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멸공의 횃불 (1)
의거로 시작하여 테러가 되어버린 와우 키울릭 사태는, 사태 당일 원주민 행동대와 인질을 합쳐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대참사로 끝이 났다. 민병대와 자칭 히어로들이 입은 피해는 전무했는데, 경험과 장비 면에서 우세했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압도적이었던 까닭이었다.
민병대와 자칭 히어로들, 그리고 현장을 통제하던 경찰 감독관들에 대한 비난여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러 채널로 생중계된 공개처형이 여론의 향방을 결정짓고 말았던 탓. 평화로운 인질 해방에 대한 약속을 번복한 것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전과확대에 들어갔다.
「나는 일찍부터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야만인들이 왜 국경장벽 건설에 반대했겠습니까? 그들이 마약을 파는 마약상이자 사람을 파는 인신매매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약상과 인신매매범들, 그리고 불법 밀입국 브로커들만이 국경에 세워지는 장벽을 불편하게 여기지요!」
「그들은 평소에도 도박으로 선량한 미국인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강도짓으로 배를 불려왔습니다! 비열하게도 도박판을 벌일 권리를 자치권으로 보호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강도가 강도짓을 하려다 인명을 해친 사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위대함을 저들에게 양보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충분히 사죄했고 충분히 보상했습니다! 계속해서 특권을 주고 양보를 했는데도! 여전히 타고난 게으름을 버리지 못해 보호구역에 드러누워서는! 뱃가죽 벅벅 긁으며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생떼를 부리는 미개한 카지노 딜러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더 베풀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을 가지고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며 억지 주장을 펼칩니다! 그렇게 오래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막상 그 일을 겪은 당사자들은 거의 다 죽었을 텐데,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보상을 운운하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과거에만 집착하니까 미래로 나아가질 못하는 겁니다!」
「내겐 살인자와 무뢰배들에게 베풀 자비가 없습니다! 나는 위대한 나라의 위대한 도덕을 대표하는 자로서 저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줄 것입니다!」
이 와중에 사막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샤트 일파를 비난하는 자들이 등판했다. 그러한 자들 가운데엔 부족 자치정부의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 추장이니 뭐니 하면서 스스로를 높여 거들먹거리는 불량배가 있는데, 그런다고 진짜로 부족의 대표자가 될 순 없지요. 아니, 엄연히 자치정부가 존재하는 마당에 누구의 선출을 받아 추장을 자칭한단 말입니까? 그냥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일 뿐입니다.」
「성산 와우 키울릭의 임차는 부족의회의 승인을 받은 정당한 계약이었습니다. 그 의회를 두고 매족노들의 집단이었다고 비난하는 무리가 있긴 합니다만, 세상에 언제나 올바른 결정만을 내리는 집단이라는 게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해당 의회는 부족의 원로들이 모여 결성한 근대적인 대의기관이었습니다. 그러니 의회의 뜻이 곧 부족의 뜻이었고, 의회의 실수는 곧 부족의 실수였다고 봐야지요. 당시의 의회를 탓해봐야 결국은 제 얼굴에 침 뱉는 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했으면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있을 수 없어요. 유감스럽게도, 부족 내엔 그렇게 어리석은 일부가 존재합니다. 대통령님의 말씀처럼 과거에 얽매여서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자들이죠.」
마지막으로 마샤트의 경쟁자들은 내게 선을 대고자 시도했다.
「회장님께선 우리 부족의 친구이자 가장 중요한 고객이며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업상의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제가 카지노를 장악하게 되더라도 당신께서 보여주셨던 우정을 잊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저를 지지해주신다면…….」
보호구역의 음지에서 활동하는 부족원들은 내 ‘보증을 서주지 않는 우정’을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여 내 지지는 야심가들에게 2중으로 도움이 된다. 카지노가 어지러울 때 돈을 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사업상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내 인망에 기대어 카지노에 속한 부족원들의 민심을 얻기에도 좋은 것이다.
야심가들이 던진 말들 중엔 굉장히 웃기는 한마디가 섞여 있었다.
「전통에 따르면 여자는 추장이 될 수 없습니다.」
전통은 무슨. 이미 창씨개명까지 끝나 관습적인 이름도 쓰지 않는 마당에, 어두운 사업을 경영하는 자들이 새삼 오래된 전통을 끄집어내어 경쟁자를 헐뜯는 꼴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성산 의거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부족원들은, 제아무리 사소한 도움을 보탠 자일지라도 부족의 땅에 남아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 오는 압제자들의 수사망을 피해, 그리고 작은 대가에도 동포를 팔아넘기기를 서슴지 않을 부역자들을 피해 달아날 수밖에 없는 것.
미리 깔아둔 장치들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며 엑소더스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은, 지켜보고 있노라면 심심한 만족감이 드는 것이었다.
음모가로서는 이보다 흡족한 순간도 드물었다 해야겠지.
내가 부족의 은인으로서 지닌 영향력, 그리고 이미 거두어놓은 추장의 존재는 도망길에 오른 젊은 원주민들을 자석과 같이 끌어들였다. 갈 곳을 잃은 그들이 달리 누구에게서 안식처를 찾겠는가? 멕시코에 자리를 잡은 동포들도 카지노의 영향력에 들어있기는 매한가지인데.
그러나 세상엔 생각대로 풀리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은 법.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했지.’
어떻게 일 하나가 계획대로 잘 풀려나간다 싶더니, 다른 계획들이 줄줄이 어그러져 나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내 만족감에 처음으로 찬물을 뿌린 것은, 2월 말엽에 이르러 파키스탄 북부에서 전해져온 소식이었다. 다라-아담-켈에 파견된 국제사업부 밀수처의 부장 녀석은 「알 까심」을 포함한 5대 공장과의 협상이 생각처럼 빠르게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올려왔다.
“……그들이 「로야 지르가」 소집을 선언했다고?”
「예, 회장님. 국경 너머 아프가니스탄의 부족 대표들까지 모이는 엄청난 규모의 비밀집회가 될 거랍니다.」
로야 지르가(لويه جرګه)는 파슈툰족의 대의회를 뜻한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모든 파슈툰족의 통일된 입장을 정해야 할 때 개최하는 거대한 회의로서, 여기서 나온 결정은 파슈툰족의 율법인 「파슈툰왈리(پښتونولي)」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다. 파슈툰의 계보에 속한 모든 부족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원칙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의는 도무지 짧게 끝나는 법이 없다.
‘알림 샤히디에게 제때 명성을 쌓아주려면 이번 일이 너무 늦어져선 안 되는데.’
경독들에게 먹여줄 공적의 결핍이나 무기 부족으로 인한 흑해자당의 세력 위축은 그다음에나 염려할 바다. 짧게 침묵한 나는 불만스러운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작 공장 다섯 움직이는데 뭐 하러 대의회까지 소집하는 거지? 뭔가 들은 거라도 있나?”
「예. 고하르 라왈이 은밀히 전하기를,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지만 중국을 ‘모든 무슬림들의 적’으로 규정하는 안건이 논의될 것 같답니다. 흑해자당의 난으로 중국이 안쪽에서부터 흔들리는 지금, 위구르인들을 거둬들인 형님의 제안이야말로 탄압받는 신앙의 형제들을 도울 훌륭한 계기가 되어주지 않겠느냐…… 라는 게 아부 알 까심의 주장인 모양입니다.」
돌겠군. 아부 알 까심, 이 교활한 늙은이의 진정한 의도는 공장과 부족이 지는 부담을 줄이는 데 있을 것이었다.
나를 더욱 짜증나게 만드는 건 지체되는 시일만이 아니었다. 로야 지르가는 저 잘난 미국마저도 열릴 때마다 관심을 기울이는 행사. 파슈툰인들이 아무리 보안을 엄수한들 어디선가는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존재했다.
“당연히 표면적인 의제는 따로 있겠지?”
없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다행히, 그들이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각성체 유해조수의 위협에 대한 공동대응방안을 논의한다는데,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선 이것도 단순한 눈속임만은 아닌 듯합니다.」
파슈툰족의 영역(파슈투니스탄)에 속한 파키스탄 북서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중부는 대부분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막이다. 그런 황무지에서 공동대응이 불가피한 각성체 유해조수의 위협이라니. 나는 그 유해조수에 탈레반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CIA 하청업체들이 무능하기를 바라야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요즘의 CIA는 첩보사업의 많은 부분을 민간하청에 의지하고 있다. 이유는 당연히 예산절감과 책임소재 흐리기. 민간군사업체들이 세계각지에서 미군이 먹어야 할 욕을 대신 먹어주고 있듯이, 민간첩보업체(Private Intelligence Company)들은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유연한 도덕성’을 발휘함으로써 CIA를 비롯한 첩보기관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고 있었다.
한화로 매해 백조 원을 넘나드는 미국의 첩보예산 중 7할을 이들 민간업체들이 가져갈 정도이니, 납치·감금·고문·미행·가택침입·절도·도청·암살·밀수·해킹 등으로 점철된 그 어두운 경제의 거대함은 그 규모만으로도 나 같은 무법자들의 사업을 초라하게 만드는 수준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이런 종류의 민간사업자들에겐 기업윤리 이상의 사명감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을 뿐이므로, CIA의 ‘정직원’들만큼 책임의식이 투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주 아프가니스탄 미군이 카불 인근지역만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현실, 그리고 현직 미국 대통령의 근시안적이면서도 강력한 철군의지를 감안하면, 민간첩보업체들은 이번 로야 지르가를 돈이 안 되는 일감 내지 물주가 관심을 버린 사안쯤으로 인식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곤 해도 최소한의 주의는 기울일 터.’
꼬리를 밟힐 개연성이 제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사냥감으로서의 나를 적잖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들이 내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한들, 미국이 흑해자당의 난에 개입할 방안으로서 다섯 공장을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게 뻔하다.
위험도가 높아지는 만큼 경독들에게 던져줄 정보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부장 녀석은 이렇게 평가했다.
「파슈툰 사람들이 지하드(성전)를 결의한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망과 비호엔 엄청난 가치가 있고, 우리는 다섯 공장만이 아닌 파슈툰족 전체의 친구로 인정받는 셈이니까요.」
파슈툰족의 비호를 받는다는 건 대단한 규모의 유통망이 새로이 확보된다는 뜻. 성전에 기여하는 협력자에 대한 우정은 평범한 사업상 거래처의 신용보다 훨씬 더 질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 선포된다면 다섯 공장의 실무자들은 이번 사업에 대단한 의욕을 보여줄 것이기도 했다.
영국 장교들이 파슈툰 가정부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가 지지 않던 시절의 대영제국과 전쟁을 치러 승리하고, 피난자를 반드시 보호해줘야 한다는 「파슈툰왈리」의 법도에 따라 미군 하나를 지키겠다고 탈레반과 교전을 치르기도 한 자들의 의욕이자 우정이다. 이걸 가치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당장은 곤란함이 더 큰 것이 사실.
지금의 나로선 그놈의 대의회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성패를 요행에 맡겨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이 「로야 지르가」에 이어 나를 심란하게 만든 것은 3월 초 잠비에서 올라온 보고였다.
“엔진을 들여오던 배가 해적에게 털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묻는 말에, 수화기 저편에선 송구함 가득한 답이 돌아왔다.
「예, 회장님. 돈을 지불하면 인질과 상품 모두 돌려주겠다고 했답니다만, 가격협상엔 다소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시날로아 카르텔의 잠수정은 건조에 필요한 인시(人時)가 4백 시간 남짓한 수준이었다. 기술자 두셋을 투입하면 초과근무를 포함하여 보름에 한 척씩 건조하기가 가능한 물건이라는 의미다. 멕시코 카르텔 놈들이 미국의 감시를 물량으로 돌파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생산성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가능한 건 일단 잠수정의 체급이 작을뿐더러, 엔진과 배터리, 잠망경 등을 죄다 기성품으로 조달하여 쓰는 덕분이다. 그리고 섬유강화복합재료(FRP)로 제작하는 선체는 금형(金型)만 있다면 기본적인 핸드 레이 업(Hand lay up)으로도 완성된다.
금형이야 부지를 확보하기도 전에 넘치도록 깎아두었으므로, 나는 3월 내로 1번함을 물에 띄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엔진을 조달하는 데 외주를 쓴 것이 실착이었다. 국제사업부 밀수처의 인력과 선편이 형편에 맞지 않았기에, 나는 말레이시아의 중개상에게 쿠알라룸푸르까지만 물건을 실어다줄 것을 요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험은 들어두었다. 적잖은 추가비용을 지불하여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보안요원들을 소대 규모로 고용한 것이다.
그중에서 각성능력자는 일부에 불과했으나, 해적들을 상대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판단했다. 수시로 자맥질을 해야 하는 해적들이 두꺼운 방어구를 두르고 다닐 수는 없고, 그런 해적들을 상대하는 총격전에선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차이가 크지 않을 터이므로.
그런데도 털렸다는 사실이 황당할 따름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해적들이 들이닥쳤기에?
‘첫 항해로 실어올 화물까지 정해두었었는데…….’
초도함이 취역하는 대로 일본 땅에서 화학무기를 조달할 생각이었던 나는, 한숨을 쉬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토록 어그러진 타임 테이블에 화룡점정을 찍은 건 어처구니없게도 북한에서 내려온 무장공비 새끼들이었다.
이른바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건에 엮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