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29화 (229/561)

#28. 해방구 (5)

장인들과의 대화는 통역을 거쳐야만 했다. 그렇다고 말을 옮기기가 어렵지는 않았는데, 우선은 언어의 천재를 자칭하는 마무르가 있었고, 다음으로 내가 거둔 위구르인 그룹들 가운데 하나- 누르메멧 칸 그룹에서 차출한 표준 아랍어 구사자들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흑해자당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장인들이 직접 데려온 중국어 구사자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오만……. 고하르 라왈, 당신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그 험한 경험을 하고도 이 땅에 돌아올 생각을 품다니. 성전에 대한 의지가 보통이 아니시구려.”

동포의 입을 통해 내 입발림 말을 전해들은 푸른 눈의 기술자는, 다시금 동포의 입을 빌려 담담한 답을 전해왔다.

“내가 치러야 할 싸움은 성전인 동시에 복수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내 동료들을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쳐 죽였고, 그들의 죽음마저도 모욕하려 들었지. 헌데 내가 어찌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복수는 파슈툰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숙명 같은 의무인데.”

“과연.”

“그런 의미에서, 그대의 대접이 참으로 고맙기는 하지만, 이 항해가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몸이 편하다 보니 각오가 무뎌질 것 같아 우려가 된다.”

“늦어도 내일 밤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항해요. 당신과 다른 형제들의 각오가 겨우 이틀 만에 무뎌질 것 같지는 않군. 마음은 이해하지만 걱정이 너무 과한 것 같소.”

“그런가.”

베크룩스는 이제부터 2천 킬로미터의 내륙수로를 나아갈 예정이었다. 양쯔강 본류를 타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주장시(九江市)를 목전에 둔 물목에서 뱃머리를 틀어 남쪽으로 빠지는 길. 잠시 난징에 정박하여 연료를 채우는 시간을 포함하더라도, 내일의 태양이 저물기 전엔 넉넉하게 끝이 날 항해였다.

이 항해의 종착점은 포양호(鄱阳湖)였다. 중간으로 배를 몰고 가면 사방으로 수평선이 보일 만큼 거대한 호수. 늦은 밤의 어둠에 기대어, 우리는 이 호수의 외진 기슭에서 흑해자당의 일파와 접선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을 즐겨두시오. 뭍으로 올라가고 나면 하루하루가 파슈툰 전사들의 강인함을 시험하는 나날의 연속일 테니.”

내 말에 고하르 라왈이 미소 짓는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바다. 당신과 우리의 앞날에 알라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짧은 대화를 일단락지은 나는, 통역을 대동한 채 각각의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장인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장인들은 내 인사에 매우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적지를 가로지르며 풍성한 송별연을 즐기는 경험이 그만큼 각별하게 느껴진 덕분이겠지.

항해는 지루할 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간혹 폭이 좁아지는 물길에서는 수상경찰이 미리미리 교통정리를 해주었으므로, 베크룩스는 그들의 ‘알아서 모시기’에 힘입어 항해 내내 빠른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달리 장강이라고도 부르는 양쯔강의 강변에선 드문드문 모래톱에 드러누운 선박들이 눈에 띄었다. 그 빈도는 퉁링(铜陵)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이는 안휘성 남쪽의 지형이 수적질에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까맣게 타버린 순찰정의 잔해를 보며 생각했다.

‘진짜배기 빨갱이들이 전략을 아주 잘 잡았단 말이지.’

남부의 동지들과 별개로, 동부 해안에서 축출당한 흑해자당 세력은 지형이 험한 황산 일대에 새로운 본거지를 마련했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 일흔두 개에 달하는 광활한 산악지대는, 초능력을 보유한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가짜 공산당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부를 겨뤄볼 법한 환경이었다.

더군다나 이 산악지대는 장강수로를 약탈하기에 좋은 배후지대이기도 했다. 선박을 털어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한편, 내륙수운의 허리를 찌름으로써 물길에 의지하는 성(省)과 도시들의 혼란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전략이 성공을 거둘 경우, 후베이 성의 중심지인 우한과 후난 성의 중심지인 창사는 물론이고, 남쪽으로는 장시성에 속한 난창과 지안, 서쪽으로는 4대 직할시의 하나인 충칭(중경)까지도 도미노 무너지듯 열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중부와 서부 전체의 질서유지비용이 까마득하게 치솟을 거라는 이야기. 공산당 입장에선 중부와 서부 내륙 전체에 걸쳐 통제력을 상실할지도 모를 중대한 위협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장강수로가 흑해자당의 사정권에 들어있는 한, 싸움의 주도권은 공산당이 아닌 흑해자당 게릴라들에게 있는 셈이었다. 공산당은 수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불리한 지형으로 먼저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공산당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쪽 지역에서의 흑해자당 소탕작전은 민병대(사영 엽사병단)에 외주를 맡기는 비중이 높았다. 당장 이 베크룩스부터가 표면적으로는 그런 의뢰를 받고서 온 것으로 되어있으니까. 하청에 하청을 거듭할수록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진리가 아닌가.

항해 이틀째의 저녁, 베크룩스는 일몰이 물결치는 거대한 호수의 동쪽에 도달했다. 작은 바다라고 해도 좋을 너른 호수의 풍경은 그 자체로 중국이 왜 수적소탕에 애를 먹고 있는지 역설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서 옮겨!”

「석벽호표」에 배속시킨 내 부하들이 하부 갑판으로부터 선체 후미로 다양한 무기와 탄약 상자들을 끌어올린다. 기술자들과 함께 배송할 예정인 특급 상품들. 화물용 엘리베이터 한 쌍이 작업시간을 큰 폭으로 단축시켜준다. 개장을 마친 베크룩스의 후미엔, 이런 종류의 화물이나 함재정 따위를 편리하게 들이거나 내보낼 수 있는 미션 베이(Mission bay/측면개방형 특수목적 화물창)가 설치되어 있었다.

“请问(저기요)!”

가까이에 닻을 내리고 있는 녹슨 석탄운반선 위에서, 거지꼴을 한 사내 하나가 이쪽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친다.

“那边的粉丝们! 不好意思 给我点吃的吧!(그쪽에 계시는 분들! 죄송하지만 먹을 것 좀 나눠주세요!)”

나는 경태에게 지시했다.

“처리해.”

터엉! 경태의 손에서 소음기가 기본 사양인 저격소총(VSS)이 불을 뿜자, 먹을 것을 구걸하던 사내의 이마가 아음속탄에 맞아 팍 깨져나간다. 휘청 흔들리던 사내의 몸이 난간을 넘어 추락했다. 풍덩- 시체가 물에 빠지는 소리. 핏물이 번지자 더러운 물에 사는 생명들이 냄새를 맡고 반응한다. 이제 곧 크고 작은 수중각성체들부터 몰려들기 시작하면,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사내가 타고 있던 석탄운반선은 이번 밀수의 중요한 톱니바퀴였다. 베크룩스처럼 유명한 배를 흑해자당에게 직접적으로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선사가 파산하여 기약 없이 정박 중인 석탄운반선의 위치를 미리 조사해두었던 것. 이런 배는 배와 함께 버려진 법정대리인만 제거하면 부담 없이 이용하고 버리기가 가능했다.

‘설마하니 아직까지 대리인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지만.’

내가 확인한 바, 눈앞의 낡은 운반선은 벌써 반년 전부터 방치되어 있던 배였다. 멀지 않은 곳에 유인도가 있으니 구명정을 타고 탈출이라도 했을 법하건만, 죽은 사내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될 때까지도 혼자서 외롭게 배를 지키고 있었다. 필시 학력이 낮은 하류층 출신에 겁이 많고 소심한 유형의 인간이었겠지. 법정대리인 서약서에 뭣도 모르고 서명을 하고, 배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협박에 겁먹어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만큼.

미션 베이를 보러 나온 무슬림들은 누구도 이름 모를 불신자 하나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자위용 무장을 지급받았고, 옵서버인 마무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 까심제 돌격소총을 받은 마무르는 좋아하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오오, 이 영롱한 AK-103의 디테일을 보십시오. 육안으로는 정품과 구분하기가 불가능한 것. 오직 아름다움의 주인들(알 까심)만이 이토록 정교한 수제 총기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하디스트를 보는 시선을 기울였다.

“당신들 연합은 벌써 한참 전부터 정품을 쓰고 있지 않소? 아무리 디테일이 좋다 한들, 이제 와서 복제총기를 보며 감탄하는 건 좀 이상하다 싶은데.”

알 까심 장인들의 실력이 아무리 탁월하다 한들 성능과 내구성에서 정품을 따라잡기는 무리다. 그러나 마무르는 츳츳츳- 소리를 내며 검지를 펴서 좌우로 까딱였다.

“싸장님 당신은 낭만을 모르는 밀수꾼. 비록 우리 형제들이 돈이 많아지면서 알 까심과 결별하긴 했지만, 알 까심은 우리가 배고프고 힘겨웠던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브랜드인 것이에요. 그리고 장인의 수제 총기엔 아날로그적 감수성 또한 묻어있다. 그 감수성을 모르겠다면 싸장님에겐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 부디 사람다움을 학습하십시오.”

“…….”

테러리스트가 공감능력과 사람다움을 입에 담으니 위화감이 남다르다. 조금 전 민간인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인간이.

오히려 그런 잔혹함이 사람다움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는 있겠지만.

해가 진 다음 석탄운반선으로 옮길 무기와 장비들은 흑해자당이 쉽게 구하지 못할, 그리고 알 까심 장인들이 현지에서 제작하기 까다로운 품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고로 구한 2세대 야간투시경과 레이저 조준기, 알 까심 수제 도트 사이트 및 조준경들, 무반동포와 대전차로켓, 분대급 지원화기와 각성능력자용 중화기들, 그리고 일련번호를 지운 휴대형 지대공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이 중에서 지대공 미사일은 북한에서 흘러나온 골동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소량이나마 기만체(플레어) 따위에 속지 않을 최신형도 섞여있었다.

최신형의 정체는 내가 삼합회와의 거래로 획득한 중국제 지대공 미사일의 하나. 일련번호 등의 각인문자를 뭉개고 파키스탄제 라이센스 생산품의 특징을 덧입혀놓았으니, 중국 놈들이 흔적을 발견한들 파키스탄 공장에서 물건이 샜다고 판단할 것이었다.

일본산 겨자가스를 넘겨주기엔 조금 때가 이르다. 현 시점에선 그리 많은 양을 확보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탄두 형태로의 가공작업이 남아있고, 공산당의 생화학전이 아직은 그리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지 않으니까.

부하들이 작업을 완료하자, 슥 둘러본 마무르가 내게로 다가와 의문을 표한다.

“전달할 무기는 이걸로 전부입니까?”

“그렇소. 해가 지면 저쪽 배로 옮길 거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배의 저층 갑판에 더 많은 무기가 있는 것을 목격하였어요. 어째서 그 무기들을 아껴두려 하십니까?”

“그것들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증거품들이오.”

“알리바이?”

“이 배는 명목상 수적(水賊) 소탕 의뢰를 받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시체 없이 무기만 가져갈 순 없으니 흑해자당을 잡기는 잡아야 할 테지만, 너무 많이 잡아버리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로서는 과도한 시간낭비도 경계해야 할 바이고. 거점 하나 터는 정도가 최선이겠지.

그러니 여기선 거점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통째로 노획했다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짜는 게 최선이었다. 교전의 증거로 삼을 영상은 자작극으로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 아니면 다른 엽사들을 습격해 몰살시키거나.

그런 의미에서 알 까심이 제조한 무기들은 가장 훌륭한 증거품들이었다.

“적절하지 않습니다.”

마무르가 이의를 제기했다.

“싸장님이 이 갑판에 올려놓은 물건들은 무기가 아닌 보급품의 비중이 너무 큰 것. 그것들의 비중을 줄이고 무기를 더 올려주십시오. 무기가 아닌 보급품도 얼마든지 알리바이를 만들 재료가 될 수 있다. 내 말이 틀립니까?”

마무르가 지목한 건 각종 의약품과 응급처치 도구, 장기보관이 가능한 할랄 식품, 휴대용 위성 통신 시스템, 식수 정화용 수동 필터와 정화제를 포함한 생존용품 등이었다. 설마하니 장인들이 쓸 공구나 선반을 빼라는 소리는 아니었을 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릴라전은 뙤약볕 아래를 달리는 마라톤과 같소. 장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런 보급품들이 필수적이지. 식량처럼 사소한 것도 그렇소. 때로는 그리운 고향음식 하나가 향수병을 막아주는 법이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알라의 전사들은 시련을 겪으면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증명하는 것. 싸장님은 불신자인데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불신자들의 경구를 모릅니까? 모르면 공부하십시오. 좌절감이 싸나이를 키우는 것입니다.”

“……장인들이 전원 각성자였다면 모를까, 비각성자가 대다수인 이상 비전투손실 예방에 힘쓰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오.”

“비전투손실? 천국에 들어가는 건 원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낙오자들은 처음부터 알라의 전사가 될 자격이 없었던 것이에요. 알라의 전사들은 믿음과 정신력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하디스트의 정신력 예찬은 내가 기어이 눈살을 찌푸리도록 만들었다.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소. 당신은 그저 신의 이름으로 서약한 참관인일 뿐. 이 현장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에휴. 성전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지하디스트가 한숨을 내쉰다.

“싸장님 당신은 믿는 자들의 정신력을 모르는 불신자. 싸장님은 훌륭한 상인이긴 하지만, 믿지 않는 자답게 물질적인 정신에 사로잡혀있는 것이에요. 지하드에 대한 이해가 브론즈 레벨이다. 참으로 가엾고 딱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시렁대면서도, 마무르는 더 이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태양이 마침내 수평선에 삼켜져 광활한 호수에 어둠이 찾아오자, 베크룩스는 석탄운반선과의 간격을 더욱 좁혀놓았다. 석벽호표의 유니폼을 벗은 내 부하들은 두 배의 선현에 와이어를 걸어놓고 갑판에서 갑판으로 화물을 이송했다. 여기엔 살아있는 화물인 알 까심의 기술자들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미션 베이에 접이식 크레인이 달려있긴 하나, 각성능력자들이 무더기로 있는 상황에선 그냥 인력을 쓰는 쪽이 빠르고 간편했다. 화물에 검은 색조의 위장막을 씌워 시인성을 최소화했음은 물론이다.

이후엔 석탄운반선에 시동을 걸어 호변의 작은 만 안쪽에 정박시켰다. 예전부터 흑해자당 내에서 활동 중이었던 기술자들이 이쪽과 위성통신으로 협의하여 결정한 좌표에.

배가 닻을 내린 물가는 민가로부터 채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보아하니 이 일대의 마을들이 모조리 흑해자당의 세력권인 모양. 마중을 나온 흑해자당의 안내인은 나와 내 애들, 그리고 파슈툰 기술자들을 자신들의 영지로 이끌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안내인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작은 지옥을 소개했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혁명의 해방구, 중당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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