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04화 (204/561)

#23. ⅮⅩⅭⅥ (3)

혹시 의도적인 접근인가?

그렇다 치면, 다가오는 것들의 정체는 제국주의자들이 깔아둔 첨병이 아닐까?

만약 원탁의 첨병 새끼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경우, 내가 숲의 마법을 시험할 당시 비정상적으로 길게 번뜩였던 전광의 빛을 보았을 터. 방전의 소음은 안개에 삼켜졌을지언정 빛은 그보다 더 멀리까지 확산되었을 테니.

그렇다면 그들이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고서 접근해올 개연성은 충분한 셈이다. 과연 여기 있는 게 절연방화 방호복을 착용한 패스파인더 일행일지, 아니면 남몰래 거인의 영혼을 관측하러 온 도망자 신세의 대마법사일지를 확인해보고자.

그러다가 길을 잘못 찾아 사지로 들어섰다, 같은 이야기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2천 7백 에이커 규모의 숲에서 그런 식의 우연한 조우가 성립할 확률이 얼마나 높겠느냐만, 그럴 공산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면 대답은 “있다.”가 되어야겠지.

나는 요격과 매복을 염두에 두고 마력장의 반경을 축소했다. 각성능력자의 감각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숲의 탐색을 피하기 위함이다.

거인이 펼치는 영적 감각의 그물. 그 그물의 그물눈보다 작은 마력장만을 전개한 채 통과하는 여러 개의 위험한 길목들. 그러다 종종 마주치게 되는, 비각성자의 영혼마저 감지할 만큼 거인의 감각이 조밀해지는 구간은 오직 시력으로 더듬으며 돌아서 지나간다.

마력장의 반경을 조절해가며 조용히 이동하기를 십 분여. 나는 신선한 피를 흘리는 시체들이 한창 숲의 양분으로 흡수되고 있는 현장에 도달했다.

쯧…….

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숲의 분해 능력이 워낙 탁월하다 보니, 시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가 큰 폭으로 감소한 상태였던 까닭이다. 각성수 분포 밀도가 어지간히 높은 숲에서도 이 정도 빠르기의 분해는 찾아볼 수가 없다. 미지근한 온도의 시체들이 온갖 방향으로 갈라져 끌려가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전율하는 거인의 식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힘든 걸음을 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마력장을 줄인 채 뛰어온 탓에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나는 뼈에 남은 흔적들과 시체들의 간격, 바닥에 찍힌 발자국, 파손되지 않고 남은 한 줌의 소지품, 공기 중에 감도는 냄새 등을 토대로 집단 몰살이 이루어진 과정을 재구성해보았다. 각각의 사인, 사망 순서, 엄폐의 효율성, 이동방향과 대형, 그리고 죽기 직전에 어느 방향을 보고 있었는지…….

‘이만한 중무장 인원들이 파견되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야.’

이들이 정부나 연구기관의 의뢰를 받아 들어온 탐험대였다면 무장의 수준은 일정 선에서 억제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은 머릿수가 많을뿐더러 휴대한 무장과 장구류의 수준도 어지간한 군대를 능가했다.

이들이 설마하니 전율하는 거인과 싸우려고 무기를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다. 추정중량이 17만 톤까지 증가한 포플러 클러스터를 상대로 일반적인 총화기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화기의 구경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전율하는 거인을 상대로는 의미가 없다. 총구에 끼워놓은 소음기는 더더욱 그러하고.

여기저기 남아있는 교전의 흔적으로 미루어 결국 나를 노리고 접근한 무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명백히 누군가를 잡아 죽이려고 온 인간사냥꾼들이었다. 이들이 사지에 발을 들인 건 단순한 실수가 아닐 테지.

전투 흔적을 더듬으며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어두던 내 귓가에, 돌연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작-!

“……!”

살아남은 놈이 있었나?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살핀 나는, 안개 속 하얀 나무줄기들 사이에서 뒤돌아 도망치는 검은 실루엣을 포착했다.

영혼이 있는 생물체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최소한의 마력장조차 없는, 살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윤곽. 삼라만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시야에서조차, 도주하는 인간의 윤곽 안쪽은 통상시야와 다를 바 없는 까만 불투명함이었다.

나는 단 한 번 저것과 꼭 닮은 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황금기의 눈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었던 불투명함을.

그레이스.

내가 뭐라고 외쳐보기도 전에, 눈앞으로 섬광폭음탄과 파편수류탄의 조합이 강속구처럼 날아들었다. 한 걸음에 오륙 미터씩을 뛰어서 달리는 도망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어깨를 넘겨 집어던진 것들이었다. 안전핀을 뽑는 대신 발화술식으로 점화시킨 신관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던 나는 순간적으로 마력장을 팽창시켜 발화억제를 활성화했다. 투툭. 맥없이 떨어지는 섬광탄 하나에 수류탄 하나. 펼쳤던 마력장을 신속히 거두어 거인의 감지를 회피한 나는, 공격을 간단히 무력화한 것과 별개로 묵직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저 도망자의 정체가 그레이스라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지간한 원탁의 마스터쯤은 실력으로 찍어 누를 여자가 나 하나를 상대로 도망을 택한다니? 내게서 심상찮은 존재감을 감지했어도 어딘가 석연치 못한 상황이었다.

난 숲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마자 도망자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멈춰! 대화를 하자! 나는 네 적이 아니다!”

옆이 트인 수녀복 자락을 나풀거리며 도주에 가속을 붙이던 도망자는, 내 외침에 대하여 한마디 날카로운 욕설로 대꾸했다.

“좆까!”

“…….”

그래. 먼저 반죽음으로 만들어놓고 대화를 해도 무방하겠지. 그러는 편이 더 안전하기도 할 테고, 무작정 쫓아가다 함정에 빠지는 수도 있을 터.

투투투투퉁!

달리면서 조정간을 연사로 놓고 갈기는 완전자동사격에, 멀어지던 도망자의 신형이 휘청 흐트러진다. 농밀한 안개 속에서 튀어 오르는 한 줄기의 선혈. 그리고 비명.

“악!”

짧고 가느다란 이 비명은 악명 높은 마녀가 내지른 것 치고 너무나도 연약한 느낌이었다.

‘대체 뭐지, 저건?’

그렇다. ‘저것’ 외엔 대체할 표현이 없다. 나는 의심을 품은 채로 추격을 이어나갔다.

어깨를 관통당한 사냥감은 이제 마력장을 전개하여 마소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제껏 마력장이 보이지 않았던 건 그저 존재감을 감추고자 억제해 놓은 것이었던 모양. 그럼에도 마력장의 중심엔 여전히 까맣고 불투명한 공허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총탄에 관통당한 곳에서 희미한 광채가 일렁이기는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은폐마법이다.

사냥감이 도주하는 속도는 여간한 각성자의 전력질주를 능가했다. 게다가 이 주변에 깔린 숲의 회로구조를 숙지하고 있는지, 이런저런 엄폐물들을 잘도 이용하는 건 물론이고, 구간에 따라 마력장의 반경을 늘리고 줄여가며 능란한 솜씨로 거인의 감각을 교란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게서 벗어나기 어렵다.

투투투퉁!

내 이번 사격은 사냥감의 도주방향으로 뻗어나가 포플러의 가느다란 줄기들을 부러뜨렸다. 부러진 가지들이 비산하고, 그에 붙어있던 이파리들이 흩뿌려지는 찰나, 근방에 깔린 숲의 회로가 한순간 불타오르듯 발광했다.

“크읏-!”

도망자의 가녀린 체구가 강렬한 바람에 흔들린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갈긴 아음속 철갑탄 세례에서 또 한 발의 명중탄이 나왔다. 옆구리가 찢어진 표적은 달리던 관성을 죽이지 못해 요란한 기세로 바닥을 굴렀다.

콰앙!

내 것과는 결이 다른 총성이 울린다. 구르는 와중, 수녀복의 치맛자락 안쪽으로부터 짤막한 더블배럴 샷건을 뽑아든 표적의 반격. 정면으로 돌린 바이올린 케이스가 따다다닥 소리를 내며 산탄 알갱이들을 튕겨냈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마력을 머금은 알갱이들. 이는 즉 알갱이 하나마다 사람의 영혼 하나를 갈아 넣었음을 의미한다.

산탄 알갱이에 부여된 마법은 염동 중화였다. 방탄 케이스를 방패삼지 않았다면, 거인의 뱃속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약화된 염동력만 가지고선 완전한 방어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만드는 데 걸렸을 시간을 고려하면 효과 대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산탄 한 발당 대마법사의 인시(人時)가 적어도 한 시간 남짓씩은 들어갈 텐데, 그렇다고 무슨 결전병기급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니.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이딴 탄환을 만들어 쓸 이유가 없다.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멀리 노려보는 사냥감의 낯짝은 분명한 마녀의 얼굴이었다. 나는 위험한 싸움의 와중에도 한층 더 깊어지는 의혹을 느꼈다.

‘정말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아니면 혹시 이중인격?’

철컥! 카카카카캉! 사냥감이 허벅지로부터 새로 뽑아든 보조무장은 극단적으로 길이를 줄여놓은 러시아제 돌격소총이었다. 개머리판은 아예 없고 총열은 반 이상을 쳐내버린 물건. 이런 물건인데도 각성능력자의 완력으로 반동을 제어하니 실전적인 명중률이 나온다.

난사에 더해지는 사냥감의 절규.

“나를 좀 그냥 내버려둬, 사생아 새끼들아!”

말은 거칠지언정 억양만큼은 귀족적인 영어다.

그러나 내용은 영문을 모르겠다. 사생아 새끼들이라. 대체 나를 어디 소속이라 여기고 있는 것인지.

단일개체로서의 숲이 발휘하는 강대한 장악력 아래, 나와 사냥감의 교전은 자연히 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기는 한지 의심스러운 수녀는, 사격의 틈새에 공격용 술식을 섞어 이쪽을 교란하려 들었다.

퍼엉-!

안개 속에서 주홍빛 섬광이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본디 술식으로 묶여 직선으로 쏘아져 들어오던 열화(熱化) 발사체가, 내 마력장의 경계를 넘어오는 즉시 술식으로서의 구속력을 잃고 붕괴해버린 탓. 그러나 붕괴하는 과정에서 내뿜는 빛과 열만으로도 통상시야를 교란하기엔 충분했다.

무가치한 수작질이다. 통상시야에 국한된 빛의 잔상은 내 조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투투퉁!

화끈한 복사열을 견디며 가하는 총질에 또다시 울려 퍼지는 가냘픈 비명. 이쪽의 시야를 교란했다고 믿고 몸을 굴려 상반신을 노출시켰을 수녀는, 기껏 「생명」으로 아물어가던 어깨가 터져 숨을 헐떡이며 엄폐물 뒤로 엎드렸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 아래,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엔 고통과 분노와 절망이 가득하다.

카카카캉-!

황금기의 눈이 총격전에서 제공하는 이점 중 하나는 적의 탄창에 남은 잔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녀가 총만 내밀어 가하는 제압사격이 틱- 하고 멎는 순간, 곧바로 엄폐를 해제한 나는 총을 쥔 손을 노려 풀 오토 조준사격을 갈겼다.

“아욱……. 흑, 흐흑…….”

강화된 청각은 총성의 메아리가 남아있는 와중에도 자그마한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중지와 약지가 떨어지고 손등이 갈려나간 수녀가 몸을 떨며 흐느끼는 소리를.

멍청하기는. 이럴 땐 염동력을 썼어야지.

염동력으로만 총을 다루는 사격은 명중률이 너무 낮아 총알 낭비에 지나지 않지만, 명중 여부가 중요치 않은 제압사격이라면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침과 눈물을 보건대 연기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이 겉으로 보이는 연약함을 믿어선 안 되었다. 접근과 포획은 상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다음에나 고려할 일. 어쩌면 이제까지 보여준 어설픈 면모들이 모두 의도적인 연출일지도 모른다.

나는 탄창을 갈며 생각했다.

‘연출이든 뭐든, 슬슬 현기증이 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명」은 강화이자 가속일 뿐 완전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다. 저 여자가 지속적으로 흘린 피, 그리고 계속해서 생명술식을 돌리며 소모했을 양분을 고려하면 지금쯤 의식이 무뎌지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마법적인 불투명함이 바이탈 사인을 감추고 있어 확신까지는 어렵지만.

수녀는 다친 몸으로 계속해서 도주를 시도했다. 사냥꾼으로서의 나는 사냥감의 도주로를 계속해서 비틀어놓으며, 피 흘리는 사냥감이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렸다. 도주로를 비틀어놓는 까닭은 함정에 빠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

그간 부단히 단련을 거듭하여 시력도 전보다 나아진 편이지만, 그럼에도 이 숲에선 가시거리의 한계가 명백하다. 고로 보이는 것만 믿고서 무작정 뒤를 쫓다간 자살행위가 되기 십상이었다.

“허억, 허억…….”

숲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안개의 밀도가 낮아진다. 도주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자잘한 총상이 늘어난 도망자는, 탄약이 바닥난 총을 집어던진 채로, 마침내 어느 포플러 줄기에 기대어 풀썩 무릎을 꺾었다. 손을 짚은 자리에 붉은 핏자국이 찍힌다. 도망자가 손을 떼기 무섭게 나무는 그 피를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내가 엄폐물 위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자, 주저앉은 수녀의 눈이 일그러진다. 이미 초점이 흐려져 흔들흔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이었다.

“뒈져……!”

촤악-! 악마숭배자 수녀가 낙엽 더미 아래로부터 염동력으로 사출시키는 묵직한 총 한 자루. 본래는 같은 자리에서 죽은 어느 탐험가의 소유였을 수렵용 대구경 자동소총이었다. 수녀는 성한 손으로 소총을 낚아채어 무릎쏴 자세로 견착했다.

쾅쾅쾅쾅쾅!

발사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총열에서 불그스름한 녹 가루가 떨어진다. 내 몸에 꽂히지 못한 탄환들은 거인의 뱃속을 긁어 조건반사적 마법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철컥 소리와 함께 발생하는 소총의 기능 고장. 이는 오랫동안 습기를 먹은 뇌관이 격철을 맞고도 발화하지 않은 탓이었다. 수녀는 잇소리를 내며 소총 약실에 마력의 불을 일으켰다. 강제적인 점화로 콰앙 울리는 총성. 그러나 이번엔 녹슨 탄피가 찢어져 그 파편 하나가 총열 안쪽 총강을 콱 막아버리고 만다.

처음부터 조준이 엉망이었던 사격을 즉각적인 엄폐로 회피한 나는, 잦아들지 않은 강풍을 견디며, 이번에야말로 사냥을 끝낼 돌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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