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5)
샤워를 마치고 배달음식으로 허기를 달랠 즈음의 린페이는 저물녘 산정(山頂)의 팔각정에서 느꼈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낸 상태였다. 갓 씻은 나신에 하얀 샤워가운만 두른 중국 여자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지락대며 나를 흘낏거렸다.
“오빠랑 하는 건 다 좋긴 한데, 할 때마다 제가 정신을 잃으니까 그게 좀 그래요……. 내가 내 서방님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야 신경이 쓰이겠지. 나는 꾸미지 않은 정직함을 던져주었다.
“신경 쓰지 마라. 난 정신을 잃은 여자를 좋아하니까.”
문자 그대로 쥐죽은 듯 쓰러져있는 게 더 편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다른 의미로 오해하여 두 눈이 동그래진 린페이는 뒤이어 전신의 혈류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뭐, 뭐예요 그게. 오빠는 변태야.”
“그래서 싫은가?”
“……아뇨.”
시선을 발끝에 두고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와중에 입가엔 수줍어하는 미소가 머물러있다. 이번에도 임기응변으로 내놓은 정상인 흉내 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냥감이 자신감을 잃으면 가오슈센은 다른 안전장치를 강구하려 들 터였다. 그 경우에도 어떻게든 맞춰주기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번거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틀어놓은 뉴스는 대화를 밤늦도록 이어가는 데 필요한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해주었다. 근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자기소개가 겨우라 하는 린페이는, 내게서 뉴스의 내용을 들으며 각각의 화제에 대한 감상 및 소견을 내놓았다.
“한국이 안전한 나라라고 들었는데 범죄가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줄은 몰랐어요. 뉴스만 봐선 오히려 우리 중국만도 못한 느낌이 드는걸요? 능력자들의 범죄를 억제하려면 역시 강력한 통제력이 필수인 것 같아요.”
검열을 거쳐 나오는 중국의 뉴스보다 한국의 뉴스가 더 어지러운 건 당연한 일. 북한에서 도망쳐 나온 새터민들이 TV를 보고 남조선의 흉흉한 세태에 경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지적하는 대신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내 무관심과 회의감을 보여주었다.
「변이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강화된 가운데,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캠프 험프리스 영내식당 「플라이트라인 탭 룸」에선 주한미군 장병들 수십 명이 모여 노 마스크 댄스파티를 벌인 사실이 알려져, 작년과 같이 미군 부대가 방역관리의 큰 구멍으로 남아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뉴스에 미군이 거론되자 린페이는 대놓고 우월감에 찬 조소를 머금었다.
“황당하네요. 중국군은 규율이 엄해서 절대로 저런 일이 없을 텐데.”
“그럴지도.”
“한국인들은 저런 꼴을 보면서도 왜 주한미군을 받아주고 있는 건가요? 미군 병사들 중엔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무식쟁이들도 많고 범죄자 출신도 많아서 이래저래 사고를 많이 치잖아요? 차라리 같은 자리에 중국군이 주둔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요?”
“단순히 병사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서?”
“음, 그것도 그거지만요……. 그 뭐지, 우리 중국도 일대일로로 다른 여러 나라에 기지를 얻었는데, 거기서 돈 받는다는 소리는 못 들었거든요. 오히려 우리가 돈을 주는 쪽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래서 일대일로에 참여한 나라들은 다 우리 중국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한국도 그러면 좋잖아요? 돈도 받고 북조선에 대한 평화도 보장받고. 그리고-”
“또 있나?”
“한국이 주한미군을 두는 데엔 우리 중국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도 있겠죠?”
“어느 정도는.”
“그럼 더더욱 중국군을 받아야죠! 확실하게 중국 편이 되면 중국이 한국을 공격할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왜 괜히 미군을 둬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지우링허우(九零后/90년대 이후) 세대 중국인의 전형적인 현실인식은 나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도록 만들었다. 일대일로에 참여한 국가들이 중국을 좋아한다니? 어지간한 스탠딩 코미디보다도 더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말이다.
내 웃음을 오해한 린페이는 늘어놓는 언변에 자신감을 더했다.
“제 말이 맞죠? 중국은 만력조선전쟁(万历朝鲜战争/임진왜란) 때도 조선을 구해준 형님 나라이고, 항미원조전쟁(6.25) 때도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주었던 은인인데 이제 와서 굳이 한국을 점령하려고 할 리가 없잖아요? 한국인들이 공연히 미국 편을 드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공연히?”
“예. 공연히. 제가 보기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한계가 아닌가 싶어요. 자유가 지나쳐서 혼란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중들은 무엇이 자신들을 위한 최선인지도 모르게 되어버리고요.”
“그러니 중국식 인민민주주의와 집단지도체제가 더 낫다?”
“그럼요. 지금 미국이랑 유럽이 신형관상병독(新型冠状病毒/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무슨 꼴을 겪고 있는가를 보면 자명하잖아요? 아, 마침 저기도 나오네요.”
린페이가 가리키는 TV 화면은 마스크를 불태우며 방역 봉쇄 반대시위에 나선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굳이 기자의 보도를 듣지 않아도 한눈에 목적을 알 수 있는 시위. 한 시위자는 이런 내용의 피켓을 높게 치켜들었다.
「나에겐 호흡의 자유가 있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영어로 된 문장을 읽은 린페이가 가벼운 경멸감을 드러냈다.
“작년에도 저러더니 전혀 발전이 없어 보이네요. 저래놓고는 우리 중국이 역병을 수출했다고 욕을 하는 게 말이나 되나요? 알고 보니 작년의 첫 유행도 최초 발원지는 이탈리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던데, 유럽이든 미국이든 다 우리를 탓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으니…….”
린페이는 한심하다는 듯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은 질투라고 봐요. 우리가 자기네보다 우월해 보이니까 추월당할까 봐 조바심을 내는 거죠. 앞서가려는 중국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려 보려고.”
이게 대학까지 마친 고학력자의 식견이었다. 나는 또 한 번의 의식적인 정상인 흉내로서, 손끝으로 린페이의 곡선을 훑으며 대꾸했다.
“네 말이 다 옳다고 쳐도, 이 나라에 중국군이 들어오는 건 곤란하군. 내 사업에 지장이 생기거든.”
“앗, 그렇구나…….”
무슨 말이든 다 받아주기만 해선 ‘린페이가 관찰한 나’의 신뢰도가 낮아진다. 이번에야말로 내 심기를 건드렸는가 싶어 눈을 굴리던 린페이는, 내 담담함에 안심하여 내 몸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럼 저도 반대할래요.”
“입장을 너무 쉽게 바꾸는 것 아닌가?”
“중국은 한국 따위 없어도 괜찮지만, 저는 오빠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히힛.”
뉴스는 이후로도 중국인의 비뚤어진 우월감, 그리고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밝은 나라 맑은 병역 - 병역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이러한 표어를 올린 서울지방병무청의 정문 앞에선 여러 무리가 모여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각 무리마다 연령층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개중엔 물론 내가 후원을 지시한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외신을 포함하여 다양한 언론매체의 카메라들이 그 모습을 담는 가운데, 마이크를 든 청년 하나가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5일, 세계보건기구 WHO는 각성능력자의 능력 사용과 불사암 발생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으며, 불사암 예방을 위해서는 가급적 능력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권고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국방부와 보훈처는! 각성능력 사용과 불사암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무 중 불사암 발병자들에 대한 공상자 인정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검사와 치료 모두 발병자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정부는 점진적인 처우 개선이 있으리라 약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의 공수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이 나라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해왔습니까?!」
「한국전쟁 전사자 유족에게 사망보상금으로 5천 원을 주고! 가혹행위로 자살자가 나오면 죽은 사람이 문제였다고 우기고! 손가락이 잘려도 상이등급을 내어주지 않고! 이명이나 허리디스크, 무릎연골 파열 같은 질환은 공상으로 봐줄 가치도 없는 평범한 것들이고! 군 병원에서의 실수로 생긴 병도 군 병원에서 치료하지 않으면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고!」
이러한 시위를 배경으로 취재에 응한 나이 젊은 행인은, 시위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에게 냉소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저기 있는 사람들이 뭘 믿고 나라를 위해 헌신합니까? 발목이라도 잘리면 또 발목동상이나 세워주겠지. 치료비는 전처럼 다른 병사들 월급에서 뜯어내고.」
이는 북한의 비무장지대 목함 지뢰 도발 사건과 그 사후처리를 두고 비꼬는 소리다. 동상을 만들 재원을 댄 것이 민간 기업이므로 군 당국으로선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사후처리가 형편없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못할 사실. 발목동상이라는 말에 갸우뚱했던 린페이는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역겨워요. 우리 중국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인데……. 이게 그 잘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인가요?”
당연히 중국에선 상상하기 어렵겠지. 인민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닌 당의 군대이고, 중국공산당의 핵심적인 권력기반 중 하나니까. 군경만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정권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중국에서도 퇴역군인들의 처우는 바닥을 긴다. 당의 입장에선 쓸모가 다한 사냥개들이기 때문이다. 전상자와 공상자야 숫자가 적어 비용 대비 사기관리의 효율이 좋으니, 보여주기 식으로 공을 들이고 있을 따름. 게다가 복무 중 자살자는 공무로 인한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원칙이야 어쨌든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까지는 알 리가 없는 린페이는 제 나라가 마냥 자랑스럽기만 한 중국인이었다.
“우리 중국은 남녀를 불문하고 군대에 못 들어가서 안달인데, 한국에선 그 반대인 이유를 알 만하네요. 저 같아도 가기 싫겠어요. 무슨 대우가 저 모양이람?”
이렇게 말한 린페이는 곧이어 제멋대로인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은 정말 미군이라도 없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만든 의욕 빵점 군대가 전쟁이 나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요?”
끄덕끄덕 하면서 혼잣말처럼 이어가는 조잘거림.
“한국인들이 왜 주한미군을 받아들이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요. 자기네 나라 군대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거였어. 하기야 작은 나라에서 큰 군대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여기까지 읊은 린페이가 내게 묻는다.
“오빠도 군대에 다녀오셨어요? 한국 남자들은 누구나 군대에 가잖아요.”
“난 면제다.”
“네? 왜요?”
“부모가 없어서.”
“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연민이 담긴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참 불쌍하네요. 다들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그래도 자라 같은 인간이 다스리는 야만스러운 미국보단 우리 중국 같은 문명대국으로 오는 편이 더 나을 텐데. 말이 통하는 조선족도 있고.”
한국의 헌터 인력을 빼내려는 미국의 시도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 전엔 각성능력자의 병역의무나 헌터자격 획득제한 등으로 인한 난민신청을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까지 나온 상황. 백악관의 미치광이가 언제나처럼 의회와의 사전조율 없이 즉흥적으로 내지른 말이긴 하지만, 미국의 심각한 각성자 부족을 고려하면 조만간 정식으로 제도적인 무언가가 갖춰질 가능성이 높았다.
‘멕시코나 베네수엘라 같은 데서 들어오는 능력자들보다야 한국의 능력자들이 더 좋겠지. 교육수준은 높고, 질서의식과 준법정신도 더 낫고.’
이는 한국 정계에서 미국이 우방의 미래를 훔치려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였다.
덕분에 헌터 자격을 군필자에게만 부여하려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으니, 나로서는 환영해마지않을 일이다.
국가적 강제노동의 단맛에 중독된 정부와 내 일만 아니면 되는 다수의 국민들에겐 다소 재미없는 전개일지라도.
TV 화면 속에서 태극기를 쥔 중늙은이 하나가 노호성을 지른다.
「이 되먹지 못한 종북좌파 빨갱이 새끼들아! 느이들이 지금 한가하게 권리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드냐! 초능력을 얻은 2백만 북괴군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엿보고 있는 마당에! 한시라도 빨리 입대를 해서 가족을 지키고 나라에 이바지할 생각을 해야지!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하나같이 배가 처불러서는-」
애국심이 아닌, 그저 본인의 생존권과 이익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뿐인 외침.
나는 뉴스가 아니라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