으로 경태를 응시하던 수연은, 드문 한숨을 내쉬고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다시금 못을 박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감추고 싶은 개인사라면 억지로 꺼내놓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대단치 않은 일이니까요. 결계도 필요 없습니다.”

이 뒤로 차분하게 이어지는 수연의 이야기는 죽은 오라비가 얽혀있는 학생 시절의 한이었다. 부모 없는 가정의 비범한 아이였던 수연을 음습하게 괴롭히던 자칭 친구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보다 성숙해진 악성을 발휘하여 마침내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려버린 이야기.

“그날은 공휴일이었고, 제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수연은 담담한 어조로 갓 중학생이 되었던 해의 가을을 회고했다.

“주중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하던 오빠였지만, 그날만큼은 오후에 시간을 내어 에버랜드에 가기로 약속했었죠. 제가 평소 오빠와 함께 정말로 가고 싶어 했던.”

수혁과 수연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였다. 수혁이 말하기를, 수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무렵부터 자신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노라 했었지.

“집으로 돌아와 출발하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저와 오빠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되어서도 수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근심 속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었을 게 뻔한 수혁을 보채는 것처럼 보이기가 싫어, 수연은 터미널 곳곳을 기웃거리며 30분을 더 기다린 끝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네게는 휴대전화가 없었던 모양이지?”

“예.”

“그렇게까지 형편이 어려웠나?”

이 녀석이 어렸을 때는 휴대전화가 지금보다 덜 보편적이었을 시절이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강수혁이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하나뿐인 가족에게 연락수단을 마련해주었을 게 분명했다. 피처 폰의 전성기에도 낡은 단말기들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중고로 거래되었으니, 실질적으로는 통신료 정도만 부담하면 그만이었을 터.

수연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때마침 압수를 당했던 터라.”

“압수? 누구에게?”

“학교 선생에게, 입니다.”

“왜?”

“명목상의 이유는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썼나?”

“아니요.”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윤혜원을 포함해 세 사람이 입을 맞춰 거짓을 말하자, 그렇잖아도 수연을 싫어하던 선생은 수연에게 공개적인 체벌을 준 다음 핸드폰을 빼앗아갔다고 했다. 일주일간 압수라고 하면서.

“……선생은 너를 어째서 싫어한 거냐?”

“제가 건방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건 또 왜?”

“제가 그 선생이 잘못 가르치는 내용을 지적한 적이 있었고, 수업시간에 배울 것이 없어 같은 과목의 수능이나 대학교재를 공부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요컨대, 윤혜원 패거리는 선생의 열등감을 이용하여 수연의 연락수단을 없애놓고 다음 괴롭힘에 착수했던 것이다. 어린 것들이 제법 주도면밀했다고 해야 할까.

윤혜원은 강수혁에게 전화를 걸어 제 부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꾀어냈다. 친한 친구의 생일이라는 말에 부모님께서 돈을 받지 않기로 하셨고, 깜짝 파티라서 수연이에게도 조금 전에야 소식을 전했으며, 학교 친구들이 다 모여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그리하여 수연이 터미널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엉뚱한 레스토랑에 도착해있던 수혁은 오지 않는 동생을 걱정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윤혜원은 한때나마 저와 정말로 가까운 사이였지요.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도 오빠에게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진 않았습니다. 오빠는 또래들과 어울리지 않는 저를 자주 근심하곤 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갈수록 평범함과 멀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그러니,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동생 친구의 연락이 오빠에게는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으리라 말하며, 수연은 잠시 세월에 빛바랜 우울함을 드러냈다.

“부모님께서 돈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이었고, 저와 오빠의 이름으로 밥을 얻어먹은 가짜 친구들의 숫자는 서른이었습니다. 계산서에 적힌 금액이 상당했었지요.”

“윤혜원이는 제 부모에게도 거짓말을 해놨겠군.”

“예.”

수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뒤의 흐름은, 사실 굳이 듣지 않아도 예상이 가는 내용들이었다. 부모는 제 자식이 자신들까지 속였을 리 없다고 날뛰었고, 애미애비가 없는 새끼들 운운하는 욕설을 내뱉었으며, 종래엔 경찰을 불러 가까운 경찰서로 임의동행을 하도록 만들었다.

사전에 계획된 무전취식은 사기혐의 적용이 가능한 범죄다. 경찰은 남매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고아 새끼들에게 콩밥을 먹여주겠노라 노호하는 윤혜원의 양친 앞에서, 수혁은 하지도 않은 잘못을 사과하고 무릎을 꿇은 뒤, 1년에 걸쳐 보상을 치르겠다는 약속까지 하고서야 동생과 함께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라는 게 수연이 풀어놓은 오래된 이야기의 끝이었다.

경찰서 문을 나왔을 땐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고.

“…….”

측근이 겪은 오욕에 불쾌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생경함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제껏 수연으로부터 지난날의 개인사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는 아무리 곱씹어도 강수연이라는 인격의 부드러운 속살 같은 것이었다.

보다 ‘인간적으로 연약한’ 다른 부하들이라면 모를까, 수연 같은 녀석에게서 이런 면모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하다못해 경태가 이랬어도 지금처럼 뜻밖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터.

‘내가 이 녀석을 여러모로 특별취급하고 있긴 하단 말이지.’

내게 갚아야 할 채무가 없는 부하. 그러면서도 내가 남다르게 의지하고 있는 인재. 다른 부하들과는 무의식 레벨에서 다르다고 느끼는 인간 유형.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도 뚜렷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모호한 감정의 혼합물들.

종종 이렇게, 강수연이라는 인간을 특별취급하고 있는 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할 때면, 나라는 인간의 허술함에 대해서도 경계심이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느슨해졌다가 당겨지기를 되풀이하는 경계심이.

“어우, 씨.”

씨근덕대는 경태의 표정에선 장난기가 싹 빠져있었다.

“진짜 최악의 생일이었겠네요. 누님께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들으니까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 듭니다. 그 개쌍년 패거리가 누님에게 한 짓이 그거 하나만 있지도 않을 거 아닙니까?”

“평소엔 그저 귀찮을 뿐이었어. 열등감의 발로라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시기를 하는가가 의문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휴.”

분에 겨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경태 녀석.

한마디로, 자신을 건드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오빠를 끌어들인 건 끔찍했다 이거로군.

“너는 그때도 수혁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겠구나?”

내 물음에, 수연은 두어 호흡의 간격을 두고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수혁의 기일에 들었던 비밀스러운 고백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였다. 오직 수연과 나 사이에서만 흐르는 언중언.

수연은 고저가 완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오빠가 형님께 거두어지기 전까지, 저와 오빠에겐 불행한 일들만 계속해서 이어졌지요. 그래서 더욱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는 죽은 수혁으로부터 들은 것들이 조금 있다. 공장을 다니다가 왼손 검지가 분쇄기에 갈려버렸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로 퇴직을 강요당했으며, 장애등급이 나오지 않는 장애인으로서 취업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고. 겨우 손가락 하나 없어지는 정도로는, 그 손가락이 엄지가 아닌 이상에야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기에 전세보증금이 증발한 적도 있다고 했었지.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입을 맞춰 선순위 보증금의 액수를 속였더라고. 소위 ‘갭투기’를 한 집주인이 해외로 도주 후 잠적해버리면, 대출까지 받아 전세를 얻은 세입자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수밖에.

‘사람 자체는 유능한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전대 비서실장이 괜히 수혁을 제 후임자 후보로 고려했던 게 아니다. 조직에 들어온 후 본사의 핵심부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만 놓고 보면 동생에게 뒤지지 않는 녀석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격이 다른 수연에겐 못 미칠지언정, 경태와는 또 다른 형태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서로 다른 부서들의 부드러운 시너지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했었다.

흙을 개는 물 같은 녀석이었다고 해야 할까.

앓는 소리를 내던 경태가 수연에게 묻는다.

“그래서, 그 여자는 아까 뭐 하러 누님을 귀찮게 한 겁니까?”

“사과하고 싶다더라.”

“이제 와서요? 왜요?”

“날 미워하게 된 계기에 오해가 있었다고. 시간이 흐르고 철이 들면서, 내게 못할 짓을 했다는 자각이 생겼다고.”

“허. 오해는 무슨 놈의 오해. 설마 받아주신 건 아니죠?”

“그냥 듣고만 있었지.”

“잘하셨습니다. 그런 사과는 받아주는 게 아니거든요. 열 중 여덟아홉이 자기를 위해 용서를 구하는 거니까요. 죄책감을 덜어내서 본인이 편해지려고.”

“…….”

“그냥 확 죽여 버리는 건 어때요?”

“김경태.”

“아, 왜요. 하다못해 조직원 자녀들이 왕따를 당해도 본사 고충심의위원회에 안건이 올라오곤 하는데, 더구나 그게 누님의 일이면 조직의 자원으로 해결을 볼 만하죠. 외교부 사무관 하나 슥삭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안 그렇습니까, 형님?”

시무식 때 홍영식이가 신입조직원들에게도 소개한 바, 조직 본사엔 조직원들의 고충을 접수·심의하여 구제여부를 결정하는 부서가 존재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급 간부들을 앉혀놓고 전문 인력을 할당하여 내부결속력 확대에 기여하도록 해놓은 곳.

「조직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한 더 이상의 억울함은 없다.」 라는 부하들의 믿음은 조직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가치가 높은 것인지.

원로급 간부들의 무게감은 조직원들이 조직의 힘을 남용하거나 제 힘처럼 착각하는 경우를 막아주는 좋은 안전장치였다.

최종 심의결과에 반드시 들어가는 나의 서명 역시도.

“제게 좋은 구상이 있습니다.”

답지 않게 잔뜩 격앙된 경태가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기며 하는 말.

“우선 윤혜원 본인과 부모를 한꺼번에 납치한 다음, 아버지는 튀기고 어머니는 데쳐서 윤혜원이 배고프다고 할 때마다 나누어 먹여주는 거죠. 부모가 다 똥으로 변한 다음에 본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까요? 자기가 부모를 먹고 부모를 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아주 봐줄 만할 겁니다.”

“그만해. 아무것도 할 생각 없으니까.”

“왜요……?”

“나는 형님께 사람의 목숨을 빚지고 싶지 않아. 그게 아무리 쉽고 하찮은 목숨들이더라도.”

“읭?”

당황하는 경태 옆에서, 수연은 내 눈길을 피하듯 제 무릎 어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거, 어쩐지 나에게 알아달라고 밝히는 제 속이었던 것 같은데.

빚을 지지 않고서 내게 거두어진 유일한 부하라는 사실에 자부심이라도 느끼는 건가, 아니면 관계의 유일성 그 자체에 대한 무의미한 애착인가.

수연의 속을 헤아리던 나는, 오래지 않아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느 쪽이든, 나에 대한 강수연이라는 인간의 충성에 부정적인 연향을 미칠 요소는 아니니까.

내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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