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200화 (200/561)

#22. 멸공의 횃불 (9)

내가 3월 내내 본사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중국에서는 가오슈센의 숙부 가오닝후이가 광둥성 감찰위원회 주임 자리를 되찾았다. 오명 아닌 오명을 씻는 걸 넘어 완전한 복권에 성공한 것이다. 숙부의 복직이 확정된 날, 가오슈센은 들뜬 목소리로 감사를 전해왔다.

「정말로 고맙소. 제로 데이 보안취약점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승진기념 선물이었소이다.」

제로 데이 취약점은 중국에서도 그냥 제로 데이라고 불렀다.

“위쪽에서 많이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말이겠소? 오죽하면 곧바로 숙부님을 복권시켜주었을까. 지난 광저우 사태 당시 해군함정들이 망락공격(网络攻击/사이버 공격)에 당한 일 때문에 베이징 전체가 망상보안(网上保安/사이버 보안) 강화에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동사장의 선물이 그 갈증을 결정적으로 해결해준 거요. 듣자니 국안부에선 지난 공격에 이 보안취약점이 이용되었을 거라고 반쯤 확신하는 분위기라 하더구려.」

내가 USB 킬러를 습득한 함선은 스스로 발사한 대함미사일 공격으로 자침 당했고, 실함을 면한 나머지 함선들은 즉각적인 시스템 복구에 급급하여 공격 당시의 데이터를 보존하지 못했을 게 뻔했다. 시스템 긴급복구는 기존의 데이터를 밀고 백업 데이터를 덮어씌워 초기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

가오슈센에게 예정대로 선물을 전한 건, USB 분석 과정에서 예상대로 또 다른 제로 데이 취약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여유분이 생길 여지가 많으니 하나쯤은 선물로 줘도 무방한 것.

「숙부께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소.」

“여유가 생기면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어허, 거듭해서 신세를 진 게 우리이니 초대는 응당 우리가 해야지. 5월 18일에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데, 그때쯤이 어떻겠소?」

“글쎄요. 한동안은 시간을 내기 어려울 예정이라…….”

결혼식처럼 시답잖은 행사에 참석할 시간이 있다면 미국이나 일본행 비행기를 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미국엔 올해에도 돌아봐야 할 균사의 왕국과 전율하는 거인이 있고, 일본엔 화학무기 조달을 위해 사전준비를 갖춰둬야 할 섬 하나가 있으니.

‘아니면 본격적으로 노예상인들의 꼬리를 밟아보거나.’

우선순위를 다투는 일들이 많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상황이다. 가오슈센과의 꽌시가 고작 결혼식 하나 참석하지 않는다고 망가질 만큼 부실한 건 아니지 않은가. 붉은 봉투(红包)에 돈만 많이 담아줘도 섭섭함은 없을 것이다. 가오슈센이 나를 의형제로 취급하니, 의로 맺어진 숙부로서 체면을 차릴 만큼의 축의금을 주어야겠지.

‘안전성 면에서는 가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내가 세 경독과 가오슈센에게 제공한 초소형 정찰 드론과 제로 데이 보안취약점은 베이징이 광저우 사태의 배후에 영국의 암약이 있었노라 확신케 할 재료들이었다.

모든 국가행정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철저한 사전준비가 생명인 첩보영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 그러므로 인형술사의 실종을 조사하기 위한 영국 정보당국의 대중국 작전계획은, 내가 광저우를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윤곽이 나왔을 터. 원탁이 아무리 성화를 부렸어도 준비가 안 된 시점에서 고급인력들을 사지로 내몰지야 않았겠지.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뚫기가 지난한 것이 중국이라는 나라의 방첩 시스템이었다. 더군다나 중국 국가안전부가 영국 놈들을 잡아 죽이려고 촉각을 곤두세운 상태임에야.

나는 이미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전해들은 상태였다. 내가 밀어주는 세 경독은, 셋 중 하나쯤은 국안부로 진출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뒤 경쟁적으로 국안부에 선을 대었으므로.

대개의 인적 첩보망은 점조직 형태로 만들어지고, 이러한 점조직은 보통 한 사람만 잡혀도 전체의 기능이 마비된다. 그리고 3인의 경독은 내게 벌써 여러 건의 좋은 소식들을 물어다 주었다. 각각의 소식은 최소 하나 이상의 영국 스파이가 사로잡히거나 사살 당했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념을 끊고 가오슈센에게 물었다.

“그런데, 결혼식이 5월이라고 하셨습니까? 8월이나 9월이 아니라?”

중국에서 결혼을 올리기에 최고로 치는 날은 8월 8일과 9월 9일이다. 8월 8일 오전 8시 8분, 혹은 9월 9일 오전 9시 9분에 시간을 맞춰 식을 올리면 부자가 되거나 오래도록 행복해진다는 미신이 있는 까닭이다.

「뭐, 조카도 더 나은 길일을 기다려 식을 올리고 싶어 하긴 하였소만, 결혼이라는 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니 어쩌겠소. 집안사정에 따라 앞당겨야 할 때도 있는 게지.」

요컨대 난세를 맞이한 귀족가문들이 정략적으로 추진하는 혼인동맹이란 뜻이었다. 가오슈센의 주가가 연일 상한가를 경신하는 중이니 상대측 집안 역시 만만찮은 세도가일 게 분명했다.

내 입장에선 가만히 앉아있는데 기존의 꽌시가 확장되는 꼴이었다.

「그래도 뭐, 18일의 화요일이니 경사를 치르기에 나쁜 날은 아니올시다. 일단 식을 먼저 올려놓고 신고만 나중에 해도 무방한 일이고.」

“그렇군요.”

「동사장이야 워낙 큰일을 하는 사내이고, 나도 그 덕을 본 참이니 불참하더라도 어쩔 수 없겠소이다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와서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 숙부께서 동사장과의 만남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으신지 모른다오.」

“최대한 애는 써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근래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져서 말입니다.”

이후 이어진 대화는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중국인이 환장하는 돈에 관한 이야기. 내가 그간 밀수처의 숙련인력을 교관으로 파견하여 훈련을 도와온 사영 이능엽사병단 「화성맹룡대」가, 드디어 처음으로 국가계약을 수주하게 되었노라고.

「액수가 3억 위안이오.」

가오슈센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비록 아직은 작은 금액이지만, 창창하게 나아갈 길의 첫걸음일 뿐이지. 언젠가는 군경의 보조를 넘어 독자작전을 수행하게 될 날도 올 터이고. 그렇지 않소?」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3억 위안이면 한화로는 5백억이니 그렇게까지 작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이능을 보유한 엽사들의 연봉과 성과급, 그리고 머릿수를 고려하면 그냥 인건비나 건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동사장도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내 관할지역에서 공안의 이름으로 나가는 계약은 전부 다 동사장과 박 여사의 병단에 몰아줄 작정이니. 아마 이번 분기가 지나기 전에 첫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게요. 내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자들도 눈치껏 알아서 행동할 테지.」

나와 미주의 병단이라.

녀석이 중국 지부의 실세인 것은 사실이다. 가오슈센이 은인으로 여긴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지부를 총괄하기에 충분한 강점인 데다, 직접 확인한 바 능력도 괜찮은 편이고, 단독으로 암살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증명한 독기까지 있으니까.

월초 이사로의 승진을 통보받은 본인은 이런 취급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모양이지만, 빚을 졌으면 갚을 생각을 해야지. 자청하여 또 한 번 목숨을 빚진 이상, 이 정도는 해줘야 합당하다. 업무 부담이 아무리 무거워도 목숨보다 무겁진 않을 테니.

「그런데 말이오.」

“뭡니까?”

뜸을 들이던 가오슈센은 헛기침을 하고서 수줍게 물어왔다.

「혹시, 박 여사가 뭘 좋아하는지 아시는 바는 없소? 음식 취향이나, 즐겨 보는 영화의 유형이나, 받으면 기뻐할 선물 같은…….」

이 새끼가 아직도 포기를 안 했군.

‘사방에서 구애를 받다 보면 오래지 않아 시들해질 열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경태에게 지시를 하나 해두어야겠다. 중국에 나가있는 간부들의 유사시 철수계획을 보강해두도록 하라고.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인간일수록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에게 분노를 느끼기 쉬운 법.

혹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유아적인 집착을 품는다거나.

조직의 기율 유지를 위해서라도, 이사급의 간부는 격에 맞는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설마하니 이해에 밝은 배금주의자 공산귀족이 나와의 꽌시를 내팽개치면서까지 무리수를 둘까 싶지만, 나는 설마 하는 모든 상황에 대비를 해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난 생각을 정리하며 무난한 말로 대꾸했다.

“부하의 취향까진 내가 모르겠군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은 해보겠습니다.”

「그래주시겠소? 하하하! 역시 내게는 동사장뿐이오.」

시원하게 웃는 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통화를 종료한 뒤, 나는 가오슈센의 조카라는 인간에게 무엇을 선물로 보내면 좋을지 궁리해보았다. 단순히 돈만 보내어선 깊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 혼인동맹의 상대측이 보기에도 괜찮은 선물이어야 비로소 넓어지는 꽌시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터.

‘각성체 명마나 한 마리 보내줄까?’

불현듯 떠오른 발상이 의외로 괜찮았다.

원시마법을 얻지 못한, 혹은 얻었어도 수준이 높지 않은 운동선수들의 은퇴와 자살이 하루가 다르게 익숙한 뉴스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정상급 경주마로서 영광을 누리던 명마들의 처지도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의 경마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경주마 체급의 대형화였다. 과거엔 경주마 취급도 받지 못하던 묵직한 품종(Draft horse)들이, 이제는 생체질량에 비례하는 각성확률로 말미암아 경주마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샤이어, 페셔옹, 볼로네, 클라이즈데일, 서포크 펀치 등 몸집이 우람한 품종들의 생체질량은 평균적으로 2천 2백 파운드 이상. 이는 경주마의 표준이었던 서러브레드보다 두 배가량이나 무거운 것이다.

유전적인 우수성도 더 이상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강화계수 2.0짜리 명마보다는 강화계수 5.0인 잡종마가 더 가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지난 시대의 명마들은 그 가치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렇듯 헐값에 쏟아져 나오는 매물들을 사들여 본사 가까이 마련한 목장에 수용한 나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각각의 개체에게 최적화된 회로를 새겨주는 중이었다.

‘각성체라도 서러브레드는 좀 그렇고……. 서포크 펀치나 한 마리 준비해야겠어.’

서포크 펀치는 갈기, 다리, 꼬리의 털이 길고 풍성하여 생김새가 가장 심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중량마였다. 선물을 받은 부부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겠지. 품질 우수한 각성체 중량마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므로.

3월 말에 들어서는 첫 번째 원주민 망명객이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와우 키울릭 의거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던 결사대의 일원으로서, 「전미 히어로 협회」의 히어로들과 다수의 민병대를 상대로 교전을 치르면서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한 용자였다. 결사대의 내부분열 당시엔 인질 처형에 반대했던 인물이라고.

「참으로 염치없으나, 콜록, 당장은 대가를 드릴 형편이 못 됩니다…….」

마샤트는 전화상에서 병자의 음성으로 선처를 구걸했다.

「하지만 의지할 데가 달리 없었습니다. 그를 보살펴주신다면, 콜록, 이 은혜는 반드시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구걸. 마샤트의 불행은 내가 기다려온 기쁨이었다. 물론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반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미국 놈들이 역겹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풀리는 계획이 하나는 있군.’

꼬이는 일이 많았던 요즘이라 더 크게 다가오는 만족감. 이 만족감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역겨움을 상쇄하고도 거스름돈이 남는 것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도망자 한 사람 받아주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돌아가는 사정을 보건대 한 사람으로 끝날 것 같진 않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샤트 양?”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요.」

“당신은 괜찮은 겁니까?”

「……예.」

뜸을 들이는 대답은 말과 다른 진실을 내포했다. 수사망이 사방에서 올가미처럼 조여 오는 가운데, 의거를 계획한 장본인이 과연 언제까지 노출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을는지. 카지노의 충성파에서도 난파선의 쥐새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게 뻔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주어도 모자랄 마샤트가, 전화상에서조차 자신의 병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니까.

“아무래도 괜찮지 않은 느낌인데…….”

「…….」

“전대 추장님은 내게 얼마 없는 친구들 중의 하나였고, 마샤트 양 당신은 그런 친구의 손녀입니다. 이익을 따지는 사업가의 우정으로도 당신 한 사람쯤은 대가 없이 살길을 마련해줄 의사가 있습니다. 정 사정이 어렵다면 망설이지 말고 내게 의탁하도록 하십시오.”

「정말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저는 제가 져야 할 책임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나는.”

「회장님의 호의를, 항상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겠습니다…….」

내 관대함은 제국주의자 양키들에 대한 반감만큼의 진심이었다. 다 포기하고 몸을 피하면 정말로 받아줄 작정이라는 말. 아예 새로운 삶을 바랄 경우, 조부의 친구로서 안전한 위조신분과 함께 넉넉한 용돈까지 챙겨줄 의사가 있다.

‘이성적인 리더십의 소유자는 적당히 물러나주는 편이 더 낫지. 못 배운 원주민들을 테러의 기수로 키워내려면 말이야.’

손해 볼 것 없는 연민을 베푼 나는, 어조를 사무적으로 바꾸어 이해를 입에 담았다.

“그럼 이제 사업가로서 말을 해보지요. 당장은 대가를 지불할 형편이 아니라 하셨는데, 혹시 카지노의 경영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까?”

갑자기 달라진 어조의 질문에, 마샤트는 몇 번의 밭은기침을 내뱉고서야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 해서, 연결점을 지워두었으니…….」

“카지노야 무사할 수 있다손 쳐도, 당신의 지배력까지 안전하진 않을 텐데요? 카지노의 지불능력이 당신의 지불능력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건-」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마샤트. 나는 차분한 몰아세우기를 이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번의 의뢰를 받아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설마 그 폭탄이 그렇게 쓰일 줄이야.”

성산 탈환이 불안정한 계승을 보완할 방편이었음을 짐작하지만, 이걸 굳이 짐작하는 티를 낼 필요가 있나.

난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보태준 사람이어야 한다.

“전대 추장께서 인지하신 마샤트 양 당신이 지도자가 아니라면, 내게 있어 다이아몬드 카지노는 결코 예전 같은 신뢰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금을 다른 카지노들로 분산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부족 간 상호지급보증 규모에도 한도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안 됩니다.」

마샤트는 다급하게 나를 만류했다.

「설령 제가 카지노의 수장이 아니게 되더라도, 콜록, 우리 부족은 결코, 회장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회장님의 자산이, 위험해지는 일은, 절대, 로,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기침을 참느라 뚝뚝 끊어지는 말. 이 어린 추장은 저가 궁지에 몰린 와중에도 부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변호하는 부족원들 중에 벌써 내게 선을 대고자 시도한 배신자들이 존재함을 알면, 그때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해지는 순간.

마샤트는 열성적으로 나를 설득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예금을 크게 빼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내게 몇 번이나 구두로 약속을 받고서야 안심한 마샤트는, 통화의 말미에 이런 부탁을 덧붙였다.

「할아버지께선, 이번 일을 모르도록, 해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생각이 짧은 사람은 아니니까.”

전대 추장은 슬슬 죽어주는 편이 깔끔하긴 하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피해자를 죽이고자 일부러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는 건 기분이 적잖이 더러워질 일. 하물며 그 피해자와 나름대로 오랜 친분을 쌓은 사이임에야.

추장의 죽음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다. 고로 효성 깊은 손녀의 부탁은 사실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