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식량반입명령 (10)
내가 한국으로 복귀할 때, 헤어지는 자리에서, 린페이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다.
“저, 오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어요.”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모은 채 조심스럽게 내놓던 부탁.
“맹세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 깊숙한 곳이 허전해지는걸요. 그러니 부디, 제게 오빠의 이름을 허락해주세요.”
가오슈센이 알아오라 시킨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온전한 본인의 소망인지. 가오슈센은 그저 리규휘가 가명이라는 사실을 귀띔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미완의 고독을 조종하기가 가능했다.
만약 이게 가오슈센이 배후에서 추동한 바라면, 적당한 가명을 둘러대 봐야 추후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일 것이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분위기로.
하여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린페이는 마침내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고, 내 표정을 보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으며, 이내 어렵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방금은 그냥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제가 조금 주제넘었나 봐요.”
나는 그 어깨를 붙잡고 이마에 입맞춰주었다.
“이만 가봐. 다음에 다시 보자.”
“네…….”
린페이는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 채로 돌아섰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중독의 최대상태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군.’
대개의 사랑은 신경계에서 발생하는 화학적인 작용이자 중독이고, 그 중독이 지속되는 기간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평소 비서실이 가장하는 ‘나’와 린페이 사이의 교감이 썩 깊이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지금쯤이면 페닐에틸아민의 작용이 고점을 지나 완만한 쇠락곡선에 접어들었어야 정상이건만, 린페이의 중독은 처음 시작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점에 머물러있는 상태였다. 나를 보기만 해도 강렬한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라는 뜻.
혹시 뇌가 좀 비정상인 개체인가?
간혹 그런 인간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뇌가 뭔가 기계적인 오작동을 일으켜서, 화학적 중독상태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변칙적인 개체들이 존재하기도 한다고.
내가 새겨준 쾌락의 대체재로써 마약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를 만들지 않는 건 마이너스 요소였다. 액면가가 높은 첩들의 일반적인 행동양상을 따라주어야 더욱 쓸 만한 도구로 거듭날 터인데.
여하간 린페이의 이상성은 당초의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고, 그 이상성에 더해진 희망은 나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본명, 본명이라.
내 본명이 남아있는 기록은 스승새끼가 모조리 말소시켰고, 어릴 적을 함께한 친구들 역시 보육원에서의 마지막 날에 모조리 의식의 제물로 바쳐졌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친부모와 그 주변인 정도를 제외하면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명을 밝히고 다닌다 한들 문제가 될 여지는 거의 없다. 제로는 아닐지언정 제로에 수렴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나 내게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라 해도 좋을 강박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경태나 수연 같은 녀석들을 상대로도, 본명을 말하려 할 때면 목에서 턱 걸리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거부감이.
어째서일까. 스스로 자문해 봐도 분명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 문제였다.
그저 아직은 아니라는 막연한 경계심이 들 뿐.
결국엔 이 또한 사냥꾼을 피해야 하는 사냥감의 신경증일 터. 언젠가 더 이상 사냥감이 아니게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정신질환이겠지.
분명히 그럴 것이다.
5월 4일 화요일, 나는 정부 주관 브리핑에 참석하기 위해 양재역 인근의 국민외교센터를 방문했다. 고위험수렵 및 공인특수능력 국제협력사업의 주무부처가 외교부였던 까닭. 유관부서가 여럿이기는 하나 창구 역할은 외교부가 도맡는다. 출입증을 발급받고 센터 내부로 들어서던 중, 나는 동행한 수연 녀석의 이상을 감지하곤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이 순간, 수연의 살갗 아래에선 광폭한 감정의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분노, 증오, 그리고 살의. 굳이 생체신호를 읽을 것도 없이 온몸으로 흘러나오는 격렬한 감정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불길. 경태는 희미하게 떨리는 수연의 손끝을 보더니 미간에 주름을 잡고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저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대체 무엇이 이 녀석의 평정심을 이렇게까지 흔들어놓는가. 황금기의 눈으로도 감정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비상한 부동심을.
한데 못 박혀 움직일 줄을 모르는 수연의 시선을 좇아보니, 그 끝엔 공무원증을 목에 건 외교부 인원 하나가 서있었다. 나는 공무원증에 적힌 소속과 이름을 확인했다.
「재외국민 보호과 윤혜원」
연령은 대충 수연과 비슷해 보인다. 저쪽 역시 수연을 바라보고 있기는 마찬가지. 방역용 마스크 탓에 처음엔 아는 사람인지 확신을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으되, 이내 수연의 출입증을 보곤 놀라움, 당혹감, 난감함 등이 어지럽게 뒤섞인 감정을 드러낸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망설이던 젊은 외교관은, 몇 번인가 발을 움찔거린 끝에, 입술을 살짝 깨무는가 싶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또각또각 다가왔다.
“저기, 강수연…… 맞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수연의 출입증에도 사진과 이름이 있었고, 딱히 가명을 쓰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지금의 수연은 공능법인 개마의 임원을 맡고 있는 각성능력자였다. 이는 강수연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여러 위장신분들 가운데 하나. 출입증 가운데의 사진은 방역용 마스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운이 좋았군.
수연 녀석이 이름이 다른 신분으로 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벌써 평정을 잃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녀석이, 이제 와서 모르는 척 그저 외모가 닮았을 뿐인 타인이라고 우기기도 우스울 노릇이니까.
수연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외교관 윤혜원은 나와 경태에게 한 번씩 고개를 숙이며 미소의 어색함을 덜어내려 애썼다.
“처음 뵙겠습니다. 외교부 재외국민 보호과에 사무관으로 있는 윤혜원이라고 합니다. 두 분께선 수연이의 직장동료분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경태와 짧은 시선을 주고받고서 대답했다.
“공인능력법인 개마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는 안호준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사무관께선 여기 강수연 상무와 어떻게 아는 사이이십니까?”
내가 가명을 대며 묻자, 윤혜원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어렵게 말을 내놓았다.
“초등학교랑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어요.”
세상 어디에 친구라 말하면서 눈치를 살피는 친구가 있나. 윤혜원의 힐끗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수연은 건조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부사장님.”
“음?”
“시간이 여유롭지 못합니다. 이만 올라가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인 윤혜원이, 다시금 눈을 굴리며 움츠러들었다.
“여러분, 「아프리카 방면 교민보호 및 평화유지 프로그램」 브리핑을 들으러 오신 것 맞죠? 아홉 시부터 시작하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헤매실 수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저도 거기 들어가야 하고요.”
행사관계자였나. 하기야, 이 시간에 재외국민 보호과 소속 사무관이 공공 컨벤션 시설에 와있을 이유가 달리 없겠지. 이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윤혜원은 손을 펼쳐 방향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섰다.
“자, 이쪽으로.”
거절을 피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기보다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노력에 가까워 뵈는 행동이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갈수록 의아함이 더해간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옛 지인을 마주치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치자. 그러나 수연처럼 비범한 녀석의 평정을 깨는 악연이라는 건, 강수연이라는 인간을 아는 입장에선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승강기에서의 정적과 복도를 걷는 동안의 무언을 거쳐 컨퍼런스 룸 앞에 도달하니, 이제껏 등 뒤를 신경 쓰며 앞장서온 외교관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돌아섰다.
“저기, 수연아. 우리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묻고는, 곧바로 나와 경태를 향해 양해를 구한다.
“두 분. 괜찮다면 잠시 수연이를 빌릴 수 있을까요? 몇 분이면 됩니다.”
오는 내내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까 고민한 티가 난다. 나는 시선을 수연에게로 돌렸다.
“강수연 상무.”
“예.”
“어떻게 하겠나?”
“…….”
눈을 내리깔고 잠시 말이 없던 수연은, 이내 미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곧 정리하고 뒤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수연을 두고 룸에 들어서자, 경태 녀석이 이제껏 참아왔던 호기심을 터트린다.
“와. 누님이 저러는 거 처음 봤습니다. 형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걸까요?”
“본인이 내키면 말해주겠지.”
물어보기야 하겠지만, 감추고 싶은 일이라면 억지로 캐물을 마음은 없다.
나는 자리에 앉아 담당자들이 미리 비치해놓은 자료를 펼쳤다.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수 페이지를 넘기자, 커다랗게 인쇄된 동아프리카 일대의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현재까지 파악된 현지 무장 세력들의 대략적인 분포 정보.
그러나 내 눈길을 붙잡는 것은 그러한 정보들이 아닌, 케냐 서부의 건조한 협곡지형이었다. 보고리아 호수 서쪽, 불그스름한 거대 능선들이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물결치는 곳.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땅속으로 깊어지는 균열 속에서 그들의 「태양」을 처음으로 마주했던 장소.
스승새끼의 기억에 의지하여, 나는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북상할 일은…… 아마도 없겠지.’
유럽 전역에 첫 번째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증기기관을 탑재한 98문 전열함 HMS 버논Ⅱ호가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몸바사 항에 닻을 내렸다.
HMS 버논Ⅱ호의 표면적인 임무는 몸바사 항의 포트 지저스(Fort Jesus)를 거점 삼아 해상 초계활동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나, 실제 임무는 「대영박물관 제0과(Section 0)」의 모험가들-장래의 대마법사들-을 안전하게 호송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다년간의 탐사에서, 신비주의에 경도된 제국주의자들이 갈라진 대지 속 천만 년 전의 지층에 도달하기까지의 경위는, 많은 부분이 풀리지 않는 우연과 의문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수백 킬로미터의 황무지를 헤치고 나아가도록 만들었는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어려워지는 보급. 적대적인 원주민들과 사나운 짐승들의 습격. 풍토병에 걸려 픽픽 죽어나가는 동료들. 모험가들의 의지를 무너뜨릴 요소가 넘쳐흐르는 여정이었음에도, 훗날 대마법사로 거듭날 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험난하기 짝이 없는 탐색을 이어나갔다.
당시의 여정을 스승새끼는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틀림없이 광야를 헤매는 선지자들이었다.」라고.
젊은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광야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와 동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완전히 맛이 가있었으니, 그 험로를 직접 걸었던 스승새끼의 기억조차 내게는 의문만 더해줄 따름이다. 작위계승권도 없고 귀족다운 부도 마땅치 않았던 귀한 혈통의 낙오자들에겐, 신비주의를 양분 삼아 키워낸 자존감이 그만큼 중요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뿐. 낙오자들의 도피처인 대영박물관 제0과는 당시 그럴듯한 성과를 독촉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제국주의자들이 그들만의 광야에서 모조리 쓰러져 죽었다면 어땠을까.
황금기의 눈을 가동할 수 있게 된 시점부터, 원탁의 마법사들은 온 세상에 걸쳐 열성적으로 사다리를 걷어차고 돌아다녔다. 황금기와 여명기의 유물들을 선점함으로써 후발주자들이 진정한 신비에 도달할 길을 차단한 것이다.
그러니 욕심 많은 제국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이 세상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진짜 마법사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게 과연 좋은 일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