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6)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다이아몬드 카지노의 와우 키울릭 의거(義擧)는 현지시각으로 9시경에 시작될 것이었다. 그래야만 국립 천문관측소의 직원들과 명소를 찾은 관광객들을 고립시킬 수 있으니까.
물론 인질극을 벌이는 건 여론전을 끌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놓아줄 때 놓아주더라도 일단 시작할 때에는 인질이 있어야 유리하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대형 사건들 가운데 존재감을 확보하려면 인질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라 할 수 있으니. 우선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확 당겨 온 연후에, 인질들을 평화롭게 해방해주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우호적인 여론의 형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라면 그리하리라는 생각이긴 하나, 추장이 직접 고른 후계자가 이 정도도 계산하지 못할 리는 없을 터.
산악표준시와 동부표준시의 시차가 두 시간이니, 9시에 거사를 개시하면 ABC, NBC, CBS 등의 주요 뉴스채널들은 포스 아워(4th hour/11시부터 정오까지) 생방송으로 특종을 보도하게 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대통령의 날 기념행사들 또한 동부표준시를 기준으로 11시부터 거행된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모처럼의 모터케이드(Motorcade)를 예고한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기대했던 만큼의 관심을 받지 못하겠지. 방역당국의 권고를 무시한 보람도 없이.
엄밀히 말해 미국 대통령의 날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탄생을 축하하는 국경일이며, 의미를 확장하더라도 역대 모든 대통령들을 함께 기념하는 날이지만,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내심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마땅한 날로 여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테러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아주 많이 더러울 것이다.
미 산악표준시로 오전 9시면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1시가 된다.
이때쯤이면 린페이를 다시 재워놓고 편하게 사무를 보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이 귀찮은 관리대상은 더 이상의 성관계를 거부했다.
“오늘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깨어있을 거예요. 잠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자도 되는 거니까. 아까도 본의 아니게 충분히 잤고…….”
“미안하지만 나는 밤을 새기 곤란한데.”
“……이이잉. 같이 깨어있어 줘요.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잖아요. 오빠랑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길게 기억하고 싶단 말예요.”
나를 보는 눈이 불그스름하게 젖어든다. 여기에 더해지는 작은 훌쩍임. 제 딴에는 애절함을 애써 누르는 애교인가 본데, 받는 입장에선 귀찮기 짝이 없는 투정이었다. 착실하게 깊이를 더해가는 상애상사를 연출하는 와중에 싫다는 걸 강제로 깔아서 재우기도 애매하고.
말초적 쾌락에 어지간히 중독된 상태일 터임에도 이러는 걸 보니, 뭔가 계산이 안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나마 스마트폰에 미리 손을 써놔서 다행이군.’
앞서 린페이가 한 차례 정신을 잃었을 때, 나는 린페이의 폰에 트로이의 목마를 심어놓았다. 린페이에게 지령을 내리던 상대가 정확하게 누구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시능력을 확보해둬서 나쁠 것은 없겠다 싶었기 때문.
이는 먼저 중국에 머무를 때에도 가능한 일이었으되, 갑작스럽게 큰돈이 생긴 린페이의 사치엔 핸드폰의 교체가 포함될 게 뻔했으므로 그 당시엔 손을 쓰지 않았었다.
린페이는 내 눈치를 보았다.
“혹시 제가 싫다고 해서 화나셨어요?”
“무엇을?”
“있잖아요. 둘이 같이 하는 거.”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오빠는 하고 싶었던 거죠?”
그럴 리가. 그러나 앞서 저가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입에 담았던 린페이는, 내 속을 멋대로 단정 짓고는 쓸데없는 짓을 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렇게라도 풀어드릴게요. 자…….”
스스로의 혐오스러움을 모르는 유기체가 손과 혀를 써서 내게 반응을 강요한다. 입맞춤을 할 때에도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의 혀는 그 형태와 감촉이 환형동물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었다. 점액질로 뒤덮여 뼈대도 없이 물컹거리는 원통형상의 버러지. 그러므로 린페이의 미숙한 혀 놀림은 살갗 위로 커다란 거머리가 한 마리 기어 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너머에 인간이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생명」의 진보로 말미암아 육체에 대한 마법적 통제가 강화되지 않았다면, 오로지 의식적인 자기제어와 경험으로만 극복해야 했을 곤욕스러운 시간.
아니, 그랬으면 애초에 이런 상황으로 내몰릴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겠지.
처음 만났을 때의 독기가 사라진 린페이는, 내 기미를 살펴가며, 수줍어하는 정성과 정성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으로 봉사 아닌 봉사를 이어갔다. 내가 거기에 맞춰 연기를 하고 육체를 조율할 때마다 행위자의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만개한다. 행위의 도중에 손끝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와, 저 의외로 이런 쪽에도 소질이 있었나 봐요!”
“그래, 정말 잘하는구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개처럼 좋아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이러는 사이 시계는 어느새 1시 14분을 가리켰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본사 비서실에서 사내 메신저를 통해 뉴스 링크를 공유해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 아직 제대로 된 뉴스가 뜬 것은 아니지만, 단신(短信) 속보로나마 바보퀴바리(와우 키울릭)에서의 테러 소식이 공중파를 탄 것이었다.
드디어.
링크로 접속한 NBC 채널에선 라이브 뉴스 토크쇼 진행자들이 갑자기 들어온 속보에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관련 헤드라인을 다루는 시간이니까.
무릎을 꿇고 있던 린페이가 토라진 목소리를 낸다.
“오빠도 참……. 지금은 저한테만 집중해주시면 안 돼요?”
나는 불식간에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키고서 무난한 대꾸를 해내었다.
“미국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고 한다.”
“네? 테러요?”
“너도 봐라.”
미국이 엿을 먹는 이야기는 언제나 중국인들의 즐거움이라, 언제 토라졌냐는 듯 표정을 바꾼 린페이는 냉큼 올라와서는 내게 기댄 채 몸을 기울여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한국어는 몰라도 영어는 그럭저럭 구사할 줄 아는 여자였다.
“앗, 진짜네?”
얼마나 죽었을까? 많이 죽었겠지? 많이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중얼거리는 입가엔 흥미진진한 미소가 걸려있다. 불특정다수의 죽음을 즐거움으로 인지하는 새까만 애국심이었다.
테러의 본질은 폭력과 파괴를 통한 정치적 선전행위다. 그리고 특정 사안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첫인상이 어떠한가에 큰 폭으로 좌우된다. 고로 성지 탈환의 최전선에 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의거를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고, 이에 따라 뉴스가 다루는 정보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새로운 소식이 확인되기까지 했던 말 하고 하고 또 하는 일반적인 속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뉴스가 되었단 뜻이었다.
첫 단신이 뜬 후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방송국으로 성명문이 전달된 것은, 마샤트의 계획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잘 훈련된 정예를 데리고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시작부터 뒤틀리기 마련인 것이 작전계획이건만, 교육수준이 낮은 행동대원들을 데리고 잘도 저렇게까지 해내는구나 싶을 지경.
비록 아직 관록은 부족할지언정, 추장의 후계자로서 능력과 자질은 모자람이 없는 모양이다.
“에이, 아무도 안 죽었잖아…….”
진입로가 끊어졌을 뿐 사상자가 없다는 소식에 실망을 금치 못하던 린페이는, 이어 변조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성명문에 귀를 기울였다.
「친애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대통령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에, 우리 「와우 키울릭 회복 운동」이 유감스러운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시작이다. 변조된 음성은 여성의 목소리였고, 이는 그 자체로 성명문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자칭하는 단체의 이름에도 공격적으로 느껴질 요소가 없다.
「우리 「와우 키울릭 회복 운동」은 현지시각 9시, 여러분이 「키트 피크 국립천문대」라고 부르는 천문관측시설의 유일한 진입로를 차단하여 해당 시설로의 차량 통행을 봉쇄하였습니다. 도로를 차단하는 데 불가피하게 폭발물을 활용하기는 하였으되, 그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하진 않았으며, 낙석으로 막힌 도로를 제외하면 재산피해 또한 없었음을 먼저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폭파 직후 시설을 점거한 무장인원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설 점거 그 자체에 있으므로, 일시적으로 억류된 상태인 시설의 근무자들과 관광객들은 금일 중으로 안전하게 해방시켜 드릴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와우 키울릭 회복 운동」은 북미 원주민의 일파인 「사막의 사람들」 중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의기를 모아 수립한 단체이며, 수립 목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부족의 신성한 산 「와우 키울릭」을 부족의 품으로 되찾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짐작하시겠지만, 「키트 피크 국립천문대」가 위치한 장소는 신성한 산의 중심지, 우리 부족이 신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며, 그중에서도 감마선 관측시설이 들어선 봉우리는 부족의 시조이자 조물주인 「미로 속의 사내」가 머문다고 전해지는 성역입니다…….」
이후로 이어지는 내용은 신성한 산을 영구적으로 조차(租借)하는 계약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조항들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에이커 당 연 25센트로 고정된 대여료에 재협상을 할 권한도 없다는 내용을 들은 린페이는 마치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와, 미국 하는 짓 좀 보세요! 누가 영국의 사생아 아니랄까 봐 정말……. 우리도 홍콩 문제가 있다 보니 저 사람들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네요.”
시끄럽기는.
「우리는 지난해 조상들의 영령이 잠든 신성한 매장지를 상실했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어왔던 오래된 선인장들이 무차별적으로 폭파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그것이 백악관에서 내려온 지시였으니까요.」
「그런 우리이기에 신성한 산의 회복이 더욱 절실합니다. 신성한 산 와우 키울릭은 부족에게 남은 최후의 성지이자 정신적 지주입니다.」
「우리는 와우 키울릭을 되찾음으로써 분열된 동포들을 하나로 묶고 해묵은 상처를 달래어 건설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와우 키울릭의 회복은 하얀 추장이 반평생을 꿈꿨던 염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고작 2만밖에 안 되는 부족 내에서조차 차별과 배척이 난무하는 현실을 극복하는 첫걸음이 되리라고.
하얀 추장의 피부색은 강제적인 인종동화정책의 산물이다. 미국 정부가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고, 학생들을 도시의 학교로 보내어 백인의 정신을 가르치고, 원주민 여성을 백인 남성과 강제로 결합시키는 식으로 원주민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했던 더러운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빈곤과 소외 속에서 악성(惡性)을 함양한 원주민들은 백인의 교육을 받은 동포들을 적대하고, 피가 섞인 혼혈들을 차별하며, 도시로의 진출을 부족공동체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는 등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한 행보를 걸어왔다.
하얀 추장에겐 연방정부가 발급한 인디언 혈통증명서(CDIB)가 있었으나, 부족의 보수적인 일파에게 그 증명서는 침략자들이 멋대로 발행했을 뿐인 무가치한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부족의 일원을 인정할 권리가 어찌 부족이 아닌 연방정부에게 있단 말인가?
나는 추장의 지위가 공고하지 않았을 적에 추장의 별명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멕시칸이라고 했었지, 아마?’
피부색이 밝다는 이유로 멕시코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너는 피부가 밝고 머리카락이 가늘며 광대뼈가 높지 아니하니, 우리 아키멜 아덤(Akimel O’odham/아덤 인종)에 속하지 않는다고.
추장은 그러한 차별을 부족에 대한 공헌으로 덮어버렸으나, 그렇다고 차별의 뿌리가 되는 악성이 사라졌을 린 없었다. 어디서나 약자들은 악에 대한 면역력이 낮다.
그러니 마샤트는 와우 키울릭을 원했으리라. 할아버지 평생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또 추장의 후계자로서 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비중을 따지자면 뒤쪽의 이유가 더 무거울 터.
하얀 추장의 은퇴는 그만큼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잘 준비된 계승이라도 불협화음이 일어났을 것인데, 지금은 과연 어떻겠는가.
마샤트에겐 업적이 필요하다. 부족 자치정부를 포함하여 부족 내 다른 계파들의 시기와 질투와 견제와 반발을 무마하며 할아버지의 유산을 온전히 장악하게 해줄 커다란 업적이.
“가엾기도 해라…….”
호소를 들은 린페이의 반응만 봐도 마샤트의 미디어 전략은 방향성을 제대로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전략이라도 상대가 협상을 모르는 미치광이 독불장군이라면, 그리고 그 상대와의 힘의 격차가 압도적이라면 의미가 사라진다. 대중의 동정은 유효기간이 길지 않으며, 부족 내에선 반드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배신자들이 나올 터이고, 역병의 유행과 치안 불안정으로 시기마저도 좋지 못한 상황.
내가 보기에 마샤트의 실패는 여전히 정해진 운명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