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해방구 (7)
이건 웬만해선 받기 싫은 거래인데……. 나는 머리 굴릴 시간을 벌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듣다 보니 좀 놀랍군요.”
“무엇이 말이오?”
“인민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하는 흑해자당이 죄 없는 여자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래서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혁명의 정당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죄가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영주가 정색을 하며 반박한다.
“이년들의 피부가 하얗고 보드라운 이유가 뭐겠소? 피부가 거칠어질 일들을 농민과 노동자들이 대신해주었기 때문이지! 농민들을 착취하여 좋은 것들만을 먹고,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당연한 권리로 여겨온 특권계급의 일원이 어찌 무죄일 수가 있겠소? 그렇게 따지면 저 프랑스 왕정의 마리 앙뜨와네트도 무죄일 거요! 봉건주의적 반동계급에 속해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죄란 말이오! 알아듣겠소?”
여기까지 외친 영주는, 사나운 눈길을 돌려댄 끝에 여자 하나의 가슴을 난폭한 손길로 움켜잡았다.
“이 가슴!”
여자의 입에서 악! 하는 비명이 터졌으나, 각성능력자 영주는 쥐는 족족 피멍이 찍힐 만큼의 힘으로 마구 주물러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천박한 젖탱이에 들어차있는 지방이 전부 다 인민을 쥐어짜서 나온 기름이라 이거요!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흑해자당이 아니야! 마오 주석의 의지를 계승하는 진정한 공산당이지!”
“진정하십시오.”
이거 진짜로 천박한 새끼로군. 아무리 내게 떳떳치 못한 부분을 찔렸기로서니, 거래 상대 앞에서 최소한의 평상심도 유지하지 못하는 얼간이가 무슨 간부 노릇을 하겠다고.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흥분하여 침을 튀겨대는 영주를 담담한 말로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조금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겐 당신들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오해?”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 같은 상인이 이런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옳든 그르든 그냥 이익만 잘 나오면 그만인 것을. 애초에 우리 회사의 사업영역부터가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지요.”
“음…….”
눈을 깜박이던 영주는, 가슴을 쥔 손을 풀곤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며 되묻는다.
“그럼 혁명의 정당성 같은 걸 왜 물어본 거요?”
이 시점에서 나는 임기응변으로 떠올린 명분을 입에 담았다.
“상품 공급의 안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정성이라니, 영문을 모르겠군.”
“영문을 모르겠다?”
“그렇소.”
“당신들이 취급하려는 상품은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소리요 그게?”
“중국 밖으로 팔려나간 저 여자들은, 나와 당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당신들의 악행을 증언할 증인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아무렴 이 바닥의 고객들이 비싸게 주고 구입한 노예들을 소홀히 관리하기야 하겠습니까만, 고객 본인이 경찰에 덜미를 잡히거나 노예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기적적인 탈출을 한다거나 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곤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요?”
“중국 정부에 도덕적 명분을 내어주는 꼴인데 당연히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발뺌을 하기 위해서라도 당신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상품을 공급하기 어렵게 될 테고, 우리는 판로를 뚫는 데 들어간 비용을 손실로 처리해야 할 겁니다. 국제적 수사공조의 표적이 될 위험은 덤으로 붙고 말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곳에 팔면 될 거 아니오? 아니면 저것들의 머리를 약과 폭행으로 완전히 비워버리거나. 당신네들은 그것도 못하오?”
“판로를 제한한다는 건 기대수익의 감소를 뜻하고, 머리를 망가뜨린다는 건 상품가치의 저하를 의미합니다. 둘 다 적용할 경우 교환비는 금괴 하나에 여자 스물쯤이 적절하겠군요. 동의하시겠습니까?”
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가격을 후려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임기응변 치고 나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스물? 스물이라고?”
영주가 심통 가득한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낸다.
“계집 하나에 2만 위안도 안 되는 값인데, 후려쳐도 너무 막 후려치는 거 아니오? 숫제 모욕감이 느껴질 지경이로군!”
2만 위안이면 현재 환율로 한화 삼백오십 남짓한 액수였다. 흑해자당이 첫 거래를 뚫고자 선별해온 미인들의 값어치라기엔 지나치게 낮은 금액. 그러나 나 이외의 판로가 마땅찮을 놈들의 선택지는 단둘뿐이다. 사기에 가까운 거래를 체결하거나-
‘아니면 그냥 거래를 포기하거나.’
이건 일반적인 중국인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조건이다. 그 증거로 본인이 이미 모욕감을 입에 담지 않았나. 이쪽 시장의 사정에 밝을 리 없으니, 내 논리의 허점을 꿰뚫어볼 방도도 없겠지.
입술을 씹으며 망설이던 영주가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묻는다.
“그토록 헐값에 넘기느니 차라리 이 마을에서 소비해버리는 편이 낫겠군. 이 아까운 여자들이 정말 그렇게 무가치하게 낭비되기를 바라시오?”
“서로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요.”
“금괴 하나에 여자 열. 여기까지라면 이번만은 양보할 마음이 있소. 첫 거래에서의 호의라고 치고.”
“이번만이라면 열다섯으로 봐드리겠습니다. 내게 가능한 양보는 여기까지로군요.”
“망할!”
입술을 씹으며 망설이던 영주가 부하에게 성난 어조로 지시한다.
“가서 ‘주민대표’들을 불러와! 여자는 빼고 남자들만!”
이 말에 여자들의 창백함이 한층 더 진해진다. 나와 영주, 그리고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는 마을을 번갈아 살피는 떨리는 시선들. 몇몇은 절망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방송을 듣고 영주의 부름에 응한 주민대표들은 복색에 통일감이 없는 추레한 각성능력자 집단이었다. 이빨이 몇 개씩 없기는 예사이고, 신체 곳곳엔 고된 노동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겉으로 드러나기 쉬운 살들이 속살에 비해 과하게 늙어있는 건 태양빛 강렬한 논밭에서 오래도록 일을 해온 결과일 터. 팔뚝마다 찍혀있는 바늘자국들은 절대로 매혈(賣血)의 증거 따위가 아닐 것이다.
운명을 예감한 여자 하나가 비명처럼 부르짖었다.
“차라리 팔려가게 해주세요!”
그러고는 나를 향해서도 네 발로 기어오다시피 하며 애걸한다.
“뭐든 할게요!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할 테니 제발 저를 사주세요! 여기서 나가게만 해주시면 한평생 몸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을게요!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 제발!”
이 여자를 시작으로 다른 여자들도 동시다발적인 울음을 터트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영주의 부하들이 여자들의 머리채를 붙잡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았고, 주민대표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질 행운을 예감했는지 대동소이하게 흉포한 미소들을 머금었다.
“친애하는 주민대표 여러분!”
영주가 청중을 향해 두 팔을 펼쳐보였다.
“우리 당은 모든 인민의 평등과 번영을 목표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그 투쟁에 기여하는 농민지도자 여러분들에겐 항상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오늘은 여기 보이는 이 ‘봉건주의의 창부’들 가운데 일부를 중당촌의 공공재로 선물하고자 합니다!”
연사가 힘껏 떨쳐내는 웅변에 주민대표들이 환호로 호응한다. 추레한 각성능력자들의 환호는 저질스러운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홍위병들이 인민재판과 사적제재를 일삼던 시대엔 드물잖게 볼 수 있었을 법한 그런 광경이었다.
“기억하십시오! 이들은 여러분의 삶을 고통으로 밀어 넣은 봉건귀족들의 피붙이들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군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더러운 여자들이며,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몸을 바침으로써 조금이라도 속죄를 해야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이쯤 되면 여자들이 어떻게든 이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먼저 주민대표들에게 던져진 여자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목격한 것이겠지.
‘하긴, 흑해자당 입장에선 안전장치를 마련해놔야 하니.’
대책 없이 여자를 뿌려버리면, 농군 출신의 못 배운 능력자들이 소위 말하는 ‘몸정’에 홀려 위험요소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 베갯머리송사가 괜히 강력한 게 아니잖은가.
하다못해 여자가 “나를 가족에게 데려다주면 가족이 아주 크게 사례할 것이다. 물론 그때도 나는 당신의 여자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남자를 유혹할 수도 있고.
그러니 흑해자당으로선 농민들에게 증오부터 심어놔야 합당하다. 사상교육과 선동으로 세뇌를 반복하여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심지 깊숙한 곳에 새겨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자를 주더라도 아내가 아니라 공공 소유의 노예로 주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함으로써 농민들은 노예에게 한없이 잔혹해질 것이며, 도구적으로 소모당하는 여자들에게 연민을 품는 도덕적 돌연변이가 나온다 한들 가족과 이웃사촌의 눈초리가 무서워서라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될 터.
공범자 의식을 강화하고, 무지렁이 농군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폭력을 몸에 익히도록 하며, 동시에 계급투쟁의식까지 함양하는 아주 좋은 전략이라 하겠다.
“자, 지금부터 차례차례 다수결로 뽑아봅시다! 저 봉건주의의 창부들 가운데 누구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어야 할는지를! 여러분에게는 모두 평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영주는 때때로 내가 있는 방향을 곁눈질했다. 꼴에 청나라 상인들 앞에서 홍삼을 불태운 임상옥 흉내를 내고 있는 것. 내 담담함을 엿본 영주의 골통 안쪽에 분기와 초조함의 색채가 일어난다.
‘얼간이 같으니. 내 속을 완전히 오판하고 있군.’
착각에 빠진 영주가 홀로 벌이는 치킨게임은 마치 허공에 해대는 주먹질과도 같아, 보는 입장에선 코미디가 따로 없는 것이었다.
경태가 낮은 소리의 영어로 슬쩍 물어 온다.
“저 중에 진짜로 귀한 핏줄이 있진 않을까요?”
“설마. 그런 최고급 상품이 여기까지 나올 리가 있나.”
저놈들의 머리가 장식품이 아닌 이상에야, 진짜배기 공산귀족과 공산자본가들의 피붙이들은 따로 빼놨다가 몸값을 받아내겠지.
그런데 경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자기 출신이 밝혀지면 곧바로 목이 매달릴 거라 생각해서 입을 다물거나 스스로의 신분을 속인 고위귀족이나 자본가의 핏줄이 있을지도. 혁명투사 운운하는 강도들과 주민대표들의 악다구니를 보고 겁을 먹었을 법도 하잖습니까?”
“흠…….”
“그런 귀족 2세를 챙겨두면 추가 거래로 세탁을 해서 꽌시 만드는 데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무명회사의 이름으로다가 말입니다.”
요컨대 무명회사가 노예시장에 나온 특별한 매물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예외적인 매입을 통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주는 상황을 연출하자는 소리였다.
“일단 한번 그런 전례를 만들어놓으면, 잃어버린 피붙이를 찾고 싶은 공산귀족들이 앞다퉈 무명회사에 선을 대려고 할 것 같은데요. 세탁에 필요한 추가 거래는 조직 내에서 뺑뺑이를 돌리면 그만일 테고요.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걸요.”
발상 자체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고 있었지만, 타이밍이 조금 좋지 않았다. 나와 경태가 조용히 대화하는 모습을 본 영주의 낯짝에 ‘그러면 그렇지. 네놈들도 초조하구나!’ 라는 느낌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스쳐지나갔기 때문.
등신 새끼.
영주가 허상 속의 기 싸움에 열을 올리며 여자들에게 무거운 절망을 선사하는 동안, 나는 차분히 경태의 제언을 곱씹었다. 흑해자당과 거래하는 상인이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면서까지 꽌시를 만들 가치가 있는가, 하고.
감수해야하는 위험이 대단치는 않다. 흑해자당이 어떤 경로로든 밀수를 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쯤은 공산당도 벌써 알고 있을 테니까. 상품들이 증언을 해봐야 뭘 얼마나 증언하겠는가. 눈을 가려 밤낮도 모를 선창에 처박아놓으면 기본적인 시간감각조차 사라질 것을.
그리고 여기 끌려나온 여자들이 선행된 거래의 상세를 목격한 것도 아니다. 중독성 낮은 향정신성 약물에 절여 한 반년쯤 숙성시키고 나면 그나마 아는 것도 정확한 진술이 불가능해질 터.
하지만-
‘위장용으로 다른 상품들도 묶음으로 사들여야 할 거란 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거래규모 면에서 흑해자당을 만족시킬 수가 없고, 언젠가 이쪽의 진의가 탄로 날 가능성도 생긴다. 덤으로 딸려올 대량의 성노예들을 매번 폐기처분하기도 번거로운 노릇. 매 거래마다 ‘특별한 상품’이 포함되어있으리라는 보장조차 없다. 잘해봐야 서너 번에 하나 얻을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것이겠지.
다만, 경태의 말마따나 단 하나의 전례만으로도 다수 공산귀족들에게 희망고문을 하기엔 충분하다. 그렇게 안면을 터두는 것 자체만으로 이익을 보는 셈이기도 하고.
고민하던 내 귀에, 다라-아담-켈의 장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흘러들었다. 비록 아랍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이긴 했지만, 「카피르」와 「나무스(ناموس)」라는 단어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