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식량반입명령 (8)
쌔액- 쌕-
조용한 방 안을 채우는 무방비한 숨소리. 이는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체력이 다하여 늘어진 린페이의 것이었다. 그간 실신을 시켜본 경험에 따르면, 별다른 자극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최소 예닐곱 시간은 눈을 뜨지 못할 게 분명했다. 침대 위에 늘어진 몸엔 기력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침대 옆 탁자 앞엔 전자식 탁상시계 하나가 떨어져있다. 액정이 박살난 탁상시계는 카메라가 내장된 감시수단이었다. 현관에 있던 초소형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공안이나 국안부에서 설치한 장치일 것이었다.
이 집에 설치된 감시수단들은 현관문 앞에서 잠시 서있을 때 빠짐없이 파악했다. 그러므로 내가 린페이와 더불어 현관에서부터 침실까지 움직인 난잡한 동선은, 감시자들을 엿 먹이는 공교로운 우연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나하나는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도 겹쳐놓고 보면 결코 우연일 리가 없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슬슬 단념해주면 고맙겠는데 말이지.’
설마하니 내게 투시력이 있다곤 상상하지 못할 감시자들은, 대체 내가 무슨 수로 카메라와 도청장치들의 존재를 파악했는지가 의문일 것이다. 자기네 앞마당에서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꼴이니 어이가 없기도 하겠지.
집이 빈 틈에 정밀조사를 해볼 감시의 전문가들은, 내가 미리 깔아놓은 거짓 알리바이들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부하들을 시켜 이 집을 마련해줄 적에 눈속임으로 숨겨두도록 했던 감시장치들을. 이 장치들은 네트워크 추적을 실시할 시 또다시 엿을 먹도록 설계한 함정들이기도 했다.
감시자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감시당하는 쪽이었다는 사실에 한 번 허탈함을 느끼고, 두 번째 함정을 마주했을 때 다시 한 번 탈력감에 빠질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자로 거둔 경독들의 충성심을 확인하는 시험이기도 했다. 그들을 통해 미리 정보를 얻고, 그 정보의 정확성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본 것. 그들은 집 안에 설치되어있는 감시장치들을 단 하나의 누락도 없이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물론 그들이 내 요구를 공안이나 국안부에 보고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는 있다. 이 경우, 그들이 전한 정직한 정보는 나를 더욱 크게 속이기 위한 미끼가 되는 셈.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아프리카에서도 추가적인 검증을 이어나가볼 요량이다. 검은 대륙 곳곳에 중국의 자본과 인력과 군사력이 깔려있으니, 적어도 한두 번쯤은 괜찮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겠는가. 중국의 이익을 축내어 내 이익에 보탤 만한 기회가.
이렇게 점진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며 돌다리를 두드려보아야, 가장 중요한 계획을 추진할 때도 안심하고 이용하기가 가능하겠지.
상념을 일단락 지은 나는, 술타나를 만나러 가던 무렵부터 갈고 닦아온 수면 제어를 활용하여, 토막 친 잠과 마법적 명상을 반복하며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남는 시간을 활용하기를 약 여덟 시간. 블라인드 틈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떨어진 탁상시계가 맑은 소리로 알람을 울리기 시작했다.
“으응-”
린페이가 깨어날 기미를 보이기에,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한숨을 쉬며 이것저것 말라붙어 지저분한 시트 위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그러곤 염동력을 활용하여 린페이에게 자연스레 팔베개를 넣어주었다.
“으…….”
눈썹을 움찔거리던 끝에 힘겹게 눈을 뜬 린페이는, 잠시 멍한 느낌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만면에 행복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어났나?”
“네. 오빠도 깨셨네요.”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물었다.
“일요일인데도 알람이 이른 시간에 울리는군. 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혹시 방송국에 나가봐야 할 일이 있나?”
모르는 척 던지는 질문에, 린페이가 내 팔에 머리를 부비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앗, 아니에요! 오늘은 일이 없어요! 음, 정확히는 있었는데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있었는데 없어져?”
“네, 네. 어제 퇴근할 때 이야기를 해놨거든요. 제 일정에 다른 사람을 넣어달라고.”
“그래도 되는 건가?”
“원래는 안 되죠. 안 되는 건데……. 되게끔 해주시는 분이 있잖아요. 여기에.”
손끝으로 내 가슴을 지분거리며 수줍게 웃은 린페이가, 스르륵 이불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단 알람부터 끌게요.”
“내가 하지.”
침대를 벗어난 나는 액정이 나간 시계를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들어있던 카메라는 충격으로 말미암아-실제로는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투사된 염동력으로 인해-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맑게 흐르던 음악이 끊어지자 린페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해요. 제가 미리 꺼놨어야 했는데, 어제는 미처 생각을 못했네요. 그럴 겨를도 없었지만……. 피곤하실 텐데, 이제라도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어때요?”
“아니다. 나가봐야 할 일이 있으니까.”
“네? 일이요?”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너도 함께 가면 될 거 아니냐.”
“아.”
잠시 나라를 잃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던 린페이는, 이어지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다음으로 드러나는 건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기대감이었다.
“제가 같이 가더라도 폐가 되지 않을 자리인가요?”
“그래.”
“……기뻐요.”
린페이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배시시 웃는다. 비서가 첩을 겸하는 경우인 「쏘오미(小蜜)」가 아닌 이상, 공식적인 자리에 첩을 동반한다는 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기 때문. 말하자면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들어가는 구도인 것이다. 내게 아내가 없음을 아는 린페이에겐 내 말이 더더욱 달게 들렸을 터.
나는 린페이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씻자. 늦기 전에 씻고 밥 먹어야지.”
“네!”
함께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미완의 고독은 나를 힐끗거리며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넓은 거실에도 요란한 정사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던 까닭이다. 린페이는 소파 위에 내팽개쳐진 채 웅웅 울어대는 핸드폰의 모닝콜을 끄고는, 새삼스러운 부끄러움을 담아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어디 앉아 계세요. 얼른 정리하고 식사를 준비해드릴게요.”
“직접 요리해주는 건가? 나가서 먹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러고 싶은데……. 「너는 내 운명」이라는 한국 방송에서 위커아이(于可爱) 부부가 아침을 먹는 게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혹시, 싫으세요?”
“그럴 리가. 내 여자가 해주는 집밥은 처음이라 기대가 되는군.”
“앗, 에흑, 그, 분발하겠습니다!”
심박이 급상승한 린페이가 가장 먼저 치우는 것은 사방에 널려있는 옷가지들이었다. 개중엔 원래 입고 있던 정장 말고도 검정에 가까운 진록색의 인민해방군 육군 정복이 섞여있었는데, 이는 가오슈센의 후원으로 단기간에 유명세를 얻은 린페이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总政治部歌舞团)에 입성하면서 수여받은 것이었다.
이 공산주의 파시스트들의 나라에선 좀 유명하다 싶은 연예인, 방송인, 영화인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가무단에 들도록 강제하고 있다. 모든 유명인들은 마땅히 애국적 선전활동의 의무를 져야만 하는 것.
가무단의 위계질서는 생각보다 엄격하다. 시진핑의 마누라가 별을 달고 단장직에 앉아있는데, 위계질서가 약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한마디로, 린페이가 이제 ‘첩의 내조’라는 걸 보다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완장을 찬 귀족부인들 및 첩들의 정치질에 끼어들 자격을 갖춘 것이니까.
“오래 기다리셨죠?”
대강의 정리를 마친 린페이가 손을 털며 묻는다.
“요리는 담백한 게 좋으시겠어요, 기름진 게 좋으시겠어요? 좋아하는 맛이나 싫어하는 재료 같은 걸 말씀해주시면 지금 있는 재료로 최대한 맞춰볼게요. 이것저것 연습하느라 사놓은 재료들이 좀 있거든요.”
“네가 평소에 먹는 것이면 된다.”
“제가 먹는 거요?”
“그래. 이 기회에 조금이라도 네 일상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쓸데없이 의욕이 넘쳐 거창한 요리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면 괜스레 시간이나 많이 잡아먹겠지. 이런 속내를 좋은 말로 포장하니, 린페이의 얼굴이 또 한 차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볼은 물론이거니와 목덜미까지 붉어진다.
“오빠도 참……. 알았어요. 그럼 오늘의 주채(主菜/메인 요리)는 차예딴(茶叶蛋)을 올린 완탕면(云吞面)으로 결정! 막상 보시고 나서 너무 간단하다고 실망하시면 안 돼요?”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라. 내가 도와줄 것은 없나?”
“도와줘요? 오빠가요?”
“왜? 이상한가?”
“이상, 하죠?”
남녀가 가사를 분담하는 건 평민가정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다. 아무렴 공산귀족이나 공산자본가들이 그 귀한 손에 물을 묻히려 할까. 하물며 일방적인 봉사가 당연한 첩이 상대임에야. 머뭇거리던 린페이가 미소를 머금고 녹아내린 목소리를 내었다.
“오빠는 그냥 앉아 계세요. 오늘은 제가 오빠에게 처음으로 요리를 해드리는 뜻깊은 날이니까, 온전히 제 손으로만 만들고 싶어요.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네 뜻이 그렇다면야.”
내가 수긍하자, 앞치마를 두른 린페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시작했다. 나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독기가 빠질 일밖에 남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완탕면은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육수와 고명 등이 초벌로 준비되어 있었던 까닭. 껍질을 두드려 깬 삶은 계란을 팔각과 후추, 간장이 들어간 홍차에 넣어 오랜 시간 끓여야 하는 차예딴 역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데우기만 하면 끝이었다.
여기에 메론과 함께 볶아낸 돼지고기인 수과초육사(水瓜炒肉丝), 표고버섯과 마늘종이 주재료인 볶음요리 산대초향고(蒜薹炒香菇),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치가 더해진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린페이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식사를 권한다.
“자, 이제 드시면 돼요.”
요리의 맛은 사실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염도, 당도, 산도, 온도, 재료의 상태까지도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눈을 가지고 먹어온 끼니들이 끼니들인 만큼, 어지간한 요리는 그냥 정보의 색채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맛을 짐작하기가 가능하다.
무릎 위로 주먹을 쥔 린페이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 바라보는 가운데, 천천히 면과 국물을 음미한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맛있다. 솜씨가 좋구나.”
“정말요?”
“나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특히 먹는 것에 관해서는.”
“다행이다…….”
안도한 린페이가 다른 음식들을 차례로 권한다. 수과초육사나 산대초향고는 조직 본사의 중식 조리장이 손수 만들어 내오는 것보단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었으되, 아마추어치고는 양호한 불 조절로 재료의 식감을 잘 보존한 편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입맛에 맞아. 노력을 많이 한 게 느껴져서 좋다.”
“그런가요?”
후후 웃은 린페이가 김치를 가리킨다.
“이 파오차이도 드셔보세요. 조선족의 전통방식을 배워서 제가 직접 담근 거랍니다. 한국인들은 매 끼니마다 꼭 파오차이를 먹는다면서요?”
“알았으니 너도 어서 들어라. 언제까지 그렇게 나만 보고 있을 참이냐.”
“아, 그래야죠.”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서 내가 먹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던 린페이는 이제야 비로소 제 식기를 손에 쥐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린페이는 나를 훔쳐보는 한편으로 제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애를 뱄으면 하는 기대감이겠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이지만.
“린페이.”
“네?”
“만약 내가 네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냐?”
“어…….”
눈을 깜박이던 린페이가 괴상한 대답을 내놓는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정말로 그러신다면, 그건-”
“그건?”
“굉장히,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기분이 좋다고?”
“네. 좀 신경 쓰이고 부끄럽기는 해도, 언제 어느 때나 오빠가 날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은 되게 좋을 것 같은데. 안심도 되고요. 아, 물론 화장실에 있을 때는 제외예요!”
“…….”
이런 답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대답이야 어쨌든, 이렇게까지 대놓고 암시를 주는데도 알아듣지 못했을 린 없겠지.’
린페이가 거실을 정돈할 때 바로 세워놓은 꽃병엔, 암술머리에 지향성 집음기를 품은 조화(造花) 한 송이가 다른 조화들 사이에 끼어 존재감을 감추고 있었다. 방향이 좀 어긋나있긴 해도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기엔 충분할 터.
경계하는 바는 감시자들의 무능이다. 내가 깔아둔 알리바이들을 발견하지 못한 감시자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내사에 착수하는 일 따윈 없어야 하는 것. 그랬다간 실제로 정보를 흘린 세 경독에게까지 의심이 닿는 수가 있으니까.
식사와 양치를 마친 나는, 린페이가 단장에 열중하는 틈을 타 본디 내게 속해있던 유기물들을 염동력으로 모아서 회수한 후, 일부러 챙겨온 불특정다수의 각질과 모발과 체모를 흩어놓음으로써 흔적 교란을 완료했다.
“오빠. 저 어때요?”
치장에 공을 들인 린페이가 내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이며 평가를 요구한다. 나는 대답 대신 다가가서 허리에 손을 둘렀다.
“가지.”
“앗, 네.”
기대감에 심장이 뛰는 동물은 시선을 내리깐 채 얌전하게 내 인도를 따랐다.
이렇게 린페이를 동반하여 간 석벽호표의 본부에서, 나는 아침부터 다소 어이없는 구경거리를 보아야만 했다. 하얀 쿵푸복(功夫服)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같은 복식의 무리와 더불어 입구 가운데를 막고 서서는, 이능보유자의 커다란 목청으로 미주를 불러대는 꼴을.
“나! 정부공인 사영 엽사병단 「절강검문(切钢剑门)」의 문주! 절강검객(切钢剑客) 양챠오웬(楊橋文)이 명성 높은 석벽호표의 사령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오!”
듣고 있던 린페이가 와, 하는 탄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