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06화 (206/561)

#23. ⅮⅩⅭⅥ (5)

나는 후각에 새긴 냄새를 좇아 초록으로 덧칠된 백색의 마경을 가로질렀다.

곳곳에 존재하는 탐험가들의 유해는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흩어져있는 정도가 심했다. 정말 심한 경우엔 두개골 하나만 달랑 굴러다니고 있을 지경. 단순히 시체를 분해하는 마법적 인력만으로는 이 같은 분산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필시 숲 자체가 움직이면서 빚어낸 현상일 테지. 세계 최대 최강의 자연각성체로서, 전율하는 거인은 일반적인 식물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며 광범위한 운동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일반적인 동물 수준으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는지.

그 말은 즉 탐험가들의 시체를 지표로 삼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에베레스트 같은 오지에서는 사망한 자리에 방치된 시체들이 후발주자들을 위한 이정표가 되어주지만, 이 숲에서 같은 걸 기대했다간 미궁의 미아가 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마력회로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고 그 가변성의 범위를 추산하는 게 가능한 고위 마법사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탐험가들이 시행착오로 축적하는 경험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터.

그러므로 그 경험의 유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탐험을 통한 정보갱신이 불가피하다. 정보의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업데이트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마경탐사의 후원자들이 사람의 목숨을 통시적으로 갈아 넣어야 하는 이유였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숲이 지배하는 안개는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옅어졌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햇빛이 투명하게 쏟아지는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는 점. 습한 공기는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열을 머금어 광합성에 필요한 온도를 유지했다.

슈르르르-

강화된 청각에 안개가 바람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관절 높이로 넘실거리며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기이한 안개의 급류는, 이 거대한 숲이 고지대의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지대에선 한창 봄이 무르익고 있겠으나, 해발 8천 피트가 넘는 이곳은 아직 해가 지고 나면 영하의 추위가 찾아오는 땅이다. 그러니 어두워지기 전에 여린 새순들 위로 안개의 이불을 덮어줘야 하는 것.

구불구불 굽이치는 경로를 따라 계속해서 가짜 수녀의 체취를 따르던 나는, 머리 위에 감돌던 노을의 빛이 서서히 푸른색으로 변색될 즈음, 전율하는 거인의 힘에 뒤틀려 수직 방향의 낙차가 생긴 거친 지형에 도달했다.

땅의 굴곡이 유독 이 부근에서만 극심하게 일그러져있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불사암.

거인이 자신의 일부를 분리·파괴하여 불사암의 확산을 저지한 흔적은, 대마법사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강대한 마법적 폭력의 지문이었다. 높게는 수관의 끄트머리에서부터 낮게는 땅속의 병든 뿌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박살을 내놓은 난폭한 힘.

그 힘의 작용은 도무지 지구의 것이 아닌 듯한 입체적인 지형을 만들어놓았다. 가짜 수녀 이외의 인간은 발을 들인 흔적이 없는 미답의 영역.

나는 형태를 유지하며 숯이 되어버린 지저의 뿌리들을 보며 생각했다.

‘대단해. 수천 제곱미터 범위의 토양을 수십 미터 깊이에서부터 구워버렸군.’

아무리 전율하는 거인이라도 초대형 불사암 덩어리의 마력장을 중화하진 못했겠으나, 땅 전체를 마력의 불로 가열하는 식이면 간접적인 열만으로도 불사암을 파괴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화력을 얼마나 끌어올렸으면 유리화된 토양마저 눈에 띌까.

이만한 규모의 마법이 행사되었다 함은, 거인이 지닌 인지 네트워크가 높은 비율로 이곳의 문제를 인식했다는 의미일 터.

과연 여기엔 분산된 지성의 몇 퍼센트가 집중되었던 것일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파륵, 파르르륵-!

허공에서 마력을 태우는 불의 커튼이 일렁인다. 겉보기만으로는 격렬하게 일렁이는 오로라라고 해도 좋겠다. 간헐적으로 격렬하게 타오르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도깨비불은 어두워지는 시간의 온도 유지를 위한 방편일 터. 적당한 크기의 불을 켜놓고 유지하지 못하는 건 정교함이 떨어지는 술식 운용능력의 한계일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대기의 온도를 느끼는 감각의 한계도 지분이 있을 것이고.

나는 땅속으로 비스듬하게 뚫린 동혈을 따라 내려갔다.

가짜 마녀의 은신처는 지표로부터 약 40미터를 아래로 파고든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허.”

예상보다 훨씬 더 본격적인 생활감이 녹아있는 공간이다. 인위적인 굴착과 마감이 더해진 벽면은 잘 구워진 도자기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웠으며, 창문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가정집과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집기의 종류는 매우 제한적이다. 보이는 거라곤 패스파인더들이 휴대할 법한 비상식량과 생존 및 탐험용품들이 고작.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가짜 마녀가 숲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에 힘을 실어주는 광경이었다.

거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간엔 아기자기한 음각을 넣은 벽난로가 하나 박혀있었다. 난로 안쪽엔 장작을 땐 흔적이 남아있다. 은신처를 꾸며놓은 모습으로 미루어, 이 벽난로는 다분히 정서적인 동기로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싶다. 벽난로 옆엔 마른 장작이 쌓여있고, 맞은편엔 나무를 깎아 만든 안락의자가 놓여있다.

벽난로에서 발생하는 연기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지상으로 흘러나가게끔 만든 구조였다. 지형의 복잡성과 야간의 환경을 고려하면 흩어진 연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벽난로 테두리에 새겨진 음각은 장난스러운 요정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마녀의 복제체에겐 어울리지 않는 동화적인 감수성. 심지어 선반 위엔 손수 만들었을 인형들이 놓여있다. 재료는 아마도 침낭의 솜털과 탐험가들의 옷으로부터 얻었겠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다.

침실에 해당하는 방으로 가니 솜씨 좋게 만든 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머리맡 수납장엔 사진들이 담긴 상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상자 속의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아빠,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뒷면에 이렇게 적힌 사진의 주인공은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아였다. 병원 침대 위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많이 여위고 아파 보이는 환자복 차림의 소녀.

이어서 꺼내는 사진마다 찍힌 사람이 다 제각각인 것을 보건대, 그레이스의 닮은꼴은 죽은 탐험가들이 가지고 있던 가족사진을 주워서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대체 이것들을 뭐 하러 긁어모은 것인지…….

그래도 은신처를 찾느라 시간을 들인 보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나는 과하게 푹신한 침대 모서리에 앉아, 가짜 마녀가 베개 아래 넣어둔 노트를 펼쳐들었다.

노트의 주된 내용은 마녀 닮은꼴이 작성했을 마경의 지도와 거인의 회로도였다. 가짜 마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어서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쁜 수확은 아니다. 시력이 탁월한 나조차 직접 거인의 뱃속을 거닐지 않고선 얻지 못할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한 연구였으니까. 예의 그 마력 나침반을 가지고 정밀계측을 거듭해온 모양인데, 이 정도면 내가 만들더라도 열흘 이상은 들어갈 법한 자료였다.

마녀 닮은꼴의 도피생활이 최소 수 개월 넘게 계속되었음을 암시하는 간접적인 물증이라 하겠다.

‘일전의 조우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이거지…….’

언젠가 파이오니어 사냥꾼 여단의 헬기를 타고 멧돼지를 잡으러 나섰을 때,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다보는 지상에서 멀지 않은 풍경으로 스쳐지나갔던 그레이스의 모습. 그때는 당연히 그레이스 본인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제 와 돌이켜보면 기만용으로 돌아다니는 복제체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건 과연 몇 번째의 대역이었을까? 혹시 그날 보았던 게 오늘 죽은 「596번」이지는 않을까?

팔락팔락. 풀리지 않는 의문을 미뤄두고 계속해서 넘겨보는 페이지. 종이에 적거나 인쇄한 정보는 다른 매체에 비해 시각적인 부담이 덜해서 좋다. 가짜 마녀가 본인의 생존성 향상을 위해 수집했을 지식들이 흡족함을 선사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공간굴절이 발생했을 때 거인의 회로에 마력이 어떻게 흘렀는가를 적어놓은 부분이다. 비록 국지적이고 불완전한 관측이긴 했으되, 내게는 시간 낭비를 줄여줄 단서의 덩어리 같은 자료였다. 항상 가용시간 부족이 아쉬운 입장에선 고맙다는 생각이 들 지경.

그레이스-596의 죽음이 새삼스럽게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그녀가 제 ‘어머니’와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내게는 아주 좋은 협력자가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피난처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연각성체 관측정보를 수집하는 역할만 맡겨도 남는 장사가 되었을 게 아닌가. 그레이스에 대한 정보 획득은 기본이다.

장기적으로는 세뇌를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터. 위태로운 정신을 살살 무너뜨려가며 나에 대한 의존과 충성을 심어 원탁을 상대로도 유효한 예비전력이자 기만체로 삼았다면, 내겐 그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다시없었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아쉬움일 따름이지만.

내 가설이 옳다는 전제하에, 그레이스의 대역들은 단순한 대역이 아니다. 자연각성자 이상 대마법사 미만인 마법사들의 전투단이지. 그레이스-596의 예를 보건대, 머릿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들의 평균적인 마법적 수준만큼은 내가 손수 회로를 열어준 내 부하들보다 우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내게 결코 좋은 이야기가 못되었다. 나는 그저 596이 특별히 공이 들어간 고급인형이기를 바랄 뿐.

하다못해 그레이스-596의 정신적 위태로움이 다른 인형들에게도 흔한 증상이라면, 그레이스와 나의 세력비가 그렇게까지 불균형하진 않을 것이다.

“…….”

노트를 덮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묵직한 부담감으로 화하여 명치 언저리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기대를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처지라니. 이렇게 좆같을 수가 있나…….

오랜 세월 원탁에 대적해온 마녀의 저력이 만만하리라 예상한 건 아니지만, 복제체의 존재 따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오늘은 여기서 숙영해야겠군.’

왠지 모르게 은근한 불쾌함을 주는 공간이긴 하나, 이렇게 잘 만들어진 은신처를 두고 굳이 야지에서 잠을 청할 이유가 없다. 596이 남긴 기록을 숙지·분석하다가 시간이 되면 자리에 누워야지. 그럼으로써 내일의 탐사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휴대용 위성 단말의 안테나 케이블을 바깥까지 끌어다놓으면 외부에서 대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방관자가 될 염려도 없다.

잘 준비를 다 해놓고 노트를 반복하여 읽고 또 읽던 나는, 피로가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할 즈음, 그레이스-596의 수제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한참을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순 없었다. 생명술식을 활용한 신체제어로 인위적인 수면도입에 익숙해진 나인데도, 눈꺼풀 안쪽만 뜨겁고 뻐근해질 뿐 기이할 정도로 잠이 오질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냄새가 거슬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침대에 배어있는 가짜 인형의 체취가 점점 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각의 민감도를 떨어뜨려도 변함없이 코끝을 맴도는 진한 인간의 냄새.

이상한 일이다. 마음에 근심이 있기 때문인가?

“망할…….”

푹신한 침대를 포기하고 일어나니, 천장에 매달린 모빌 하나가 이제 와서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모빌을 힘으로 뜯어 내팽개친 나는, 거실로 나와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마력으로 불을 지폈다. 장작 타는 향이 부드럽게 번지며 후각적인 불쾌감을 희석시켜주었다.

다음으로는 안락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잠을 청했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평소와 같은 수면유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잠든 보람도 없이, 나는 밤새도록 끈질긴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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