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91화 (191/561)

#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8)

백악관의 폭군은 원주민들에 대한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직접적인 지시로 공식적인 부담을 짊어지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대함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시민들이 이러한 폭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자유인들의 나라에서 계약은 신성한 것입니다. 저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 떠드는 신성한 산보다 훨씬 더요!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계약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저들은 돈을 받고, 우리는 땅을 빌렸죠. 저 야만인들의 낙후된 야만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에게 계약을 맺을 자유를 주었어요! 그런데도 의회는 나에게 원주민들과의 협상에 나서 보라 종용합니다. 특히 민주당이 말이죠.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나는 자유의 수호자이지 사회주의자가 아닙니다.」

「민주당과 소위 인권운동가라 하는 멍청이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다 보면, 하나둘 정당한 권리를 양보한 우리는 어느덧 사회주의자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쓴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여러분의 자유를, 나아가 미국의 위대함을 침해하려 합니다.」

「여긴 미국입니다. 중국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한,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요!」

「시민들이여! 맞서 싸우십시오! 사회주의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바를 직시하십시오! 위대한 나라의 위대한 자유인들이여! 여러분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내 참모들은 나에게 이번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정치가 무엇입니까? 주권자들의 행동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국민의 행동이 곧 정치입니다! 행동하십시오! 실천하십시오! 이 순간에도 자유의 적들이 문명의 고지를 빼앗으려 들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선동적인 메시지들로 도배했다. 10분 20분 단위로 갱신되는 메시지들은 수많은 지지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통령이 강조하는 미국 시민의 자유는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하는 총기소유 및 민병대 조직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사실 미국인들이 시민의 자유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것 또한 이 수정헌법 2조일 터.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진영이 수시로 첨예하게 부딪히는 대표적인 지점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메시지는 간접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선동이었다.

일어나라고.

어서 총을 들고 일어나 저 폭력적인 야만인들을 무찌르라고.

지지자들은 대통령의 뜻대로 행동했다. 마법의 시대에 들어 전성기를 맞이한 사냥꾼과 민병대들이 성조기를 휘날리며 신성한 산 주변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선두엔 스판덱스 쫄쫄이를 입은 이상한 연놈들이 서있었다.

이른바 「전미 슈퍼히어로 협회」라 자칭하는 정신병자들의 모임이었다.

공항에서 눈물로 매달리는 린페이를 달래어 보내고 난 오후, 집무실 소파를 차지한 채 하릴없이 TV를 보던 경태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형님. 저 사람, 그때 그 여자 아닙니까?”

“음?”

“그 왜, 추장 할배 의뢰로 「백색근위대」인가 하는 KKK 짝퉁 멍청이들 사냥할 적에, 괜히 휘말려가지고 귀찮게 만들었던 몸 파는 여자요. 이름이 캐런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미간에 주름을 잡은 나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던 이름을 끄집어냈다.

“캐런 윌리엄스.”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기억하고 계셨네요?”

“…….”

저 여자가 여기서 왜 나와?

현실에서 슈퍼히어로 활동(Real-life superhero)을 즐기는 저능아들은 마법의 시대가 돌아오기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특히 히어로 문화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그 숫자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적 현상으로서 소소하게 학문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을 만큼.

그러나 그 논의는 미디어 매체의 영향과 그 양상에 관한 것이었지, 슈퍼히어로의 사회적 기능 및 형태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화면에 비쳐지는 건 과거의 그 우스꽝스럽기만 했던 광대놀음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무언가였다.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느냐고요? 간단하죠. 우리는 히어로니까요.」

회전초가 굴러다니는 사막과 착륙한 헬리콥터를 배경으로, 카우보이모자를 쓴 캐런 윌리엄스는 황량한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자의 질문에 답변했다.

「아, 물론 원주민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죠. 그러나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범죄를 저지를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안타깝지만 저들은 지금 선을 넘었어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누구라도 넘어선 안 되는 선을요.」

화면 아래엔 본명 대신 히어로의 예명과 소속된 팀이 자막으로 떠있었다. 예명은 「이그나이트 레이디」이고 속한 팀은 「오클랜드 슈퍼 스쿼드」라는 모양. 전미 슈퍼히어로 협회의 큰 울타리 안에 서로 다른 지역의 팀들이 모여 있는 형태였다.

「저는 왜 동료들처럼 얼굴을 가리지 않느냐……. 좋은 질문이에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상판에 미소를 띠는 캐런 윌리엄스.

「기자님은 혹시 저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아, 들어보셨다고요? 그럼 아시겠네요. 제가 예전에 창녀(Whore)였다는 걸.」

캐런은 과거의 자신을 모욕적인 표현으로 자칭했다. 하다못해 매춘부(Prostitute)나 콜 걸(Call girl)이라고만 했어도 조금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을 터. 기자가 당황하자 캐런은 허스키한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난감해하시나요?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요.」

「전 저 같은 하류인생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모두가 저를 보며 용기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는 거라고요. 내가 저 여자랑 떡쳐봤다고 비웃는 남자들이 있겠지만,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아요. 전 히어로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캐런은 카메라를 향해 손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었다. Bang! 윙크를 곁들여 장난스럽게 내는 소리. 손끝에선 마법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작고 볼품없을지언정 히어로로서 명성을 얻는 데엔 큰 힘이 되었을 발화능력이었다.

「저는 제 과거가 자랑스러워요. 비록 초라하고 비참한 삶이긴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평생의 뮤즈를 만날 수 있었거든요.」

「그래요. 뮤즈. 내게 깨달음을 준 사람이 있어요. 그분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정의를 집행하는 진정한 히어로였답니다. 강하고, 지적이며, 사리사욕이라곤 먼지 한 톨만큼도 없는 고결한 신사분이셨죠. 그분과의 만남은 제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세상에. 나는 인상을 구기며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내 반응을 본 경태 녀석이 입에 주먹을 대고 웃음을 참으려 애쓴다.

이 와중에 캐런 윌리엄스는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보고 계신가요, 선생님? 당신은 저의 멘토이자 저의 영웅이고 저의 영원한 뮤즈세요!」

「당신께선 저를 위해서라도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야 할 거라고 하셨지만, 언젠가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제 동료들도 선생님을 환영할 거예요! 선생님께서 악당들의 금고를 열어 베푸신 돈으로 저는 전미 히어로 협회의 초기 출자자가 되었거든요!」

「보고 계시다면 우리 협회로 연락 주세요!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 어지러운 세상엔 선생님 같은 자경단 지도자가 필요해요!」

…….

환장하겠군. 실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 백악관 미치광이의 선동질에 쫄쫄이를 입은 미치광이들이 호응한 셈.

테러를 취재하러 나간 기자가 장시간 단독으로 잡아준 걸 보면, 미국 현지에선 캐런 윌리엄스의 지명도가 상당한 듯했다. 이 멍청한 여자는 ‘테러리스트’들의 배후에 제 돈을 세탁해준 카지노가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

“존경합니다, 형님.”

“놀리지 마라.”

“진짠데요.”

내가 정색하니 경태는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제까지는 사무와 상황파악을 병행하고 있었으되, 이제는 도무지 전자문서에 집중을 하기가 어렵다. 한숨을 쉰 나는 키보드를 밀어버리고 TV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의 무기는 초월적인 이능 그 자체가 대부분이었지만, 현실 속 따라쟁이들의 무기는 우악스러운 사이즈의 커스텀 건(Custom gun)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실전성보다 쇼맨십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설계.

여기에 히어로와 헌터를 불문하고, 등짝이나 가슴엔 스폰서 광고가 들어가 있었다. 스포츠 구단들에 대한 유니폼 스폰서십(Uniform Sponsorship)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보기 좋은 비극이로군.’

천문대를 점거한 원주민 청년들은 지금 과연 어떤 기분을 느끼고들 있을까? 부족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비장하게 나섰는데, 총천연색 망토를 깃발처럼 휘날리는 얼빠진 잡것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원주민 청년들의 투쟁은 그 누구에게도 애처롭게 비쳐지지 못할 것이었다. 자칭 히어로들의 죽음은 군경의 죽음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 히어로들이 흉탄에 맞아 쓰러질 때마다 관객들의 심중엔 원주민들에 대한 반감이 적립될 확률이 높다. 히어로들의 바보스러운 이미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력한 무형의 방패였다.

원주민들은 백악관의 압제자에게 투쟁의 존엄성마저 짓밟히고 만 것이다.

현장을 통제하는 군경은 히어로와 민병대의 접근을 가로막지 않았다. 그들이 지닌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존중하겠다는 이유에서. 어쨌든 아직 총격전이 벌어지진 않았으니, 히어로와 헌터들의 집단행동을 평화로운 집회로 간주하겠다는 얄팍한 변명이었다.

더군다나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민병대는, 주정부 내지 연방정부에서 파견한 경찰 감독관의 지도하에 치안유지활동을 벌일 합법적인 권한을 보유한다.

다수의 민병대가 집결한 지금, 대표로 나선 감독관은 대중이 좋아할 법한 미녀였다. 타고난 금발에 푸른 눈, 잘록한 허리와 곡선이 두드러지는 골반 등. 꽉 끼도록 입은 경찰 제복은 제복이라기보다 선정적인 의상에 더 가까웠다.

요컨대 지금 행해지는 건 대중을 상대로 거는 미인계였다. 만에 하나 감독관이 죽기라도 한다면, 아름다움의 노예인 대중은 미인의 죽음에 격렬하게 반응할 터. 이런 이유가 아니고서는 노련한 협상전문가 대신 일반 감독관부터 내보내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언론사에서 띄운 드론이 아마추어적 설득의 현장을 스포츠 경기처럼 생중계했다.

「원주민 여러분! 약속한 대로 인질을 해방하세요!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세요!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이 불행한 사태를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로 끝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미합중국의 법률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입 닥치라는 외마디 절규였다. 피를 토하는 듯한 이 절규야말로 원주민 청년들이 느끼는 비참함을 반영하는 것. 이어 허공에 대고 쏘는 총성에 히어로와 사냥꾼들의 대열이 소란스러워졌다. 두꺼운 투명 방탄방패를 든 사내가 감독관 대표 앞을 가로막는다. 사내의 등짝엔 실드 맨이라는 유치한 예명이 적혀있었다.

원주민들은 인질을 해방하지 않았다. 필시 내부에선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순순히 인질을 해방해야 하느냐고. 이대로 가면 우리의 의거는 사람들에게 웃기는 해프닝으로만 기억되리라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의 비극에 도취되어 극단적인 사고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존재한다.

독립운동가 디아 알 딘의 의거에 대한 알림 샤히디의 평가가 그러했듯, 시도 자체에 의의가 있는 것이라며 무가치한 희생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십상인 것이다. 이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악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그것뿐이라는 생각에서.

내가 보기엔 자포자기하여 삶을 내던져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행동.

「타앙-!」

식생이 드물어 황량한 산간에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어느 인질의 머리채를 붙잡아 끌고 나온 원주민 청년이, 다른 청년의 만류를 난폭하게 뿌리치고는, 수백만 명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보란 듯이 인질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것이다.

훌륭하다. 내게 이보다 더 유익한 전개도 있기 어려울 터.

내 눈엔 좌절감에 울부짖는 마샤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