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05화 (205/561)

#23. ⅮⅩⅭⅥ (4)

노리쇠를 후퇴시킨 수녀가 녹슨 소총의 약실을 염동력으로 갈아내다시피 긁어낸다. 난폭하게 배출되는 탄피조각들. 발화술식을 활용한 불발탄 처리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곳에 정확하게 공간좌표를 잡아 마력을 투사하는 솜씨는 자연각성능력자에겐 불가능한 기교였다.

그러나 투시력이 없는 수녀는 총강을 틀어막은 파편을 보지 못했다. 노리쇠를 전진시켜 차탄을 장전하고는, 눈시울이 붉은 눈으로 내게 총구를 겨냥할 따름.

그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파캉-!

“아악!”

박살난 쇳조각들이 수녀의 얼굴 4분의 1을 긁어놓는다. 평범한 돌격소총이었다면 모를까, 그보다 배 이상 강력한 탄종을 쓰는 수렵용 자동소총의 내부폭발은 본체 프레임을 찢어발기고 사수의 안구를 파열시키기에 충분한 사고였다. 날카롭게 벌어진 상부 리시버, 균열이 생긴 노리쇠뭉치와 아래로 터져나간 탄창 등이 폭발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른쪽 눈을 상실한 수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뒹굴었다. 얼굴을 감싼 두 손 사이로, 묽고 투명한 유리체(琉璃體)가 붉은 피와 뒤섞여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헉헉대는 수녀가 간신히 몸을 가누었을 때, 나는 이미 치명적인 거리에서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상태였다.

“움직이지 마.”

가쁜 호흡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내뱉는 경고. 수녀의 한쪽만 남은 눈이 공포를 담아 나를 응시했다. 혈색이 싹 빠져 푸른 기운이 감도는 얼굴. 따닥따닥 부딪히는 이빨. 정상인이라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만큼 체온이 낮다.

‘이거, 정상적인 사고는 가능한 상태인가?’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는 마력장의 경계는 나보다 수녀 쪽으로 가깝게 편향되어 있었다. 피차 전개하고 있는 마력장의 반경이 비슷한 상황에, 이는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수녀가 지닌 회로의 밀도-또는 처리능력-가 내게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주인의 상태가 회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여기서 말하는 주인의 상태는 육체와 정신 양쪽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력장을 줄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숲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명」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벅차보였고, 수녀 스스로 더 이상의 출혈을 막지 않으면 취조고 뭐고 시도조차 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그레이스, 맞나?”

마녀의 이름을 들은 수녀는 거친 발작을 일으켰다.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아아아!”

그러더니 서러운 울음을 터트린다. 통제를 벗어나 흔들리는 마력장. 이에 따라 「생명」의 운용도 위태로워진다.

“싫어! 싫어어어엇! 더 이상은 싫단 말이야! 제발 저를 놔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어머니……. 우리 가족, 저 하나쯤은 없어져도 괜찮잖아요…….”

……어머니? 우리 가족?

뭔가 착란의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다. 내가 총을 겨누고 있거나 말거나,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네발로 기어 달아나려 드는 가짜 수녀. 눈을 찌푸린 나는 정신이 혼탁한 수녀의 발목을 밟아 으스러뜨리고 등짝을 걷어차 엎어지도록 만들었다. 버둥거리는 몸통을 무릎으로 짓누르며, 뒤통수를 총구로 찍어 피투성이인 낯짝을 지면에 처박아준다.

얼굴을 땅에 비비며 흐느끼던 수녀는, 고개를 돌려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어 창백한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서늘한 음성.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아.”

허윽! 억압되어 있던 수녀의 마력장이 팽창하는가 싶더니, 급격한 마소의 유입과 함께 몸이 비정상적인 힘으로 휘어진다.

“꺼윽, 끅, 끄흐으아가가가각!”

눈을 희게 까뒤집고 왈칵 피를 토해내는 수녀.

“이런……!”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려다 말고 총을 내팽개친 나는, 사냥감이 입은 수녀복을 급하게 힘으로 찢어버렸다. 최소 아티팩트(Artefact) 이상일 게 분명한 옷이었지만 수녀의 죽음을 막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옷이 찢어지자 이제껏 불투명했던 마력회로가 눈에 들어온다. 폭주하는 마력이 회로 곳곳을 파열시키는 중. 난 이 파괴적인 작용을 강제로 멈춰보려 시도했으나, 경태나 수연 정도의 능력자가 상대여도 어려울 일을 이 수녀를 상대로 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 체중 아래에서 세차게 펄떡이던 수녀의 몸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축 늘어진 한 구의 시체가 되어버렸다.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피. 마력 운용이 일정 경지 이상인 마법사에게나 가능할 마법적 자살이다.

크고 이질적인 마력장의 출현에 탐색 패턴으로 돌입했던 숲의 마력은, 수녀의 죽음과 함께 마력장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잔잔한 물결로 가라앉았다. 내가 수녀의 마력운용에 간섭하여 시간을 끌었다면 무방비한 상태로 숲의 공격을 받았을 터. 아까는 급한 마음에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

염병할.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과 허탈함을 억눌렀다. 결국 무슨 수를 써도 막지 못할 죽음이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군.

헝클어지려는 머릿속을 의식적으로 다잡으며, 나는 숨을 거둔 수녀 곁에 꿇어앉았다. 내가 제한적으로나마 마력장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시체가 눈앞에서 숲의 인력에 분해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철 포플러 나무 줄기처럼 새하얀 등짝엔 새까만 역십자가와 역칠망성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신격 72문자를 역순으로 두른 칠망성 아래엔 열두 겹 방사형(放射形) 천사의 날개 사이로 로마 숫자 하나가 보인다.

「ⅮⅩⅭⅥ」

아라비아 숫자로는 596.

이 숫자를 입안에서 굴려보기를 잠시. 설마 싶은 가설 하나가 뇌리를 스친다.

‘피로 이어진 대역……인가?’

이 여자는 죽기 전에 어머니와 가족을 입에 담았었다. 만약 어머니가 그레이스를 뜻하는 것이었고, 가족은 그레이스가 낳은 자식들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아무리 피로 이어진 자식이라도 이렇게까지 그레이스 본인을 빼닮을 순 없다. 그러나 그 미친 마녀가 「생명」을 응용하여 자신의 유전자만으로 태아를 빚는 데 성공했다 치면, 육체적으로는 본인의 복제체나 마찬가지인 자식을 생산하는 게 가능하다.

이보다 더 정교할 수가 없는 생체적 기만수단.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596은 추적자들에게 혼란을 줄 목적으로 찍어놓은 생산번호일 가능성이 높았다. 적을 교란하고자 부대 번호나 군함 함번 따위를 의도적으로 부풀려 부여하는 건, 적어도 군사 분야에서는 흔히 쓰이는 기만책이었으니까. 원탁과 오래도록 전쟁을 치러온 마녀라면 당연히 생각할 방편이겠지.

그러나 이 가설엔 몇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

본인의 생체자원을 활용한 처녀생식(Parthenogenesis)이야 내가 아는 생명술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범위에 든다. 그러나 마법이 돌아온 후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완전히 성숙한 복제체가 돌아다닌다는 건 명백히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생명술식을 응용·개량하여 성장을 가속시킬 방법을 찾았을 수는 있겠지. 인체의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용을 역으로 뒤집는 게 까다로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렇다 한들 설명이 되는 건 육체적인 성장뿐. 정신적인 성장은 분야가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다.

여기 죽어있는 여자는 단순히 몸만 커다란 아기가 아니었다. 비록 최후의 순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언행을 보여주었으되, 이미 여기까지 쫓아오는 과정에서 성숙한 정신과 전투경험을 보유한 마법사의 면모를 목격한 바 있으므로. 마법사로서의 지식도 지식이지만, 전투경험은 일정 기간 이상의 실전적 훈련 없이는 얻을 방법이 없는 자산이다.

진정한 대마법사엔 미치지 못할지언정, 자연각성능력자들은 압도적으로 능가할 마력회로의 구성도 의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타인에게 정교한 회로를 새겨줄 만한 환경이 못 되잖은가.

‘황금기의 눈과 인형술사의 제례검을 가진 나조차도 한계가 뚜렷한 마당에…….’

그러므로 이 여자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마녀 그레이스가 마법이 돌아오기 이전부터 키워낸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마소가 고갈된 세상에서도 인간의 영혼을 갈아 마력을 쥐어짜는 일은 가능했으니, 살아있는 제물 수십 명쯤을 영적으로 갈아죽였다면 처녀생식에 쓸 마력이 부족하진 않았겠지.

그러나 이 경우에도 출산을 촉진하는 데 들어갈 마력은 별개로 조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적령기에 도달한 복제체를 대량으로 준비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원탁의 추적으로부터 끊임없이 숨고 달아나야 하는 처지인 그레이스가 임신부의 불편한 몸을 달가워했을 리도 없다.

이처럼 이익에 비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크니, 마녀는 어떻게든 임신기간을 줄이려고 시도했을 터. 임신기간의 마법적 단축은 그 날짜에 비례하는 규모의 산 제물을 소모한다.

요컨대 이 「ⅮⅩⅭⅥ」가 교란용 생산번호로써 의미를 얻으려면, 그러니까 못해도 두 자릿수의 대역이 준비되어있으려면, 최소 소도시 하나에 해당하는 인구를 제물로 희생시켰으리라고 가정해야 하는 것.

한데, 그만한 규모의 인신공양을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고서 진행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칠각기사단 「O7A」의 저력이 그렇게나 대단했다고?

설마하니 인공자궁 같은 미완의 기술을 사용한 건 아닐 테고…….

「ⅮⅩⅭⅥ」가 내 짐작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긴 해야겠지.

나는 식어가는 시체의 소지품을 살펴보았다. 마력이 깃든 물건이라곤 묵주(Rosary) 하나에 나침반 하나가 있을 뿐. 그 외엔 총기 결속용 고리와 탄창주머니가 결합된 허리띠, 금이 간 손목시계, 허벅지에 고정시킨 홀스터 및 샷건 탄약 벨트(Shell belt) 정도가 전부였다.

잘그락-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묵주엔 「열화(熱化)」의 코드가 내장되어 있었다. 「발화」와는 다른 원리로 빛과 열을 자아내는 마법. 그러나 일단 사거리가 길지 않고, 「생명」에 버금갈 만큼 회로 점유율이 높으며, 효과에 비해 마력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 채찍의 형태로 한 번 써보고 말았던 술식이다. 그걸로 스승새끼의 유해를 후려치고 말았었지.

눈앞의 묵주는 그런 저효율 저연비 술식의 활용을 보조하는 외장형 연산장치 같은 물건이었다. 회로에 걸리는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술식구축의 속도를 향상시키는 그런 물건. 은빛 십자가 내부엔 자그마한 뼛조각이 하나 박혀있다.

앤티쿼티……까지는 못 되겠군.

그러나 아티팩트(Artefact) 중에선 최상급이라 할 만하겠다. 이 여자가 추격전 도중 굳이 「열화」를 사용한 이유가 있었던 셈.

목제 케이스에 순금의 원판과 바늘을 넣은 나침반은 마력의 흐름을 정교하게 측정하는 도구였다. 하나의 중심을 두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는 다중 구조의 원판엔 각각의 레이어마다 세밀한 눈금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는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에 대하여 거리에 따른 마력의 강도와 흐름을 독립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바늘은 측정범위 내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마력을 추적하도록 만들어졌다.

내게는 쓸모가 없을지라도 부하들에게 들려주기는 좋겠다. 나 없이 험지를 돌파하는 데 도움을 줄 터. 이 정도면 원리와 제조법을 연구해볼 가치가 있으리라. 다른 일들과 비교해 우선순위를 따져봐야 할 테지만.

힘으로 찢어버린 수녀복은 손상이 심하여 코드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살리지도 못할 여자였으니,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뒀으면 온전한 옷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이런저런 물건들을 배낭에 쑤셔 박은 나는, 죽은 수녀의 지문을 확보하고 한 줌의 머리카락을 잘라낸 다음, 마지막으로 후각을 강화한 뒤 예민해진 코를 시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창백한 피부에 대고 깊게 들이마시는 망자의 체취엔 양질의 정보들이 녹아있었다.

‘이 숲에서의 생활이 꽤 길었던 모양인데.’

안개 자욱한 포플러 숲 특유의 냄새가 시체의 살갗 깊숙이까지 배어있다. 데오도란트나 비누 등 위생용품의 향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땀과 습기와 기름기로 눅눅한 머리칼에선 나무를 태울 때 날 법한 매캐한 향이 난다. 거인의 뱃속에서 살아있는 포플러 줄기에 불을 지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일. 만약 죽은 나무들을 모아 장작으로 쓴 거라면, 빛과 연기를 걱정하지 않고서 불을 피울 만한 은신처가 있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

상당 기간 물로만 몸을 씻은 듯한 인간의 악취는 추적을 시도해보기에 충분한 단서였다. 나는 이 그레이스 닮은꼴이 숲속에 남겨두었을 생활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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