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국제협력사업 (2)
불가피한 상황만 아니라면, 나는 부하들의 식사에 식도락이 가득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사기관리의 측면에서 그만큼 저렴하고 효과적인 수단도 드문 까닭.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대부분의 식사는 이미 완성된 가공품이나 수입식품 패키지들을 조리하여 간단하게 해결해야 했다. 이유는 하나. 일본 현지의 먹거리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 에히메 현은 해류의 흐름상 후쿠시마발 방사능 오염의 영향을 적게 받는 고장이다. 허나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일은 없을 불황 속에서, 이 지역의 요식업계 종사자들은 원재료의 품질과 생산지에 구애받지 않는 원가절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이는 내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다. 그래도 한 도시의 랜드마크쯤 되는 호텔에서라면 비싼 값을 하는 깨끗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식자재 창고를 채운 재료들에 깃든 정보의 색채는 그 기대를 조용히 접도록 만들었다. 위험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닐지언정, 밥맛이 떨어지기엔 충분할 만큼 진한 방사능 오염의 색채였으니까.
이 도시의 또 다른 랜드마크, 오래된 일본식 성의 천수각이 내려다보이는 객실에서, 성인 남성의 하루치 열량을 깔끔하게 먹어치운 경태는 식사를 마무리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도 참. 뭘 그런 걸 다 신경 쓰십니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그게 그거지요 뭐. 형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때마다 이 김경태는 목이 메는 기분입니다.”
“……그래.”
그냥 그렇다고 해두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은 해를 등지고 조망하는 시가지는 어둑하게 저물어가는 쇠락의 현장이었다. 간판을 내린 점포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번화가는 번화가답지 않게 오가는 이가 적었고, 간혹 가다 마주치는 행인들은 침묵 속에 티가 날 정도로 서로를 경계했다. 그나마 사람이 좀 있구나 싶은 일련종(日蓮宗) 사찰에선 누군가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중이다.
일본 불교는 과거부터 죽음의 관리자로 명성이 높았으므로, 요즘처럼 죽음과 미신이 많아진 시대엔 전통적인 장사가 성업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 너머, 사찰과 바다 사이에 끼어있는 자그마한 공원엔 이 나라에서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노숙자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다. 보나마나 경찰과 주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낮부터 자리를 잡기는 어려웠을 무리. 주눅이 든 채 공연히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본격적으로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눈치 보기를 그만두고 자리싸움을 시작할 것이었다.
불과 수십 미터의 간격이다.
이 수십 미터의 간격을 두고, 금빛 가득한 불전에서는 묫자리 값만 수백만 엔을 헤아릴 값비싼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오늘 하루 몇백 엔짜리 빵이라도 하나 먹었을까 싶은 지저분한 인간들이 잘 자리를 찾고 있으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풍경이란 말인가.
공원과 마주 보는 부둣가엔 녹슨 고깃배들이 줄지어 정박해있었다. 개중 방파제 구석으로 몰아놓은 일부는 오랫동안 조업을 나가지 않은 티가 역력하다. 위험한 바다에서 목숨 걸고 조업을 하느니, 차라리 다른 호구지책을 찾는 게 낫다고 판단한 어민들의 자산일 터.
이 부두로부터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해양관광의 불경기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린 요트 마리나 회사의 전용 접안시설이 존재한다.
구루시마 해협(来島海峡)에 접한 이 접안시설은 내가 로쿠다이메 야마구치구미와의 연줄을 통해 손에 넣은 비밀스러운 예비 정박지의 한 개소였다.
“백 상사로부터 새로 연락이 들어온 것 있나?”
질문을 받은 수연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뇨. 걱정되십니까?”
“조금은.”
도원희와 그 부모를 처리해주고 영입한 인재, 백영훈 상사는 현재 큐슈 남단을 돌아 게이요 제도의 북쪽을 향해 밀수잠수정 초도함을 몰아오는 중이었다. 미뤄졌던 엔진 수급이 이루어지기 무섭게 건조를 완료하고, 빡빡한 일정에 부하들을 갈아 넣다시피 하여 취역시킨 귀중한 배를.
인도네시아에서 큐슈 남방 해역까지는 국제사업부 소속 밀수선이 수중사슬로 견인해주었으므로 우려할 구석이 없었으나, 물살이 빠른 내해에서 같은 짓을 했다간 추돌사고가 터지기 십상이었다. 하여 한참 전부터 잠수정 단독으로 거친 해류를 타고 있었으니, 기다리는 입장에선 못내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잠비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 계획에 들인 공이 얼마란 말인가. 초도함이 취역하기까지 단기간에 백 번의 잠수와 백 번의 부상을 연습했다곤 하나, 잠수정 선원들 중 베테랑이라 할 자는 여전히 백영훈 한 사람뿐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직접 물 밑으로 마중을 나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선원들이 모두 숙련자가 될 때까지 매번 내가 호위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들은 이후로도 이 해로를 수도 없이 오가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긴 호흡으로 심중의 번잡함을 다스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두어 시간 전 마지막으로 들어온 보고는 마쓰야마(松山) 앞바다에 위치한 유리시마(由利島)의 비밀정박지에 들러 가벼운 기능고장을 수리하고 다시 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정박지로부터 최종 목적지인 오쿠노시마(大久野島)까지는 고작 72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체급이 작아 배터리도 작은 잠수정은 속도를 내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엔진을 끄고 해류에 의지해 천천히 흘러오다가, 내가 머무는 도시 북쪽 해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력항해로 전환하여 지그재그로 물살을 거슬러야 하는 항해. 그렇게 해야만 비밀 거점으로 돌아갈 연료를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백 상사가 산출한 예상 소요시간은 무려 아홉 시간이나 되었다. 자정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는 뜻.
그 항해가 끝나기 전에 새로운 연락이 들어온다면 십중팔구는 좋은 소식일 수가 없었다.
경태가 다시 웃는다.
“그러지 마시고, 기분도 환기할 겸 주변 환경도 숙지할 겸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보고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려다보는 것과 돌아보는 것은 체감이 많이 다르니까요.”
주변 환경을 파악해두는 것은 사냥꾼과 사냥감 공통의 미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는?”
“다녀오십시오. 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알았다.”
일을 할 때 심신이 가장 편하다는 녀석에게 정신적인 숨고르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노트북으로 원격사무를 행하는 중이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 해치우는 유형. 그렇게 만들어내는 일들 중엔 무엇 하나 무가치한 것이 없다.
‘참 대단하단 말이야.’
나조차도 일분일초를 가치 있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나날이 심지(心志)가 닳아가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이건만, 수연 이 녀석은 내 앞에 처음 무릎 꿇던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하지를 않았으니, 매번 의식할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이상했던지, 손끝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본 수연이 손을 내리곤 고개를 미미하게 기울이며 묻는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예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눈을 찌푸렸겠지. 그러나 정신적인 긴장상태가 너무 길게 이어지다 보니,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위험한 시기의 가장 충성스러운 두 측근에게 의심이 결여된 믿음을 주고 정도 이상으로 의지하게 된다.
자기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언어로 빚어지기 직전의 심회가 목구멍을 간질이기를 잠시. 나는 나답지 않을 말을 삼키고서 그저 수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말았다.
“수고해라.”
“예.”
수연의 얼굴에 희미한 의아함이 스친다. 그러나 나를 관찰하는 시선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 비서실장은 금세 업무에 대한 집중력을 되찾았다.
나는 경태와 함께 차를 타고 시가지의 주요 장소들을 돌아보았다.
이곳, 시코쿠 서북단의 도시 이마바리는 세토 내해의 여러 섬들을 다리로 이어놓은 시마나미 해도(海道)의 남쪽 끝이었다. 혼슈와 시코쿠 양쪽을 오가며 활동을 하기에 좋은 중간거점이라는 의미. 하여 이 도시에선 국제협력사업으로 파견된 한국인 헌터들을 드문드문 발견할 수 있었다. 침체되어 가던 도시의 상점들이 어설픈 한국어 안내문을 붙여놓은 이유였다.
마법이 돌아오기 전까진 경색일로였던 한일관계는, 지금에 와선 양국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에 힘입어 놀라울 정도로 개선된 상태였다. 일본은 각성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고, 한국은 제도권으로 편입한 잉여 각성자들을 빌려주고 외화를 받아내고자 했다.
이는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변화였다. 나는 작년 말 아베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오른 전(前) 환경대신의 취임사 중 한국과 관련된 대목을 떠올렸다.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이, 우리 정부가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과제는 국민의 안전과 민생의 안정입니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웃이죠. 지금과 같은 때 괜한 자존심 싸움에 집착하는 건 섹시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 매력적이면서도 섹시한 외교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욕받이 신세를 면치 못할 시국에, 다른 정치적 거물들이 하나같이 몸을 사린 결과로써 어부지리로 정부수반 자리에 오른 젊은 정치인.
「한국인들 가운데 다소 못 배우고 무례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한국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죠. 우리는 그들을 쿨하게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앞서나가는 선진대국이니까요. 선진국일수록 쿨하고 후진국일수록 쿨하지 못하다는 건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정치인의 웃기는 취임사는 내 귀엔 욕받이로서의 소명을 다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당장이야 광대 노릇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지금 총리직을 역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거둘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리라는 판단을 내렸겠지.
「듣자니 한국인들은 저라는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굉장히 Fun Fun한 사람이라던가요? 하하! 저 개인의 인기가 양국 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은 사랑이기에 좋은 것이죠. 국민 여러분들께도 제 사랑을 드리는 바입니다.」
이 신임 총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벽 행세를 제대로 해내며 대중의 반대가 극심한, 그러나 필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정책과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중이었다. 사실상 다음 총리를 위한 밑거름을 뿌려주는 과정이나 마찬가지.
신임 총리의 외교정책은 당연히 보수 여론의 극심한 반발을 샀으나, 그것도 지금은 잠잠해진 상태다. 러시아와 중국 땅을 오가던 「쁘리즈라크」가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에 상륙한 탓이었다. 이 악명 높은 식인괴물의 은밀한 이동능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일본 열도 전체가 위험해진 셈.
웅웅-
진동하는 핸드폰이 상념을 일깨운다. 수연이 보낸 문자를 확인한 나는 미간에 가볍게 주름을 잡았다.
“이만 돌아가자.”
“옙.”
경태가 대답하고 운전석의 부하가 핸들을 꺾는다.
호텔로 복귀하니 수연 녀석은 최상급으로 암호화된 통화를 위한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나는 화상통화용 카메라 앞에 앉아 수연에게 물었다.
“바로 연결 가능한가?”
“예. 저쪽에선 아까부터 줄곧 대기 중이었습니다.”
대기 중인 상대는 ‘아름다움의 아버지’ 「아부 알 까심」이었다. 저가 먼저 대화를 희망해놓고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감감무소식이었던 무례한 늙은이.
미룬 시간이 시간인 만큼, 단순히 기 싸움을 벌이려고 기다리게 만든 건 아닐 터이다. 결례가 지나쳐 이쪽에 약점을 만들어주는 수준이니까. 그러므로 뭔가 사정이 있기는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 한들 아무런 귀띔도 해주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른 내가 변조한 목소리를 시험한 뒤 눈짓으로 신호를 주자, 비서실 소속의 부하가 파키스탄 북서부로 이어지는 화상통화를 연결했다.
정면의 모니터에 등장한 노년의 공장장에게, 나는 조금 언짢은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당신에게 알라의 평화가 있기를. 처음 뵙겠습니다, 아부 알 까심.”
「그대에게도 알라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이렇게라도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우리 부족의 이름 모를 친구여.」
“오마르 알 바시르라고 부르십시오, 아부 알 까심.”
「오마르 알 바시르……. 괜찮은 이름이구려.」
오마르는 오래 사는 자, 알 바시르는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뜻이다. 알라쟁이들과 일을 하려면 그들에게 친숙한 가명을 쓰는 편이 좋겠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위장신분이기도 하고.
나는 푸른 눈의 총기장인과 시선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