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의사, 열사, 그리고 테러리스트 (14)
린페이가 잠들어있는 사이, 내게는 바다를 건너온 통화요청 하나가 전달되었다. 요청자는 마르띠네즈 제독. 시기가 시기이고, 자빠져있는 린페이가 스페인어를 구사하진 못할 터이므로, 나는 바로 전화를 걸어 용건을 확인해보았다.
제독이 꺼낸 서두는 이러했다.
「엘 무니. 혹시 푸에르토 바야르타에서 합법적인 사업장들을 경영해볼 마음은 없소?」
엘 무니라. 간만에 듣는 별칭이로군. 나는 무슨 의도일까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야 돈이 된다면 사양할 이유는 없지요. 다만 좀 갑작스럽기는 하군요.”
「좋은 기회가 눈에 띄어 연락을 드렸을 뿐이오.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또 카르텔 놈들이 더러운 자금력으로 차지할 게 뻔하니, 차라리 당신이 맡아주는 게 낫겠다 싶었지. 당신은 적어도 카르텔을 멀리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고, 내 시선이 닿는 협력자이기도 하니까.」
“뭐, 좋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라는 게 뭡니까?”
「문자 그대로의 사업장들이오. 호텔, 별장, 카지노, 식당, 쇼핑몰, 농장과 양조장, 수산물 가공업체, 골프장, 투우장 등등……. 대부분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카르텔의 소유였으되, 이제는 주인이 없어져 불황기의 공공 매물로 나온 자산들이지.」
“흠. 유감스럽게도 말씀만 들어선 별로 매력이 없군요. 사업타당성을 분석해봐야 할 일이긴 합니다만, 이 시국에 그런 사업장들을 인수해서 얼마나 수익이 나겠습니까?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겠지요.”
「정말로 그렇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생각해보시오. 이 도시를 숫제 지배하다시피 하던 카르텔의 유산이란 말이오. 그건 즉 그 유산을 승계하는 자 또한 지역사회에 대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뜻이지. 사업장만이 아니라 그 사업장에 얽힌 사회적 관계망을 함께 인수하는 것이니까. 당신이라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거요.」
“과연.”
「비록 엘 무니 당신이 외국인이긴 하지만, 내가 당신의 지위를 보증하고 당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상, 이 도시에선 누구도 당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터. 특정 항구를 사실상의 사유지로 삼는 수준의 영향력이라면, 당신 같은 밀수업자들에겐 꽤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겠소? 하다못해 중계만 맡아도 수익이 얼마란 말이오?」
머리가 굳기 쉬운 군인 치고 말을 제법 잘하는군. 지연과 혈연이 중국만큼이나 강하게 작용하는 멕시코 같은 나라에선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다.
더욱이 내가 승계할 고용엔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폭행, 살인, 절도, 방화, 납치, 감금, 앵벌이, 인신매매, 마약 소매, 불법적 상품 운송 따위의 용역을 수행하는 데 익숙한 피고용인들이 포함된다. 기존 카르텔의 보조 인력으로 기능하던 시카리오 예비군들. 이렇듯 도덕적 둔감성을 갖춘 인적자원 인프라에 지역사회의 폐쇄성과 배타성이 더해진다면 그 자체로 꽤 매력적인 상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여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제안해주신 사안의 손익은 결국 항구의 물동량에 따라 결정 날 일입니다. 다른 것들은 곁가지에 불과하지요.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의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평하기는 어렵군요.”
「걱정 마시오. 물동량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으니.」
제독이 이어서 입에 담는 건 정계와의 연줄이었다.
다름 아닌, 배불뚝이 페루쵸와의 연줄.
「이번 자산매각을 주관하는 페드로 산체스 시장은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인물이오. 보궐선거로 당선되어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바꿔 말하면 임기 중의 성과에 따라서는 주정부나 연방정부로의 진출도 점칠 수 있다는 뜻이지. 혹은 재선을 통해 이 지역의 확고한 터줏대감으로 거듭나거나.」
“즉 항구에 대한 지배력과 정치적 연줄을 한꺼번에 손에 넣을 기회다?”
「바로 그렇소. 당신이 쓰는 돈은 그의 정치적인 성과로 직결될 테고, 그 후의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나와 당신이 더 많은 사업을 벌이기 위한 밑천이 되어줄 터. 이거야말로 상부상조의 선순환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난 무심코 나오는 실소를 삼켰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이렇게 대놓고 던질 줄이야.
‘하긴, 이 중늙은이는 페루쵸와 나 사이에 얽힌 일을 모르니까.’
참으로 웃기는 상황이 아닌가. 나를 이용해먹으려는 의도가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한층 더 우습다. 표정관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제법 곤욕을 치렀을지도.
이쪽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제독은 느리고 진중한 판촉을 이어갔다.
「엘 무니 당신도 「멕시코의 기름」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았을 거요. 나의 조국은 검은돈과 권력의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한 자에겐 냉혹하기 짝이 없는 시장이지. 하여 기름부음을 어디에서 받아야 할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외국계 기업들은 무슨 사업을 추진하든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소. 훗날 그런 자들을 위해 중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반쯤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요」
“동시에 제독께선 퇴역하거나 전역한 부하들의 일자리를 확충하시고 말입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리되겠지.」
그 모든 영향력을 사실상 제독 당신이 처먹는 거 아니냐는 찌르기에, 마르띠네즈 제독은 짧은 침묵을 곁들여 긍정하고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나 어차피 나도 당신에게 인질을 잡힐 입장이 아니오?」
“인질?”
「그렇소, 인질. 브로커로서의 당신이 해외에 일자리와 주거를 잡아주기로 한 나의 옛 부하들. 내가 당신의 권리를 침해하면 당신은 그들의 목숨으로 내게 보복을 가할 수 있겠지. 무기를 거래하는 자가 죽음을 거래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
“흠. 그건 꽤 공정하게 들리는 말씀이로군요.”
「실제로도 공정하지 않소? 나는 당신의 자산을, 당신은 퇴역한 내 부하들을 인질로 잡는 거요. 우리 사이가 그런 종류의 담보설정 없이 신용만 가지고 사업을 도모할 만큼 깊은 건 아니니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제독이 사족처럼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 내겐 카르텔의 공백을 차악으로 채우려는 의도도 있소.」
“제 회사가 차악입니까?”
「정확히는 당신과 나의 합명회사(Sociedad colectiva)가 차악이라 해야겠지.」
“합명회사라…….”
영어로는 파트너십 컴퍼니(Partnership company). 둘 이상의 무한책임사원으로 구성되는 형태의 회사. 엄밀히 말해 나는 출자금에 대한 유한책임을 질 뿐이므로 합명회사라는 표현도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제독이 담아내고자 하는 의미는 알 만했다. 자기는 그만한 책임을 질 의사가 있노라고.
「얕은 속을 간파 당한 마당에 새삼스럽게 포장하진 않으리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건 현지사정과 불법적 사업에 어두운 인수자들은 감당도 못 할 매물들이오. 하다못해 매출이나 상품 재고처럼 기본적인 사항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겠지. 배운 게 사기와 도둑질밖에 없는 피고용인들이 합심하여 고용주를 등쳐먹을 테니.」
이는 사실 나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굳이 통제하려면 통제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 낭비해야 하는 본사 인력이 지나치게 많아질 것이 문제. 그러니 내가 카르텔의 자산들을 인수한다 한들 실질적인 경영인은 관리 인력의 제공자인 제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걸 공영화하거나 쪼개어서 팔아치웠다간 자잘한 카르텔 꿈나무들이 수십 수백 개씩 출현할 거요. 내 조국은 청소년들의 가장 큰 꿈이 카르텔 정식 조직원인 지옥이니까. 그때는 오히려 하나의 통합된 조직을 상대하기보다 귀찮아지겠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모여 있을 때가 편하지요.”
「내 말이 그 말이오.」
이즈음에 정신을 차린 린페이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이쪽을 기웃거린다. 멍한 낯짝과 그 안쪽의 생체징후를 보건대, 예상했던 대로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눈치다.
조금 더 자빠져있을 것이지.
내 손짓을 본 린페이는 반색을 하곤 쪼르르 와서 내 옆으로 파고들었다. 난 그 허리에 팔을 감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정리하자면 저는 간판과 자본을 내어주고, 제독께선 제 권리를 대행할 세리(稅吏)들의 우두머리로서 군이 직접 소유해선 안 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향유하고. 맞습니까?”
「그렇소. 바람직하지 못하기에 차악이라 하는 것이지.」
“하면 「바닥의 권리」는 어느 정도로 설정하실 생각이십니까?”
바닥의 권리. 카르텔이 상인들에게서 거둬들이는 자릿세. 엘 후에고는 그 자릿세가 일반적으로 영업이익의 10퍼센트라 말했었다. 장사나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중과세인지 알 것이다.
침묵하던 제독이 묻는다.
「그걸 꼭 받으셔야겠소?」
“그럼 받지 말아야겠습니까?”
「…….」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제독. 애당초 비공식적인 이익을 먼저 거론하신 게 당신이신데 거기서 자릿세를 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카르텔의 폭력에서 보호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결국은 내 몫의 지출이자 당신 부하들의 급여가 될 텐데 말입니다.”
물론 카르텔 새끼들처럼 무식하게 직종 불문하고 영업이익의 1할을 뜯어낼 생각은 없다. 쥐어짜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그토록 도가 지나치게 쥐어짜면 상권이고 나발이고 시장이 바닥까지 말라붙어 이익의 총량이 감소해버리고 마니까.
그러나 현대적 봉건영지의 농노들은 영업이익의 10퍼센트를 순이익의 10퍼센트로만 바꿔줘도 천사 같은 주인나리가 오셨다며 찬미의 노래를 부를 것이었다.
애국자인 제독은 항구의 주민들을 바닥의 권리라는 족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나 같은 사업가가 왜 그런 선의에 어울려줘야 하나?
「이보시오, 엘 무니.」
제독이 무겁게 입을 뗀다.
「이 나라는 지금 악몽 같은 불황의 늪에 빠져 있소. 단돈 10페소가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단 말이오.」
10페소면 현재 환율로는 5백 원이 안 되는 돈이다.
「그런 와중에 가뜩이나 자생적인 산업이랄 게 없는 관광도시에서 바닥의 권리까지 뜯어낸다면 어떻게 되겠소? 자선을 베풀라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이익을 취하라고 권하는 거요.」
“그래서 여쭤봤잖습니까. 어느 정도로 설정하려 하시느냐고. 카르텔 머저리들처럼 말도 안 되는 세율을 매기는 건 저로서도 탐탁잖은 일입니다.”
「음…….」
“세금은 상하관계와 지배관계를 각인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니, 아예 안 받는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없앴던 걸 부활시키는 건 줄였던 걸 늘리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까. 제가 태어난 나라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도 있지요.”
본래는 영화 대사에서 비롯된 유행어라고 하지만, 그만큼 사람의 생리를 꿰뚫었기에 유행어가 된 것이다.
“부패한 관료들과 마약군벌들에 맞서 보호를 제공하는 건 결코 무상의 용역이어선 안 됩니다. 그걸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고마운 마음도 사라지지요.”
「…….」
“사업가로서, 그리고 장차 동업자가 될 사람으로서 조언하는데, 당신의 헌신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언가에 값을 매기지 않으면 그게 정녕 무가치한 것인 줄 아는 멍청이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당신의 조국은 한층 더 그러하고 말입니다.”
「……맞는 말이군. 내가 군대와 사회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었어.」
“카르텔이 군벌을 형성하는 나라에서 제독이 군벌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참에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충고 고맙소. 보호비는 다시 검토해보도록 하리다.」
“그러시죠.”
「아까는 미안했소.」
“괜찮습니다. 이런 건 원래 당하는 놈이 병신인 거지요.”
「확인이 늦었소만, 이 일을 진행한다고 가정할 때 귀하의 투자여력은 충분하오?」
“얼마가 필요합니까?”
「1차로 매각하는 압류자산들의 감정가 총합은 47억 페소 가량이지만, 공개매각이 여의치 않고, 하더라도 여러 차례 유찰될 게 뻔한 상황이라……. 단일 협상 대상자가 블록 딜로 넘겨받는다면 10억 페소 어림으로도 가능하리라 예상하고 있소. 시 당국에서도 제값을 받기보다는 급전 마련과 고용 및 치안 유지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는 사안이고.」
제독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시정 내부정보.
“10억 페소면 4천 4백만 달러쯤 되는군요. 그 정도 자금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집행 가능합니다만, 그 돈을 다 내기는 손해라는 기분이 듭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너무하다 하겠으나, 나는 엄연히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 국내시장에 매물로 나온 베크룩스의 동형함은 최초 감정가가 75억이었지만 최종 매각가는 5억 9천에 불과했으니까.
관광용 크루즈의 가치폭락은 관광항구의 가치폭락을 간접적으로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였다.
역시나 제독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손해라니? 거의 5분의 1로 깎는 건데도 말이오? 너무 낮은 가격을 받으면 시장에겐 치적이 아니라 정치적 실책이 되어버릴 거요.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나오겠지.」
“현 상황에선 5분의 1이 아니라 10분의 1까지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기름부음을 구하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후려칠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에누리를 남기고 싶은 욕심은 있군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무상의 호의는 온당한 감사를 받지 못하기 마련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서 더 깎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요.」
“하면 대금의 일부를 의료 및 방역용품으로 받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중간상 노릇으로 차익을 남겨서 좋고, 그 페드로 어쩌고 하는 시장은 값을 차감해줄 변명거리가 생겨서 좋을 텐데 말입니다. 또 경매 외적으로 다른 이권을 받아도 좋겠군요. 여간해선 드러날 일이 없는 이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장사꾼이 맞군.」
“적어도 사기를 치거나 계약을 위반하지는 않는 장사꾼이지요. 중국산 복제품이 아닌 물건을 중국인 사재기꾼들보다 양심적인 차익으로 드리겠노라 전해주십시오. 상품의 가격과 품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치적으로 내세우기에 충분하리라고.”
내가 이렇게 중국을 욕하는 와중에도 내 곁의 중국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애완동물 같은 교태를 부리는 중이었다.
제독이 한숨을 지었다.
「알겠소. 이것도 보호비 건과 묶어서 논의를 해보고 연락을 드리겠소.」
“그 시장이라는 사람에게 거시는 기대가 제법 크신 모양입니다.”
슬쩍 떠보는 말에, 망설이던 제독이 순순히 긍정했다.
「장차 이 나라를 바꿀 만한 인재라고 보고 있소.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고자 하오.」
이것 참. 그 배불뚝이가 이 애국자에게 이렇게까지 고평가를 받다니.
“그렇군요. 다른 용건은 없으십니까?”
「원래는 하나 더 있었지만, 이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구려.」
그럼 이만 끊읍시다. 정중하게 고한 멕시코의 애국자는 그러자는 내 대답을 듣고서 연결을 끊었다.