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멸공의 횃불 (8)
인간의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들 중엔 「쓰레기통 모형(Garbage can model)」이라는 것이 있다. 합리적 검토와 증명과정이 결여된 혼돈 속에서 무수한 의견들이 부침과 충돌을 거듭한 끝에, 결정적인 순간 그간 제시된 대안들이 타협점에 도달함으로써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내가 보기에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태 이후의 한국 정계가 이러한 쓰레기통과 같은 상태였다. 중구난방으로 정책을 발의하고 서로를 비난하기만 하던 정치인들은, 보름여가 경과한 시점에서 대략적인 타협안의 윤곽을 잡아가기에 이르렀다.
이는 정치인들 모두가 하나의 위기감을 공유한 덕분이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낭비하다간 국운이 심각하게 기울어버리다 못해 자신들의 신변마저 위험해질 공산이 있다는 위기감을. 물론 이 위기감은 자체적으로 피어나기보다 외부로부터 주입된 부분이 컸다. 주로 유권자들과 언론의 질타에 의하여.
결과적으로 정부와 여당은 기존의 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가길 포기했다. 고위험 수렵 인력을 병역자원으로 흡수하려던 계획, 즉 강제노동의 확대를 단념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신규 정책의 골자를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고위험 수렵 장비의 소유 및 운용허가 등급제」와 더불어 「공공의뢰 점수제」를 기반으로 세부적인 시행계획들을 빠르고 신속하게 갖춰나갈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제도들은, 고위험 수렵과 기타 특수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 종사하시는 민간 엽사분들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는 형태로 고안되었습니다.」
「「고위험 수렵 장비의 소유 및 운용허가 등급제」의 핵심은, 총화기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기타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장비들을 등급으로 구분하고, 공공의 안전과 이익에 기여한 엽사들만이 높은 등급의 장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공의뢰 점수제」는 특수공인능력자 엽사분들이 공익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체계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이에 따라 엽사분들께서는 정부와 각 지자체들이 내놓은 의뢰를 수행함으로써 분기별로 평가를 받으실 수 있으며, 그 평가의 결과에 따라 더 높은 등급의 무기와 장비의 운용허가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누적 공공점수는 수행한 의뢰의 이력과 함께 국가공인능력자격의 승급 조건에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바꿔 말해, 공공의뢰를 수행하지 않는 엽사분들께서는 고위험 수렵 경력이 아무리 길고 우수하다 한들 기사나 기능장, 기술사로의 승격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지만, 특정 수렵구역과 수렵물에 등급을 부여하여 접근권한의 점수별 차등을 두는 방안도 논의 중입니다.」
「총화기 소유허가가 무분별하게 남발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공공의뢰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공익점수는 각 지자체마다 분기별로 상한을 정해둘 계획입니다. 또한 지방과 수도권의 균등한 생존권 확보를 위해, 경제력이 낮고 환경적 위험도가 높은 지자체들에겐 더 많은 가용점수가 주어질 것이라 약속드립니다.」
「아울러 최근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시행계획이 불투명해졌던 특수공인능력기능사 자격시험과 고위험수렵기능사 자격시험 역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파공작원들을 사로잡아 공공의 이익에 현저하게 기여하신 엽사분들께는 전원 보국훈장이 수여될 것이며, 특수공인능력 및 고위험수렵 자격시험과 장비운용 등급 평가, 그리고 공공사업 계약대상 선정과정 등에서 매우 많은 가산점이 부여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잠시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존의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변들로 말미암아 전 지구촌이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민생의 어려움이 나날이 커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는 일시적인 혼미함에 빠져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어 왔습니다.」
「저는 국정운영의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정치적 혼란에 우려를 느끼셨을 모든 국민 여러분들께 진심어린 송구함을 전하는 바입니다.」
「비록 우리가 크나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힘을 합쳐서 이겨내지 못할 위기는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이자 정부의 믿음입니다. 정치적 성향과 진영의 다름을 떠나 이 나라의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가 맞이한 위기는 비로소 기회의 창을 열어줄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이겨냅시다.」
「이상입니다.」
발표를 들은 난 이제야 좀 봐줄 만한 정책이 나오는구나 생각했다. 각성능력자들을 공짜로, 혹은 싼값에 부려먹겠다는 의도 자체는 그대로지만, 그래도 많은 면에서 세련성을 더한 정책임은 분명했으니까. 총기소지가 기본적으로 불법인 나라에서 미국의 민병대 모델을 따라가면서도 사회불안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편익은 최대화하는 방편이라 하겠다.
고위험 수렵에 나서는 헌터들은 기를 쓰고 장비운용허가를 얻으려 들 것이다. 그렇게 경쟁이 치열해지면, 공익점수를 받을 수만 있다면 자잘한 의뢰쯤은 돈도 안 받고 처리하겠다는 자들마저 나타나겠지.
요컨대 정부는 부족한 예산을 대신할 제2의 결제수단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걸로 인적자원 유출 문제를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비용보다 이득이 훨씬 크다. 조만간 좋은 날이 올 게 아닌가. 본사 앞에서 대놓고 공지합동 기동타격대를 굴려도 공권력의 관심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날이.
잠재적 근심거리였던 도지사 강중성은 이쪽에서 더 큰 근심거리를 안겨줌으로써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여유가 없게끔 만들어주었다.
수단은 도박이었다.
황금기의 눈을 가진 자에게 카드 패를 돌리는 도박은 손 짚고 헤엄치기만도 못한 장난이다. 조직 수립 초기엔 실제로 내가 발로 뛰는 도박이 자금조달의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고.
그러나 승부사로서의 명성은 자칫 내 목숨을 위협할 여지가 있었다. 마치 ‘투시력이라도 가진듯한’ 승부사의 소문을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일 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하여 조직이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조직 본사가 직접 관리하는 VIP 클럽에서의 나는 매번 적당히 돈을 잃어주는 호구의 역할만을 담당해왔다. 돈은 잃어주되, 합법적으로는 얻지 못할 개발권이나 매각계획이 없는 공유지 구입, 정책정보의 사전입수 등 돈만으로는 사지 못할 것들을 돈으로 사들이는 무대로써 도박판을 이용해왔던 것이다.
접근성이 좋고 보안이 확실하며 투명하게 운영이 이루어지는 VIP 클럽은 정치인, 언론인, 지역 유지와 재벌가의 구성원 등이 가리지 않고 선호하는 여흥의 장이었다.
위장신분으로 참석한 내가 무리수를 두는 흉내를 내자, 그간의 전적으로 인해 자신감 충만한 회원들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중엔 당연히 표적인 도지사 강중성이도 끼어있었다.
“허허허……. 괜찮겠습니까, 홍 사장? 난 이제껏 큰돈이 걸린 판에서 당신이 이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여유를 부렸던 강중성은, 잃고 또 잃어버리기만 하는 게임이 거듭된 끝에 반나절 만에 41억을 날릴 처지가 되자 안색이 흙빛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제가 운이 굉장히 좋은 날이로군요.”
내가 태연히 능청을 떨자, 강중성은 부패한 정치인의 자연스러운 대응을 보여주었다.
“잠깐, 잠깐……. 홍 사장. 정말로 이걸 다 가져가실 셈이오?”
“아, 물론 개평은 드려야지요.”
“그게 아니라, 어휴, 꼭 돈으로 가져가실 필요가 있겠느냔 말이오. 평소처럼 공유지를 사게 해달라거나, 건축허가를 내달라거나, 적당한 자리에 아는 사람을 꽂아달라거나……. 아무튼 여러 가지로 있지 않소?”
재산이 좀 축날라 치면 국민의 세금과 직권남용으로 손해를 메우니, 이 인간은 도박장을 드나들면서도 파산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는 잃을 때마다 과감한 베팅을 더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나는 거듭 내키지 않는 시늉을 하다가 도지사의 생체신호가 좌절과 분노로 바뀌기 직전에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었다.
“정 그러시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동안의 인연도 인연인 만큼……. 전부터 검단산 부근에 CC나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만, 36홀 플러스알파를 집어넣을 면적으로 허가를 받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지매입에도 손을 좀 보태주시면 더 좋겠군요.”
서울에서 가까운 36홀 컨트리클럽이면 무기명 회원권의 가격이 기본 십억 단위를 헤아릴 엄청난 사업장이다. 명문 골프장의 커트라인이 18홀이니, 어지간한 명문의 두 배 사이즈를 잡아야 한다는 뜻. 안전상의 문제로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커지는 시기이기에 더욱 가치가 높은 개발권이라 하겠다.
강중성은 난처함을 드러냈다.
“어, 음, 36홀은 사이즈가 너무 크지 않소? 거기다 플러스알파라고?”
“허가를 얻게만 해주신다면, 오늘 잃으신 돈을 다 돌려드리는 건 물론이고 그만큼의 추가금을 더 얹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세탁을 깔끔하게 끝내놓은 자금이지요. 덤으로 CC가 완공되면 회원권도 한 장 보내드리고.”
“……내 가능한 데까지 힘을 써보리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아주십시오. 내게도 사업계획이라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노력해보겠소.”
말을 더듬다가 유혹에 굴복한 정치인은, 지금쯤 관계자들과 의견을 조율하느라 다른 일에 주의를 할애할 겨를이 없을 터였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내년 대선에서의 선거자금을 충당하고도 여분이 남을 테니까. 여기서의 선거자금은 당연히 음지에서 오가는 돈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건 되었으면 좋겠는데.’
조직 산하의 관광개발회사들은 최근 시설 유지비용의 증가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산 좋고 물 맑은 한적한 곳의 사업장들이 환경적 위협에 노출된 탓이다.
외국인 전용 선상 카지노들 역시 바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확산됨에 따라 하나같이 이용객이 감소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다. 내일을 모르는 도박중독자들의 특성상 감소폭이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업장들이 일제히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확실하게 돈을 벌어주던 캐시카우마저 빌빌대는 상황이니, 계열사들의 경영지표는 악화일로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표면적인 경영지표가 나빠진다고 해도 계열사를 유지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본사와 다른 계열사들의 자금을 끌어다 쓰면 그만이니까.
허나 그러한 외부자금 수혈이 장기화되면 제3자로부터 의심을 받을 여지가 생기고 만다. “대체 저 회사는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가?” 하고.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이런 종류의 가능성은 아예 제로에 수렴해야 이상적인 것이다.
국제밀수와 자금세탁, 위장신분 마련, 자산의 소유권 위장, 본사와 계열사들 간의 지배구조 체인 형성 등에서 관광개발회사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고려할 때, 전면적인 사업철수는 애초에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선택지.
서울 근교의 대형 골프장은 채산성이 낮은 지방의 사업장 여러 개를 정리하게 만들어줄 좋은 방편이었다.
‘수도권의 회원제 36홀 컨트리클럽이면 연매출이 2백억은 찍히겠지.’
그래봐야 영업이익은 한 자릿수 퍼센트를 기록하겠지만, 많은 매출은 나무를 숨길 숲이 되어주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골프는 앞으로의 전망도 양호한 편이다. 힘과 감각이 좋은 각성능력자라고 해서 무조건 날아다닐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니까. 각성자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강해진 힘 때문에 미세한 힘 조절에 애를 먹는 경우가 즐비했다. 요컨대 골프는, 규칙을 조금 손보기만 한다면, 현시점에서 일반인과 각성능력자 사이의 경쟁이 성립 가능한 몇 안 되는 스포츠 중 하나라는 뜻이다.
고로 내가 도지사에게 골프장을 요구한 것은, 나 혼자만의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라 조직 내부 전략회의에서 결정된 중장기 위장경영 정상화 계획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