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190화 (190/561)

#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7)

정신을 잃기 싫다고 버티던 린페이는, 내가 공들인 자극을 간접적으로 누적시키자 인내가 다하여 육욕에 굴복했다. 중독이 심하게 진행된 인간 치곤 오래 참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난 혼절한 린페이를 침대에 던져놓고는, 분 단위로 듬성듬성 끊어지는 쪽잠을 자며 상황전개를 지켜보았다.

환호 속에 치르던 모터케이드 행사를 중단하고 백악관으로 복귀한 미국 대통령은, 평소부터 쌓인 감정이 많던 「사막의 사람들」의 테러를 격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다친 사람이 있든 없든 이것은 명백한 테러 행위입니다! 그 야만인들(Barbarians)이 무슨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훼손하고! 미국의 핵심적인 이익시설을 무단으로 점거했으며! 폭력으로 무고한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 저는 이 자리를 빌려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는 대원칙을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입니다! 저의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총과 폭탄의 야만스러운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처럼 강경한 입장표명은 인질이 다 해방된 이후에 내놓아도 늦지 않은 것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협상도 없이 인질을 해방하겠다고 공언한 마당에, 뭐 하러 성급한 자극으로 판을 엎어버린단 말인가?

그러나.

‘국민의 생명보다 정치적 이익을 우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대통령이 단순히 바보라서 저런 짓을 한다?

그럴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 허나 이는 지나치게 나이브한 분석이다.

내가 보기에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지금 도발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격분한 원주민 행동대원들이 감정에 휩쓸려 폭력을 행사하게끔. 하다못해 그들이 인질의 취급에서 난폭한 모습만 보여줘도 여론을 바꿀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소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는 등의 행동이 인질들의 카메라에 잡히면, 적어도 대통령의 지지층은 단단하게 결집하여 야만인들의 폭력성을 성토할 게 뻔했다.

연방정부가 단호한 대응을 취하는 데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민주주의는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체제가 아니니까.

공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살아온 환경이 열악하여 다혈질이기 쉬운 원주민 청년들은, 욱하는 마음에 휩쓸려 ‘야만성’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었다.

마샤트가 그 고삐를 붙잡을 수 있을까?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조차 백악관에서 직통으로 내려오는 명령을 무시하여 물의를 빚은 사례가 있는데, 원주민 청년들의 행동조직이 얼마나 높은 건전성을 보유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대통령은 계속해서 원주민들의 역린을 찔러댔다.

「대관절 그 「미로 속의 사내(Man in the maze)」라는 건 뭡니까? 그게 신의 이름입니까? 제 귀엔 무슨 디즈니 어트랙션의 이름처럼 들리는군요! 여러분도 저와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결국 야만인들의 야만스러운 원시신앙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의 동화만도 못한 낡은 신화, 체계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부실한 믿음을 오늘날까지도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보수성이지요!」

「밤하늘의 별들을 코요테가 흩뿌렸다고 말하는 원시종교의 성지와! 밤하늘의 별들을 과학적으로 관측하여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천문대 중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반지성주의에 굴복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손으로 문명의 후퇴를 결정지어선 안 됩니다! 저들의 요구에 따라 해당 시설을 포기함은! 세계 천문학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선도적인 지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역당국의 권고를 무시한 채 마스크도 쓰지 않고 대규모 지지자 모임을 강행한 인간이, 여기서는 반지성주의를 입에 담으며 원주민들의 미개함을 비난하는 꼴이 재미있다.

「저는 의문입니다. 애초에 저들이 자기네가 말하는 걸 진지하게 믿고 있기는 한 걸까요? 그냥 겉으로만 그런 척, 전통 신앙을 명분 삼아 돈을 더 뜯어내려는 쇼가 아니라?」

「장담하는데, 저들도 자기네 이야기의 허무맹랑함을 알고 있을 겁니다!」

「선조들의 영혼이 깃들어있었다는 선인장도 그렇습니다! 지난해 저 야만인들이 진정으로 지키고 싶었던 건 그 하찮은 선인장 따위가 아니라 마약과 밀입국자가 넘어오는 밀수 루트였을 테니까요! 제게는 원주민들이 밀수 범죄에 집단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 증거가 없으면 이상할 것이다. 하얀 추장이야 카르텔이라면 질색을 하는 위인이었으나, 2만이 넘는 부족원들 가운데 생각이 다른 계파가 없었을 리 있나.

가난은 악이 증식하는 늪과 같다. 일찍이 성산을 팔아먹은 매족노들이 있었던 마당에, 돈만 된다면 마약을 팔아먹을 소인배야 얼마든지 넘쳐났겠지. 부족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마약중독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일선에서 판매를 맡은 소매상들은 다수가 부족의 일원들이었을 터였다.

누가 알겠는가? 개중엔 복수심에 취한 원주민 마약상이 있었을지. 침략자 백인들에게 고통을 줄 수단으로 마약유통에 투신한 자아도취적인 인간 말이다.

대통령은 비난을 이어갔다.

「신성한 산을 돌려달라는 표현도 같잖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저들의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그 산을 넘기는 데 동의했습니다! 기록이 다 있어요, 기록이! 당시 부족의 원로들이 서명한 계약서가 남아있단 말입니다! 아직까지 구전설화나 주워섬기는 야만인들이 자기네 몫의 계약서를 보관하고 있는지 아닌지까진 모르겠지만, 그건 저들의 사정이지 우리의 사정이 아닙니다!」

「이게 싼값에 팔아서 후회되니 돌려달라는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차라리 값이 떨어진 주식을 매입가에 환불해달라고 하지요?」

「다시 말하건대, 타협은 없습니다! 우리 미국의 자랑스러운 천문대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 할 것이며,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장 강도들은 자기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일갈한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브리핑 룸을 나가버렸다. 성큼성큼 걷는 최고 권력자의 뒤로 수행원과 경호원들이 서둘러 따라붙는다.

나는 그 독불장군의 등을 향하여 갈채라도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백점 만점을 줘도 모자랄 만큼의 분노.

너무 예상대로의 반응이어서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경태는 미리 인력을 파견하여 유사시 원주민 행동대의 도피를 도울 것을 제안했으나, 나는 이 이상으로 꼬리를 밟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편의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설움도 겪고 고생도 해야지. 그래야 독이 바짝 오른 육식동물들이 탄생할 테니.’

말하자면 도피 과정 자체가 1차적인 선발시험이자 인재육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육성과정에서의 낮은 수율은 마땅히 감수해야 할 바. 그래도 내가 미리 판을 다 깔아놓은 만큼, 탈피한 매미들의 생존율은 자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을 터였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시설을 점거한 행동대원 모두가 순교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현장에서 죽어주면 좋고, 미국 특유의 혹형을 받아 영영 감옥에 처박혀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한 집단순교가 들끓게 할 부족 차원의 분노는 더욱 격렬한 집단행동을 야기할 테니까.

폭주하는 행동대의 고삐를 놓친 마샤트가 책임을 지고 실각할지도 모르지만, 부족의 음지를 지배하는 비공식적 추장의 운명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다. 원주민 디아스포라의 눈물 젖은 길이 어느 하나의 갈래에서 내게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이번 건만 잘 풀려도, 런던에 들이박을 직할타격대의 규모에 관해선 근심을 많이 덜어내게 되겠지.

사람의 일을 다 했으니 나머지는 하늘에 맡길 따름이다.

다음 날, 한국을 떠나는 린페이는 아침 뉴스에 자신의 이야기가 등장한 것을 보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면세점에서의 쇼핑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무슨 용기인가 싶었지만.

린페이는 터미널 한쪽에 자리 잡은 한방의학 매장들을 보며 볼멘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한국의 전통 의학을 홍보하는 자리에 외국인 쇼핑객들이 운집한 것을 보고서.

“한국 사람들이 날 문화도둑이라고 욕할 자격이 있나요? 한국의 한방의학은 원조인 중의학(中医学)을 어설프게 베낀 것일 뿐이잖아요? 대체 그 어디에 한국의 전통이 있다는 거죠?”

답답한 한숨을 더하여 이어지는 말.

“동의보감? 그 듣도 보도 못한 잡서가 황제내경보다 더 나은가요? 듣자 하니 일본도 한의학으로 장사를 해먹는다는데, 다들 중국의 문화를 도둑질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아요. 속상해 정말…….”

이렇게 소곤소곤 불평을 하면서도 린페이는 특산 약재와 생약을 취급하는 매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리는 상품은 고라니의 이빨. 한국인들에겐 그저 허구한 날 차에 치이고 작물을 망쳐놓는 유해조수에 불과하나, 세계적으로는 서식지가 중국과 한국밖에 없는 멸종위기동물이다.

하여 고라니의 부산물, 특히 이빨은 꽤 인기가 있는 상품으로 부상했다. 귀한 것이라면 일단 입에 집어넣고 보는 중국인들과, 희소성 높은 재료에 의미를 부여하여 비싼 장사를 해먹는 주술사들의 수요가 상당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건 정부 차원의 상품개발 및 정책적 지원이었다. 달리 상품화할 생물자원도 마땅찮은 게 현실인 까닭.

당장 이 면세구역에도 품속에 공무원증이 있는 사람들이 일군의 외국인들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린페이가 머리를 갸우뚱한다.

“저 하얀 옷 입은 깜둥이(黑鬼)들은 뭘까요? 뭐라서 사람들이 저렇게 굽실거리지?”

중국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인종차별적 멸칭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마라. 주술사 나부랭이들이겠지.”

의복과 소지품들을 보건대 십중팔구 「산테리아(Santeria)」의 사제들일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검은 대륙으로부터 노예로 끌려온 요루바 사람들의 신앙(요루바 이파)이 가톨릭과 뒤섞이면서 탄생한 결과물. 그들의 주술은 원조 격인 요루바 이파와 함께 단기간이나마 원탁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고대 인도의 요가수트라처럼 황금기의 편린이나마 보존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지만.

사제들을 위해 스페인어를 통역하던 공무원이 매장 담당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한다.

“절대로 이분들을 화나게 해선 안 돼요. 알겠어요?”

알겠노라 대답하는 점원들에게선 필요 이상의 조심성과 두려움이 엿보였다. 주술의 신비가 과거보다 무겁게 와 닿는 근래이기 때문일 터였다. 혹여 주술사의 눈 밖에 나서 저주라도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꼬락서니들 하고는.

주술사라는 말을 듣고 움찔했던 린페이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주술사 나부랭이라니……. 오빠는 저런 사람들 안 무서워요?”

“나 같은 사람이 그런 미신에 얽매여서 무슨 사업을 하나.”

“그래도 저는 좀 무섭던데. 찜찜하기도 하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닌지, 린페이는 아까 깜둥이라고 했던 사람이 어디로 갔나 싶을 만큼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장바구니에 넣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근처에 산테리아의 사제가 있으면 다가가지를 못하는 등.

못내 짜증이 난 나는 린페이의 주문에 따라 직접 물건을 담아왔다.

“이거면 되나?”

“네!”

“이런 건 중국에서도 살 수 있지 않나?”

이렇게 묻자, 린페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분하긴 해도, 국산은 가짜가 많고 자연산이 아닌 것도 많으니까요. 또 위생 면에서도 좀 소홀한 측면이 있고……. 그러니 재료는 여기서 사는 편이 낫죠. 요즘 한약방들은 직접 가져가는 재료로도 약을 빚어주거든요. 몰래 바꿔치기하지는 않는지 지켜봐야 하지만요.”

린페이 같은 지우링허우 세대에게도 자국산의 신용도가 마냥 좋지는 못한 모양이다.

시기상 관광객이 많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방의학 매장엔 새로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기(氣) 산업의 급격한 성장 운운하는 언론의 묘사를 단적으로 체감케 해주는 현장이었다. 의사 흉내를 내는 무당들의 교리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보니, 조직의 내부 단속에 더욱 유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장바구니를 계산대로 가져갈 무렵, 나는 말린 고라니 핏줄을 든 검은 피부의 주술사와 눈이 마주쳤다. 산테리아의 사제들과는 별개로 온 듯한 주술사는, 흰자위가 누런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Un mal espíritu dentro de él! Un mal espíritu dentro de él! Un mal espíritu dentro de él!”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소란스러운 외침.

해석하면 “저자의 안에 악령이 있다!”라는 뜻이었다.

주술사의 삿대질과 집중되는 시선에 겁먹은 린페이가 내 팔에 바싹 매달리며 속삭인다.

“저,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대답에 조금이나마 뜸을 들인 이유는, 나 또한 순간적으로 저게 지금 뭔가를 간파하여 지르는 소리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저 늙은 인간이 진실로 내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면, 본 것이 나의 영혼이든 스승새끼의 유해이든, 지금처럼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공포에 젖어 달아났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늙은 주술사의 손가락질은 아무나 찍어 악령이 들었다고 우기며 약과 두려움을 팔아먹는 장사치의 사기극일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하필 나를 지목한 것은 그저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 터이고.

하찮은 사이비 장사치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나는 기분이 매우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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